시장배 생활 체육대회 출전, 그리고 승리
복싱 시작 1년, 의정부 시장배 대회에 출전했다.
원래 내 계획상 대회에 출전하는 건 조금 더 훈련하고 내년쯤부터 나갈 생각이었지만, 관장님께서는 이번 기회가 복싱이 크게 늘 수 있은 좋은 계기가 될 거라 하시기에 나가보기로 했다.
실력이 너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마음과 또 한 편으로는 조금 설레는 마음도 가지고 출전했다.
본 글은 복싱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복싱을 시작하는 단계부터 대회에 나갔다 오기까지를 시간의 흐름대로 기술한다고 보면 되겠다. 최근에 복싱을 시작했거나, 혹은 아직 시작할까 말까 고민 중인 사람들이 본다면 "아 복싱~ 대강 이런 느낌이구만" 하고 참고할 수 있겠다.
복싱 시작
복싱을 시작하면 기본적인 잽, 스트레이트, 훅, 바디 등 다양한 펀치 자세를 배우게 된다.
자세를 교정받으면서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거나, 샌드백을 치게 된다. 가만히 있는 상대를 치는 것이다.
지면을 딛는 발 끝부터 무릎, 허벅지, 허리, 등, 어깨, 이윽고 주먹까지 전신의 힘을 쓰는 방법에 대해 배우게 된다. 온몸이 경직된 자세에서 나오는 힘과 펀치는 상대가 아주 쉬이 피하고 또 맞더라도 큰 타격을 줄 수 없다.
또 얼마 내지르지도 못하고 금방 지친다. 나도 해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냥 세게 치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대상도 정확한 자세로 치지 못하면 당연히 스파링에선 쓸 수 없다.
정확한 자세라는 건 사실 없다. 상대방이 내 주먹에 맞고 쓰러지면 그게 정확한 자세다. 다만 틀린 자세는 있다. 그 어떤 복서의 주먹도 백발백중이 아니다. 열 번을 내지르면 한 번 제대로 타격이 들어갈까 말까 하고 한 라운드 동안 수십 번에서 수 백번의 펀치 중에 하나도 타격이 안 들어갈 수도 있다. 틀린 자세는 내 펀치가 잘 맞지 않았을 경우를 상정하지 않은 펀치다. 오락실 펀치 기계를 칠 때는 그다음을 생각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이란 상대방이 내 주먹을 피하고 역으로 내 얼굴이나 복부에 펀치를 박아 넣는 것을 말한다.
실제 시합에서는 내가 크게 내지른 펀치가 맞지 않았을 때, 주먹이 나아가는 관성 때문에 몸이 휘청거리면, 상대방은 순식간에 내 배에 되려 크게 한 방 때려 넣는다. 그러면 나는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질 뿐이다.
멈춰있는 대상을 치는데 익숙해지면, 비로소 움직이는 상대를 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동시에 상대방의 주먹에 맞는 연습도 해야 한다.
처음엔 헤드기어를 쓰고 맞아도 머리가 띵하고, 어쩔 줄 모르겠고, 당황해서 주먹을 이리저리 휘두르기 바쁘다.
정말 강하게 머리를 맞으면 순간 컴퓨터가 일시정지하듯 사고가 정지되어 가만히 있게 된다.
움직이는 상대를 치는 건, 정말 어렵다. 특히 내 주먹을 맞추려면 현재 상대방의 움직임과 앞으로 취할 자세까지 생각해서 내 발 포지션을 상대를 때리기 좋은 위치에 가져다 둬야 한다.
모든 격투기가 그렇듯 상대와 나의 제공권을 알아야 상대 주먹 거리를 파악해 피할 수 있고, 내 주먹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새로운 사람과 주먹을 섞어도 빠르게 그 거리를 파악할 수 있다. 몸이 반응한다.
아주 교묘하게 내 몸은 그대로 있되 내 앞 발만 한 발자국 정도 슥 앞에 두고 잽을 짧게 치다가 상대가 백스텝을 밟으며 뒤로 피하려는 순간, 미리 앞에 두었던 발을 축으로 아주 깊게 내 주먹을 꽂아 넣어 상대를 치면, 상대는 “어? 맞을 거리가 아닌데? 어떻게 맞은 거지” 하면서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렇게 경기가 말리는 거다.
