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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Dec 31. 2018

일기-2018

1년일기

    지난주에 이모댁에 갔더니 사촌 동생들이 내게 물었다. 

"오빠는 크리스마스가 좋아, 크리스마스이브가 좋아?"

    무슨 뜻이었을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더 어린 동생이 이렇게 말했더랬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 좋아."

    우문현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던걸까. 결국 두 선택지는 모두 설레는 날이었을텐데. 눈이 온다면 더욱 좋을 뿐일텐데. 나도 동생 편을 들어주었다. 


    상대성 이론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이과지만, 1년의 길이를 해석하는 건 문과 감성의 몫이다. 가까이서 보면 길지만, 지나가면 짧다. 1년이 너무 짧았다. 분명 자율동아리에 대해 써보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결국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내가 새해에 이런 설렘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그만큼 힘들었겠지.


    이번 겨울은 길었다. 그만큼 추웠고, 대신 행복했다. 만약 지금 내가 내 삶의 어느 한 부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나는 지금으로 돌아올테다. 이럴 수 있는 기회는 잦지 않다.작은 일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이 감사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슬럼프란 별 게 아니란 걸 알았다. 내 우울함에 더욱 우울해지는 순환에 빠지면, 그게 슬럼프다. 우울은 우울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아무도, 내 우울함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우울함은 내가 만들어낸 거니까. 그러니 우울하지 말자. 기쁨은 나눌 수 있지만, 우울은 곱해진다. 그것도 내게만.


     교보문고에 들려서 책을 많이 샀다. 시험이 끝나니 책 살 시간이 생긴 것이 가장 좋다. 문학동네시인선 시집 두 권과 <모든 순간이 너였다>, <사람들의 땅>. 이번 겨울의 일용할 양식들. 책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다. 무언가를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읽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 책은 사람을 만드니까. 따뜻한 이불 속에서 책장 넘기는 맛, 아무나 아는 건 아니다.


    대답을 오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기쁨 자체와 기쁨을 기다리는 설렘 중 무엇이 더 좋은가 하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가 설레는 까닭은 없다. 단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내 주변이 환해지기 때문에, 이유는 모르지만 다들 들떠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 조금씩만 따뜻해지면 된다. 연말에는 다들 따뜻해지기 때문에, 기대로 다시 부풀기 때문에, 다시 사람을 마중하기 때문에 설렌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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