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독후평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처음 본지는 벌써 5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 번 본 것은 아니다. 다시 보고, 곱씹어보게 하는 많은 메시지가 이 영화 안에는 담겨있다. 커서 다시 펴보는 동화책에서 새삼스러운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거듭 볼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주는 영화다. 나의 짧은 인생에서 꼽는 세 개의 영화 목록 안에 <파파로티>, <세 얼간이>와 함께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 한 번 더 찾아보았는데,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부러움을 느꼈다. 이제는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고등학생으로서 키팅 선생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다. 선생이 학생을 온전히 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학교와 분리된 교육관을 가진 선생이 존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고 인생을 즐기는 학생들의 모임이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책을 읽으며 부러움을 느꼈다. 우리는 왜 저런 삶을 누릴 수 없을까, 우리에게는 왜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시를 쓰는 학생으로서 누군가 함께 문학을 논하고 토론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사실은 자신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단한 적이 많은 것 같다. 생텍쥐페리의 <사람들의 땅>에서, 사막에 불시착한 파일럿은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앞에 보이는 호수가 신기루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나아간다. 동료가 그를 때려눕혀 더는 나아갈 수 없을 때까지, 마치 자신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능성에 존폐를 걸듯이.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가 주는 경험은 일반 독자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이미 사막에 던져진 배고픈 비행사이기에,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에 불과할지라도 소설에서 찾는 일말의 희망에 크나큰 부러움을 느낀다.
동굴 속에서 각자가 준비한 시를 낭독하고,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던’ 학생들에게는 과연 무엇이 새롭게 생겨날지, 온종일 닭장 같은 학교 건물과 독서실에서 종이 위에 써진 문제를 푸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지 생각하며 괴로웠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우리의 부모님과 사회를 지탱하던 경제 구조는 이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지금 경험하고 배우는 것들이 나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생각하며 괴로웠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는 이에게 공부하는 과정은 점점 그 자체로의 목적보다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기 때문에, 친구들이 하므로 공부하던 초등학교 때와는 엄연히 다른, 성인으로서 교육을 대하게 된다. 무엇을 배우고 경험하는지가 각자의 인생을 명확히 갈라놓는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처럼 공부하고 있나? 지금의 경험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는지 의심하게 하는 한 편의 영화와 책.
무엇이 당연한지, 무엇이 좋은지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또한 현실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자라면서, 점점 무엇이 나에게 올바른가가 아니라 무엇이 내가 속한 곳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지는가를 자연스레 묻고 있다. 각자 속한 다른 집단에서 다르게 통용되는 준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단절되기 마련이다. 점점 증가하는 사회 속 혐오와 배척이 다른 사람을 향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돌이켜볼 때, 어느새 우리에게 당연하게 되어버린 것들에게 한 번쯤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다들 저 멀리 보이는 신기루가 아무리 진짜라고 해도, 홀로 구조 신호를 보내던 어느 비행사의 뒷모습처럼 외롭고 당당할지라도. 한밤중에 외딴 동굴을 찾던 키팅 선생과 그 제자들의 마음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오 캡틴, 마이 캡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