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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Jan 29. 2019

20010121

겨울방학입니다. 주 4회 영어 학원에 다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학원으로 출발해야 했는데, 문득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창문을 열었더니 햇빛이 쨍쨍하게 눈을 찌르는데, 그때 알았습니다, 햇볕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느껴본 게 정말 오래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주위가 그렇게 조용하다는 것도요. 바람 부는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는데, 귀에서 이명이 들렸습니다. 찌잉 하는 기계음 소리. 그게 상황을 더 이상하게 만들었어요. 귀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학원에 가는 대신 집에 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을 갖는 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제 삶에.
방학에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마음을 놓고 지냈습니다. 곧 고삼이 되고 성인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다들 고삼이라고 한탄하지만, 나름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어른 같은 친구들도 많습니다. 제가 너무 작게 느껴질 정도로요. 다들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려고,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저만 같은 자리에 머물러있는 것 같았습니다. 공부하는 내용도 이제는 붕 떠버렸습니다. 이제까지는 무언가 새로운 개념과 알지 못하던 원리를 배우던 과정에서 쉴 틈 없이 배웠지만, 지금은 이걸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능을 친다고 하는데, 정말 잘 모르겠어요. 수능이 뭔지.
사실 고등학교 올라왔을 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중학교 때에는 그냥저냥 살던 애였는데요. 이 학교 오는 것도 정말 많이 떨었습니다. 혹시나 떨어지면 어쩌나. 집 근처에는 고등학교도 없었습니다. 1학년 때는 분에 맞지 않게 학급 게시판에 공지되는 대회는 앞뒤 안 가리고 모조리 신청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제가 물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양에 한계를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일주일에 보고서 서너 장이 가장 바쁠 때였습니다. 1학년 때 대회를 많이 나가야 2학년 때 도움 되는 입상을 많이 한다는 조언을 받고서 닥치는 대로 신청했습니다. 그때는 저보다 1년 더 많이 산 선배들이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갓 들어온, 복잡 대단해 보이는 학교를 줄줄이 꿰고 있으니 말이에요. 지금이야 직접 고삼이 된다니 선배들도 다 같은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 제 눈에는 다 큰 어른들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이야기한 내용이 아직도 선명하거든요. 고등학교는 한 학년 차이가 보통의 3년 차이와 같은 것 같다고 했었습니다. 얼마나 우러러봤는지 조금은 알겠죠.
2학년 올라오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하나씩 쌓여서 이제 100번째 편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씀’이라는 글쓰기 앱을 만나면서 조금씩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글쓰기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대단한 표현력이 없어도 사람들이 공감해줄 수 있는 글을 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저 고민이나 평소에 하던 생각들을 써 놓기만 해도 나중에는 다시 보는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실 학생이 힘든 일이 그렇게 다양한 게 아니니까요. 예전에도 같은 일로 힘들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내 일에 공감하는 건 특별한 경험입니다. 일기도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를 계속하면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도 작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로 인정되었다는 합격 메일을 보면서 한참 동안 만세를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 글을 봐주는 사람은 정말 적었어요. 하루에 20명이 보면 많이 보는 정도였습니다. 학생의 이야기에 큰 흥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제 이야기가 없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았습니다. 어떤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조금씩 아는 이론을 인용해가며 우리나라 교육을 비판하기에 급급했던 글이 많았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문장 속에는 제가 없었어요. 조악하게 짜 맞춘 논리만이 있었던 겁니다. 글을 읽을 때 어떤 사람의 솔직한 삶에서 감동받았던 기억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는 능력이 갖고 싶었습니다. 나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함께하고, 그렇게 1년이 훌쩍 갔습니다. 다들 입학할 때는 영원히 고삼이 될 것 같지 않았다고 하던 아이들이, 이제 입시생이라는 칭호를 달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도 이제 쓸 일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공부를 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점점 많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스스로 알아가던 것들이 많았는데, 어느새 학교에서 주는 대로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에 표시하고, 입시에 중요한 일들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배우면서  많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는 문학을 만끽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그 시가 주는 의미, 내 이야기 속에서 글이 해주는 역할 같은 것들을 충분히 생각해볼 여유가 없더라고요. 저는 학교에서 배운 백석 시인의 시 <여우난골족>을 읽으며 감동을 느끼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늦은 밤 제 방에 앉아 백석 시집에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그때의 <여우난골족>을 다시 발견할 때까지요. 만약 시집을 읽을 때도 옆에서 시인의 의도를 설명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아마도 저는 백석을 사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집의 한 귀퉁이에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이라고 적혀있던 것처럼. 좋은 글과 시를 품을 수 있는 여유와 기회가 학생에게는 필요합니다. 선생님.
고삼을 위로하는 글들, 말들, 이 나라에 차고 넘치지만,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힘든 이유는 사실 공부 때문이 아니라,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끔은 한 번씩 좁은 책상에서 온종일 앉아있는 자신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때로는 원망스러운 부모님들이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듯이, 학생은 학생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요.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보다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면 좋겠습니다. 웃음처럼 슬픔도 쉽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아주 힘들게 알았으니까요.
학생이기 이전에 사람인, 우리가 되기를 정말 바랍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요. 좋은 사람이 곁에 생길 겁니다. 그럼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집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거예요. 사람들 사이에서 산다는 건 아마도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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