이런 순간적인 움직임을 캐치하고 대응하려면, 끊임없는 스파링이 답이다. 왕도가 없다.
때리는 연습도 해야 하지만 맞는 연습도 해야 한다. 왜냐면 처음엔 맞으면 정신이 없어서 사고가 정지된다.
그러다가 맞는 것도 계속 처 맞다 보면, 가드를 하고 맞으면서도 속으로 ”아 야식 뭐 먹지? “ 하며, 나름 여유롭게 다음 대응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다. 뭐든 하면 늘더라.
복싱을 하면 때로 체스와 장기, 바둑판에서 수 싸움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각 개인이 가진 특성(팔 리치, 키, 몸무게, 복싱스타일)에 따라 날아오는 주먹이 매우 다양하다.
물론 액체괴물이 아닌 이상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자세는 한정되기 때문에 두들겨 맞다 보면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건 있다.
참고로 헤드기어를 쓰고, 마우스피스와 두꺼운 글러브를 착용하고 복싱을 하면 격하 긴 해도 안전하게 할 수 있다.
복싱 글러브는 처음에는 엄지 손가락 부분이 뚫려있는 가벼운 연습용 글러브로 하다가, 체급에 따라 10온스, 12온스, 14온스, 16온스 정도로 나눠 착용한다.
무거울수록 글러브 크기가 크고, 안에 쿠션도 두툼하다.
복싱 리그 종류
복싱 리그를 구분해 보면 세 가지 정도로 나뉜다.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생활 체육 복싱 대회
- 일반인이 출전할 수 있는 리그다. 아마추어, 프로 전적이 없어야 한다.
- 라운드 수 : 2~3라운드, 휴식 : 30초 또는 1분, 같은 대회라도 결승부터 라운드 수와 휴식시간이 다를 수 있다.
- 주로 지자체 체육회와 협회가 개최하며, 간혹 지역 소재에 체육관에서 몇몇 체육관 간 친선 경기하는 경우도 있다.
(2) 아마추어(엘리트) 복싱
- 지자체 또는 공공기관 실업팀 소속(직장인으로서 연봉을 받으며 근무)이다.
- 이른바 국가대표 마크를 달고, 세계선수권 대회,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메달리스트라 불리는 선수들이 있는 복싱 리그다.
- 3분 3라운드, 1분 휴식
(3) 프로 복싱
- 복싱 협, 단체에 소속되어 그들이 주최하는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있는 리그다.
- 한국에는 KBM, KBF, KBC, KBA가 있고
- 우리에게 익숙한 마이크 타이슨, 메이웨더처럼 라스베이거스 큰 링에서 한 게임에 몇 천억 씩 벌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리그다. 보수의 하한과 상한이 없다. 못하면 한 푼도 못 벌고 잘하면 상한이 없다.
- 최대 12라운드까지 있고, 전적과 타이틀전 여부에 따라 주어진 라운드가 달라진다. 프로테스트 합격하면 4라운드 복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된다.
대회 준비(D 마이너스 2개월)
대회에 출전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스파링을 시작했다. 아랫니 교정을 하고 있던 터라 복싱을 시작하고 7개월 정도는 관장님께 1:1PT로 지도를 받으며 가벼운 메서드복싱 수준으로 단련했다. 메서드복싱은 아주 가벼운 펀치로 대치하며 상대와 천천히 주먹을 주고받으며 연습하는 아주 가벼운 스파링이다. 주로 각자의 전략과 상황 대치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한다. 복싱 실력 향상에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강도 높은 스파링만 하다 보면 전략적으로 고민할 시간이 부족해서 오히려 발전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똑같은 전략만 계속하면 금방 벽에 막히게 된다. 내 상대들이 내 전략을 알고 있으니, 아예 내가 피하는 경로에 주먹을 갖다 대놓고만 있어도 맞아버리는 상황이 생긴다.
이제는 스파링으로 실전 감각을 키워야 했다.
