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거리
일본 광고(정확히 말하자면 사가미 콘돔광고) 카피 중에 내가 좋아하는 카피가 있습니다.
‘사랑엔 약간의 거리가 필요하다’ 라는 카피죠. 이 카피의 방점은 사랑보다는 ‘약간의 거리’에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거리는 콘돔의 두께를 말하고자 했겠지만, 분명 인간관계를 통찰하는 카피임에 분명합니다.
이건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사이에도,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친구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거리’는 필요합니다. 예전 발리에 갔을 때입니다. 가이드가 있었는데 한국말을 꽤 잘하는 현지인이었죠. 그녀에게 안내를 받으며 여기저기 다니다가 그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는데, 그녀는 가족들과 따로 사는 게 목표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는데 갑자기 독립이라는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죠.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나? 다들 돈을 벌면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목표인데 그녀는 반대였으니까요. 조심스레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부모, 형제, 또 그 형제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살면서 분명 갈등이 잦아지고 결국엔 서로 벽이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을 각자 갖고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사는 게 오히려 더 좋다고 하더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의 얘기는 충분히 설득력 있고 공감 할 수 있는 얘기였습니다.
부모와 자식이니까, 사랑하는 사이니까, 같은 직장 동료니까, 같은 그룹이니까… 우리는 수 많은 이유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중요시 하죠. 물리적 거리 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최대한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니까 당연히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부대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열이면 열 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탓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간에 잘 아니까, 신경 써준다고 관심 가져준다고 너무 간섭을 해서 그렇죠.
손톱만큼의 거리감도 없이 그저 태어날 때부터 착 달라붙었던 사람처럼 우리는 서로간의 선을 지워버리고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거기서부터 흔히 말하는 갈등이 시작되는 거죠. 인간은 김훈이 말한 저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욕망’ 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망을 서로간에 적당히 외면하지 못하고 간섭하고 자신과는 다른 타인의 욕망과 부딪히면서 오해하고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상황에 다다릅니다. 쉽게 말해 인간관계가 금이 가는 거죠. 그래서 사랑에도 ‘약간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발리의 그 가이드는 살을 부대끼며 사는 대신 서로의 욕망을 살짝 빗겨 갈 수 있는 ‘약간의 거리’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하회마을의 집들 또한 서로의 길을 구부려 맞대면하기보다는,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보다는 비스듬히 외면하며 서로간에 존재의 품격을 지켜주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