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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Oct 05. 2018

사람을 사랑하는 교육

<에밀> 독후 에세이


1. 건강하지 않은 교육

 “행복한 사람은, 이를테면 평온하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가슴으로 껴안고 산다. 절제된 기쁨으로 자신을 관리한다. 반면 떠들썩한 즐거움이나 안달하는 욕망, 변덕스런 호기심의 뒤엔 항상 권태가 있다.” -<에밀> 4부 중-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포장하려고 노력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행복을 드러내는 것보다 품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내려면, 아니,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면 안에서부터 충만하게 행복으로 가득 차도록 만들어야 한다. 허영과 이기심, 명예욕과 권태는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가장하기 위할 때 작동하는 요소들이다. 행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의 심리는 마치 비눗방울과 같다. 크게 불면 불수록 주위의 기대와 관심은 아주 뜨거워지지만, 그 안에 든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가장 작은 충격에도 허공에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허영에서 비롯되는 만족감이 아니라, 온전히 느끼는 행복이다.

 대한민국의 입시제도를 통과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학생들, 나의 친구들을 발견했다. 이따금 나오는 표와 점수, 숫자들을 보고서는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포기한다. 만약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숫자가 우리의 행복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어젯밤 전투에서 죽은 전사자의 수, 오늘 일어난 자동차 추돌 사고의 사망자, 테러 희생자 같은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학습과 발달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험 점수 같은 것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한다면,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만약 이 점수로 인해 행복을 느끼거나 만족감을 얻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노력과 친구들의 조력에 대해 감사해야 할 일이지 시기하는 학생과의 비교에서 얻어져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입시 제도가 학생들에게 불어넣는 허영이다. 끊임없는 비교와 순위 매기기에 익숙해져 있다 못해 숨이 막히는 학생을 생각해보자. 만약 그가 어쩌다 성적이 떨어져 경시하던 친구에게 ‘지거나’, 미친 듯이 공부하다가 문득 자신 위에는 언제나 더욱 똑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를 생각해보라. 자신에게 가짜 행복을 채워주던 이기심과 열등감은 더는 그를 지탱해줄 수 없다. 밑바닥부터 공허한, 단단하지 못한 학생을 키워내는 것은 비눗방울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들려는 것과 같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번영한 사회이지만, 밤이 찾아오면 다들 스스로의 권태로 걸어 들어가는 사회,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2. 배움의 조건

 “학문을 사랑할 수 없는 아이에게 학문을 싫어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에밀>2부 중-

 배우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의지다. 그것이 없으면 교육은 성립할 수 없으며, 만약 그럼에도 가르침을 강행한다면, 교육 스스로가 세뇌의 철퇴를 들게 되는 것이다. 그 너머에서는 교육도, 가르침도 없다. 아이와 교사는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아이가 배움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는 기다려야 한다. 물론 계속해서 기다릴 수는 없다. 언젠가는 말하고 쓰는 법, 예의와 격식, 사회와 법률에 대해 알아야 할 때가 온다. 그러나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아이는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압박감 속에서 그것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성장하지 않는 아이는 절제되지 않은 이기심과 호기심으로 가장 조심하며 다루어야 할 것들을 자신의 설익은 영혼 속에서 마구 재단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입혀진 인격은 쉽게 양복점에서 한 벌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수와 과학, 역사에 대해 배우기 전에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인간 사회 속에서 일생을 보내는 우리는, 그렇기에 더욱 자신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인문학과 종교를 가르치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생각들이 결국 인문학과 다름없었음을 알게 될 때, 인문학은 더는 학문이 아니라 도구로서 그의 이성에 결합할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교육이 아닌가?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린 학생들의 신세 한탄 따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 기저에 숨겨진 진심, 즉 공부의 목적에 대하여는 아무도 쉽게 답해줄 수 없다는 것을 학생이나 선생이나 잘 알고 있다. 더 좋은 일자리, 더 좋은 대학이 공부의 목적인가? 학생들은 공부의 목적에 대해 그렇게 스스로를 포장하면서도 만족할만한 답을 도무지 찾지 못한다. 그것은 곧 학습 자체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지 못하다는 말과 동치이다.