허공에 쉐도우를 하거나, 가만히 있는 샌드백과 관장님 미트로 기본자세는 잡았지만, 움직이는 물체를 진심으로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위치에 물체가 있어야만 온전한 자세로 칠 수 있고, 내 주먹을 맞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대에게 정적인 주먹을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컸다.
교정기를 떼자마자 바로 강도 높은 스파링을 시작했다.
내 첫 스파링 상대는 복싱만 10년 이상한 베테랑이었다. 나도 나름 웨이트를 14년 이상 해왔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아주 신나게 두들겨 맞고 정신 차렸다. 내가 해왔던 건 웨이트 트레이닝이지 복싱이 아닌데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는지.
푸시업을 한 번에 200개 이상하건, 벤치 100킬로를 가볍게 들 수 있건간에 내가 내지른 주먹에 상대가 한 대 맞을 때 상대는 열 대씩 치는 데는 장사가 없다. 게다가 온몸에 힘이 들어가 근육들은 잔뜩 성이 나서 수축되어 주먹은 제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강하게 때리려고만 하다 보니 베테랑에겐 아주 쉬운 목각인형 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다. 얼굴이나 배에 주먹이 마구 날아오고, 또 상대의 정신없는 움직임에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보니 몸도 머리도 뜨거워져 버렸다. 더군다나 배운 것들을 착실히 써먹기엔 앞의 상대가 너무 빠른 아웃복서라 내 사고회로가 따라가질 못하고 휙휙 휘두르기 바빴다.
감사히도 이 분은 지금까지도 수개월이 넘도록 여전히 매주 나와 한 번씩 스파링을 해주시고 있는데, 대회가 끝난 뒤 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이제는 근육으로만 치지 않고 몸도 잘 쓰고, 체력도, 움직임도 많이 좋아져서 나랑 하면 아주 재밌다고 한다. 나도 스스로가 느낀다. 이제 좀 할만하다고.
대회 준비(D 마이너스 1주)
대회 일주일 전, 관장님께서 링 위에서 실전처럼 해보자며 준비하라고 하셨다. 마우스 피스와 헤드기어, 글러브를 착용했다.
관장님도 진지한 스파링을 하시려는 듯 비장했다.
관장님께서 내가 웨이트를 오래 해서 힘이 너무 세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랑 스파링을 할 때 진심으로 주먹을 내지르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세에서 그게 느껴진다고 했다.
사실 맞다. 지금까지 스파링 할 때 진심으로 온몸을 다 써서 내질러 본 적이 없었다.
관장님께서는 주먹도 잘 써본 놈이 잘 쓴다고 이렇게 하다가는 시합 때도 몸을 제대로 못쓴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번 스파링에서 자기가 맞아줄 테니까 온 힘 온몸을 다 써서 쭉쭉 팔을 뻗으면서 최대한 내질러 보라고 하셨다.
실력이 좋은 사람들은 몸에 힘을 주던 안 주던 발 끝부터, 다리, 허리, 광배의 근육들이 쭉쭉 뻗어 나가면서 마치 고무줄 총이 발사되듯 주먹이 튕겨 나가는데
나는 혹여나 내가 전신을 다 쓰면 주먹 힘 조절이 안 돼서 강하게 하면 안 되는 스파링에서도 세게 하고, 강하게 해도 되는 스파링에서는 또 너무 세게 해서 상대방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이되 제대로 몸을 쓰질 못하고 있었다.
100킬로가 넘는 사람들이랑 스파링을 하면 모를까, 나와 비슷한 6~70KG대 사람들이랑 하면 분명 다치게 할 것 같았다.
관장님이 제자를 위해 스스로가 움직이는 인간 샌드백을 자처하셨다. 관장님도 늘 내 미트를 잡아주시기 때문에 내 주먹이 많이 아프다는 걸 잘 알고 있으셨음에도 각오하고 준비하셨을 것이다.
관장님은 자신은 가볍게 툭툭 치면서 매써드 복싱하듯 해줄 테니까, 나는 그냥 사람 하나 잡는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하라고 하셨다.
