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문학 교육
학생에게 문학이란? 누구에게는 공부해도 안 되는, 누구에게는 지겹고 짜증 나는 과목일 소지가 다분하다. 왜 문학은 우리에게 따분한 과목이 되어버린 걸까? 분명 조선 시대에는 선비의 세 가지 덕목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에 당당히 한몫 차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소설과 시는 우리 삶의 아픔을 치료하고 공감하며 더 나은 미래를 가꾸어나갈 수 있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 문학을 많이 접해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을지는 몰라도, 삶의 질은 어김없이 높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은 문학을 학교 교과목에 포함한 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문학을 어려워하는가?
문학이 독자에게 선물하는 효과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양성을 향한 포용력이다. 가상의 인물을 통해, 환상적인 세계관의 연대기를 통해, 때로는 감성 젖은 한 시인의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느낄 수 없었던 독특한 삶들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와 다른 모습의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학이 학교 교육에 적용된 모습은 사뭇 다르다. 문학을 접한 학생들이 각자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가르친 몇몇 구절과 표현법을 모든 학생이 똑같이 암기하고 있다. 시험을 보면서는 누가 문학의 '중요한' 점을 숙지하지 못했는지 평가하며,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문학은 '틀린' 것이 된다.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는 아이들이 시를 배우면 선생님께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장난기 어린 질문들이 많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많다. 고등학교에서는 시를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학생이 없다. 문학 시험공부는 주어진 해석표와 작가의 삶, 시의 창작 배경 따위를 계속해서 암기하는 것이 전부이다. 학교 시험은 시의 암기도를 평가하지, 이해도를 평가하지 않는다.
'잘 쓰인 시'라는 표현이 무의미한 것처럼, 잘 해석된 시라는 표현도 어색하다. 무엇이 '잘' 해석한 시인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주어진 단어들을 몇몇 공통 속성 등으로 묶어 주어지는 대로 받아적는 것이 잘 해석한 것이라면, 아마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는 시를 잘 해석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문학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다. 만약 일부 학자들에 의해 문학이 평가되고 분석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학생의 몫이 아니다.
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인간으로서 갖출 기본적인 사유 능력을 기르기 위함이지, 특정 시를 전문 학자들이 분석한 내용을 외우는 능력을 평가하기 위함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은 시를 완성도와 짜임새로 평가하라는 문학 교과서의 서두 부분을 찢어버리라고 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나 문학이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학교는 잘 평가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문학은 주관적이며 감동적이다. 책상에 앉아서 시 속에 담긴 표현법을 달달 외워야 할 것이 아니다. 만약 문학을 평가하려 든다면, 어느 누가 문학을 창작하려고 하겠나? 자신의 시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옳은지 그른지 심사받아야 한다면, 아무도 시를 짓고 글을 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즐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지적 풍요와 수천 년의 철학이 집합된 고전들, 시들을 음미하고 맛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저 문학의 기법들과 단어들을 분류하고 암기하기 위한 문학 수업은, 영어 단어 암기보다 못하다. 적어도 영어 단어는 써먹을 데라도 있다. 대구법, 비유법, 온갖 형식들을 도대체 어디에 쓸 수 있는가? 문학을 창작하는 데 쓸 수 있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을 창작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성과 깊은 성찰이다. 이런 것들을 완전히 배제한 현재의 교육에서 문학의 이론적인 부분을 숙지한다고 해서 시를 쓸 수 있는가? 현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학생들이 시를 쓰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싫어하는 지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1984>의 내용처럼 조금 좋은, 아주 좋은, 아주 아주 좋은 따위의 표현이 문장을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