 얼마 전 고등학교 물리 수업을 들으면서 있었던 일이다. 원자와 전자의 궤도에 관해 설명하고 있던 N 선생님은 전자의 궤도가 자연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대목에서 경이에 찬 눈빛으로 우리에게 신기하지 않으냐고 물으셨다. 가장 작은 곳에서까지 간단한 자연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원리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수업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당신을 전율하게 한다고 하셨다. 반짝이는 그 눈을 보면서, 나는 선생님의 학창시절, 처음으로 그 신비함을 깨닫던 어린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 선생님은 진정으로 우리 학생들이 학문의 즐거움을 깨닫도록 하고 싶으신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표정이 실망으로 일그러져간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은 어떤 반에서도 동의의 표현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청춘을 노력해 얻어낸 선생이라는 자리가 이렇게 딱딱하고 사무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아무런 보람도, 학문을 사랑하는 단 한 명의 학생도 학교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침전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떤 동기가 배움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가? 좋은 성적? 그것은 배움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이지 배움의 목적이 아니다. 친구들의 부러움? 그것이야말로 헛된 행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닌가. 배우기 위한 마음은 더 알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다. 그것 외에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 더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이성을 성숙하게 만들고, 학문을 발전시키며, 사회를 운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배우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교실로 들어서는 선생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곳에서 진정한 배움이 이루어진다. 교사는 아이들의 가장 작은 호기심에도 감동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구석에서 끌어내어 아이들에게 전달하려 할 것이고, 생계가 아닌 사명감과 의지로 둘러싸인 선생이 될 것이다. 배우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만큼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교육은 없다.

 청소년기의 가장 비참하고 비뚤어진 학생에게도 배우고 싶은 것은 있다.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고,-배우고 싶은 것이 없는 사람은 목적도 없는 사람이다-단지 잘못된 양육 습관과 또래의 어리석은 유혹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영화 <Freedom Writers>에 나오는 교사는 이런 학생들을 의지와 열정으로 부활시킨 사람이다. 슬럼가의 한 교사가 살인과 강간, 마약과 갱단에 찌든 교실에서 수업을 시작한 이후, 그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보통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 교실에서 본 것은 훈육과 체벌, 강제 정학이 아니라 인간애였다. 폭력과 이기심은 결국 결핍에서 나온다.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을 때; 기댈 곳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이기심과 잔인함을 덧댄다. 교사가 해야 할 것은 그 조악한 갑옷들을 들추어내며 올바르게 성장할 때까지 수치심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감싸주는 것, 사랑해 주는 것, 이해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아이들은 배우기를 원할 것이다.



3. 사람을 만드는 교육

 교육학자 존 듀이는 아동 시기의 교육에 대하여 ‘아동의 상태는 사실 미성숙보다는 가변성에 가깝다’고 하였다. 그는 학생을 어른으로 길러져야 할 미숙한 존재로 인식하기보다 그 자체로 가능성을 품은, 따라서 성인과 뚜렷이 구별되는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을 교육하는 데 있어 너무 빨리 가르치려 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아동이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야 할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충분한 숙고와 신중을 통해 양육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것은 <에밀>에 나타난 루소의 교육관과 일치한다. 건강하지 않은 지식인을 만드는 것보다 우둔한 청년을 만드는 것이 낫다는 것, 다시 말해 바람직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일찍 모든 것을 가르치려 드는 것보다 더 늦게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는 루소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남들보다 빨리 배우고 빨리 익히는 아이에게 찬사를 보내는 지금의 교육 시스템에도 일침을 가할 힘을 갖고 있다.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드러난 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 학생의 삶은 한국의 청소년들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시를 쓰고, 문학을 창작하고, 사색하고, 철학하고, 비판하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들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올바르게 교육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교육의 참 목표는 진정으로 사람을 좋은 계산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가, 좋은 시인, 좋은 철학가,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우리가 수학, 과학, 문학과 사회를 교육받는 것은 사실 그 내용을 모두 알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사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성숙하기 위함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초적인 연산과 사고능력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지성의 도야와 학문적 성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에서의 수업은 학생 본인이 참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해당 과목의 내용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학생 개개인이 정확하게 정의하기 전까지는, 바람직한 중등교육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학생이 주도하는 수업, 학생이 창조하는 지식, 학생의 공간이 고등학교에는 존재하여야 마땅하며, 그렇지 않은 곳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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