링이 울리고 라운드가 시작됐다.
관장님께서 가드를 하면, 가드를 하고 있는 팔을 부신다는 생각으로 가드 위로 그냥 스트레이트를 꽂아버렸다.
링 구석으로 밀고 나가면서 훅과 보디를 마구 치면서 압박하고 밀었다.
허나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나약한 마음이 있었나 보다.
관장님도 느끼셨는지, 나 관장이라며 자기는 괜찮다며 믿고 마구 치라고 하셨다.
라운드가 끝나는 링이 울리기 1분 전,
관장님이 눈으로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체력도 생각지 말고 정말 다 쏟아 낸다는 생각으로 내질러봐! “
나도 각오하고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치기 시작했다.
링구석에 몰아 마치 샌드백을 치듯, 40초 정도 반쯤 진짜 미친 듯이 주먹을 내질렀다.
관장님께 배운 모든 펀치를 날렸다. 잽, 스트레이트, 훅, 보디, 오버해드 훅, 어퍼를 마구 날렸다.
관장님도 놀라시곤 이내 몸을 웅크리고 강하게 가드 했다.
곧 견고하던 가드가 풀리고, 고개가 들리면서, 관장님의 눈이 서서히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내 명치에서부터 눈물이 차올라 이내 울컥 쏟았다.
이 사람은 진심이구나. 자기 제자가 대회 나가서 지지 말라고, 기죽지 말라고, 잘하라고.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이 세상 어떤 선생님이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하물며, 누군가 나에게 1억을 주면서 이렇게 맞아 줄 수 있겠냐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NO를 외칠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느낀 경험 중에 가장 숭고한 체험이 아니었나 싶다.
곧 라운드가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온 힘을 다 써버려서 바닥에 주저앉았고, 동시에 마음이 다시 울컥해 벅차오름에 감사하다며 연신 절하듯 관장님께 엎드려 고개 숙여 인사했다.
관장님이 말씀하셨다. 자기가 어렸을 때 복싱 처음 배우고 나름 자신감에 차서 첫 대회 나갔는데 졌다고. 그때는 가뜩이나 어렸을 때라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당신은 그 기분을 절대로 안 느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지난 1년 동안 운동을 설렁설렁했다면 모르겠는데 직장인이 퇴근하고 와서 하루에 3~4시간씩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지면 어떡하냐면서 대회 나가서 꼭 이기고 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내가 참 인복이 많다.
의정부시 생활 체육 복싱 대회 출전
아침 일찍 8시에 개최 장소인 의정부 종합실내체육관에 모였다.
크로스백에 운동 용품을 채워 넣은 다부진 체격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각 소속 체육관 관장님과 코치 중심으로 대회에 출전하는 관원들과 응원하러 온 동료들이 모였다.
긴장감을 이겨내려는 지 구석에서 벌써부터 몸을 풀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08시 30분경 계체량을 진행했다. 시설 한쪽 공간에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몸무게를 측정했다.
나와 같은 체육관 소속 30대 형님은 몸무게를 맞추려고 몇 주를 고생했다고 한다. 또 긴장감에 어제 한숨도 못 자서 컨디션이 최악이라며 연신 피곤함을 내비치셨다.
그런데 몸무게 측정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 입에서 계체가 너무 설렁설렁하다며 누군가는 '나이쓰~'를 외치고 누군가는 손해를 봤다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도 측정을 하고 나온 뒤,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며 “아 괜히 삽질했네”라며 빨리 편의점 가서 밥 좀 먹고 싶다고 하셨다.
나중에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거의 +2~3Kg 초과하는 것까지는 용인해 준 것 같다.
나는 이왕이면 높은 체급에서 조금이라도 더 센 주먹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다이어트도 하지 않고 내 평체보다도 한 체급 위인 체급으로 신청했기 때문에 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참고로 프로 리그는 한 체급당 1~2KG 내외로 아주 세밀하게 나뉘어 있지만 생활체육대회는 그렇지는 않다. 거의 5KG 단위로 나눈다.
다만, 생체는 성인과 미성년으로 우선 나누고 초중고로 한 번 더 나눈 뒤 체급을 나누고, 성인부는 20대와 30대로 나눈 뒤 체급별로 쪼개기 때문에 체급을 너무 세세하게 나누면 출전 선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체급 단위를 크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계체량이 끝나고 나고 2시간 정도 뒤에 시합이 시작된다.
주최 측에서 각 체육관 관장, 코치에게 대진표를 나눠주고 선수들에게 알려준다.
이번 시합에서는 링을 두 개 쓰고, 10시부터 시작해서 17시까지 점심시간 빼고 계속 진행했다.
한 게임에 2분 2라운드니 쉬는 시간과 경기 준비와 결과 발표하는 시간까지 가만해서 한 시합 당 10분씩만 잡아도, 오늘 하루 80경기는 넘게 진행할 것으로 보였다.
우리 체육관에서는 초등학생 1 명과 중고등 학생 5명 그리고 30대 3명이 출전했다.
가장 첫 경기인 우리 초등학생이 경기를 했다. 아쉽게도 졌지만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의연하게 내려왔지만 나중에 부모님을 마주하니 그때서야 부모님 품에 안겨 우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미소가 절로 나왔다.
고등학생 2학년인 ㅇㅇ군은 지역 복싱계에서는 유명할 정도로 잘하는 친구로 정평이 나있었다. 나도 그 학생과 스파링 해봤지만 엄청난 움직임과 주먹에 며칠 턱이 아팠다.
그 친구의 첫 경기는 예상한 대로 잘했지만, 오후 두 번째 경기에서 심판의 주의 경고 하나 때문에 판정에서 아쉽게 졌다. 너무 분했는지 링에서 내려와 소리를 지르며 시합장에서 나갔다. 보는 사람들도 안타까웠다. 그 정도 호승심은 예의 없는 거라고 할 수는 없겠다.
우리 불굴의 30대 라인들도 하나 둘 시합을 했다. 파워리프터인 아주 잘생긴 막내분께서 첫 번째 승리를 가져왔다. 온 힘을 다 쏟고 링에서 내려와 거의 15분 정도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다음 30대 라인 맏형이 경기를 했다. 오전부터 긴장된다면서 가만히 있질 못 할 정도로 제일 걱정 많이 하셨는데 막상 링에 올라가서는 아주 날아다녔다.
그리고 승리로써 지난 고생을 증명했다며 와이프분에게 연신 자랑을 하셨다. 보기 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경기가 그날 대회의 마지막 경기였다. 모든 경기 출전 인원과 사람들이 경기를 다 마치고, 이제는 관객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내 경기를 보게 버렸다. 그 큰 체육시설 안의 모든 시선이 내가 있는 링에 집중됐다. 부담스러웠다.
링이 울리고 내 경기가 시작 됐다.
나도 끈적한 인파이터 스타일인데 내 상대방도 오전 첫 경기에서 상대방을 1라운드에 보내버릴 정도로 파이팅 넘치는 인파이터였다.
오늘 내 전략은 초반에 뒷손 스트레이트로 크게 상대방에게 펀치를 날려 상대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라운드가 끝나기 1분 전부터는 체력을 다 쏟아 인파이팅으로 상대의 가드를 부시고 다운을 시키는 것이었다.
초반에 체력을 아끼고 뒤에 몽땅 쏟아낸 뒤, 휴식 종이 울리면 다시 체력을 회복했다가 다시 돌격하는 게 전략이었다.
왜냐, 지난 몇 주 강도 높은 스파링을 여러 차례 하면서 내 무기인 힘과 약점을 알게 됐다. 당장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는 체력이었다. 그래서 초반에 체력을 아끼다가 남은 시간에 펀치력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평소 실력의 반의 반도 안 나오는 듯한 어설픈 움직임에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연신 주먹을 내지르다가 금세 지쳤다.
마치 처음 스파링 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불행 중 다행은 십수 년간 열심히 키워놨던 근육들이 그 어설픈 실력을 살짝 숨겨주었다.
상대방이 내 주먹에 맞고 이거 뭔가 잘 못됐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연신 밀어붙였다. 1라운드 시작하고 1분 만에 상대가 스텐딩 다운 당했다. 사실 나는 그때 에라 모르겠다. 잘 안 풀리는데 빨리 밀어붙여서 경기 끝내야겠다 하고 온 힘을 다해 치고 있었는데 심판이 나와 상대 선수 사이에 들어와 막았다.
속으로 진심으로 이거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다운된 건 상대인데 내 체력이 하나도 안 남아 있어서 내 머릿속엔 “빨리 경기 끝내주세요! “ 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는 이 경기를 끝낼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쳤는데 중간에 심판이 막아버린 거다. 딱 두 세 방만 더 들어갔으면 아예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나는 지금 체력을 바닥까지 다 써버려서 다시 체력이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근데 상대가 정신 차리고 다시 달려오면 반대로 두들겨 맞는 건 내가 될 것 같았다.
심판이 상대의 양 글러브를 손에 잡고, 눈을 마주치며 괜찮냐고 물어봤다. 상대는 처음엔 흔들리다가 이내 괜찮다고 더 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이 정도로 세게 밀어붙였으면 바로 경기를 끝내도 안 이상했을 텐데 아쉬웠다.
참고로 생활체육복싱의 심판 규정은 안전 측면에서는 아마추어나 프로리그보다 훨씬 엄격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체육회에서는 다치는 사람이 발생하는 걸 가장 싫어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하는 행사인데 다치는 사람이 나오면 안 되지 않겠나. 그래서 대회에서는 헤드기어와 16온스 글러브(엄청 크고 두툼함)를 필수로 착용하고 시합을 한다.
다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선수들이 다칠 것 같으면 바로 경기를 중단시켜 버리면 된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세게 맞는 것 같다 싶으면 바로 경기를 끝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생체 대회에서는 저돌적으로 마구잡이로 나가서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유리한 경우가 있다. 생체니까 말이다. 수준 높은 사람들에게는 마구 들이댔다가는 오히려 크게 맞겠지만.
여하튼 경기가 지속됐고, 나는 있는 힘없는 힘 다 끌어다가 연신 주먹을 내질렀다.
마구마구 주먹을 내지르고 서로 시원하게 고개가 젖혀지니 관객의 호응이 장난이 아니었다. 시합하는 내 귀에도 또렸히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상대방이나 나나 둘 다 그리 격하게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관객의 반응에 동화돼서 그랬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안 했을 텐데 나중에 시합 영상을 보니 어찌나 부끄럽던지
내 흑역사 시합 영상은 영원히 봉인하기로 했다.
그렇게 영겁의 시간 같이 느껴진 2라운드가 끝나고
승리 트로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엄지발가락 끝부터 머리끝까지 내 피안에 있는 모든 산소가 바닥난 것 같았다.
시합이 끝나고 대회 종료식 때까지도 나는 경기장 구석 바닥에 누워서 일어나질 못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날 내 마지막 경기가 제일 재밌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원래 동네 개싸움이 제일 재밌는 법이니 말이다.
내년 시합이 기대된다. 조금 더 큰 대회도 나가고 싶고, 몇 년 후엔 프로 라이선스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파이팅' 세대인 90년대생이라 그런지
내 도전에 동화돼서
주변 90년 대생들이 하나 둘 복싱을 시작했다.
업무상 자주 보는 킨텍스 사업 파트너분들도 시작했을 정도다.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을 영혼에 세기고 살아왔는데
근 일 년, 웬만한 조폭들보다도 사람을 더 치고 산 건 아닌가 싶다.
태어나서 격투기는 처음이라.
지난 1년은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고 응전하는 시간이었다.
두려움이 없어지면 불안함이 사라진다. 삶에서 불안함은 변수다.
변수가 상수로 바꿘다.
삶에 가득찬 변수를 하나 둘 상수로 바꾼다는건 그만큼 마음이 한 결 편안해지는 게 아닐까.
이제 적어도 어디서 일방적으로 맞아 죽을 일은 없겠다.
또 내 가족, 내 사람들을 반드시 지켜야 할 때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게 됐다.
다음엔 수상인명구조를 도전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