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 정상화법
고삼이 되면서 새로운 시간표를 받았는데, 전년과 달라진 점이 꽤 있었다. 예체능 과목은 체육을 제외하고 사라졌고, 학문 범주로서는 한국사와 체육이 각각 두 시간씩 편성된 것 이외에는 수학, 과학, 영어, 국어가 나머지 표를 가득 메웠다. 입시준비생의 입장에서 보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겠느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표를 알아볼 수가 없다. 고등학교 시간표는 보통 과목별로 두 글자씩 허용되는데, 그 자리에 써져 있는 것들이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통1, 심영, 자통... 통? 과목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글자는 도대체 무엇을 뜻할까. 안 그래도 비좁은 차트에 '통'만 가득 차있다. '통'은 통합을 뜻하는 말이라는데, '자통'은 자연 통합 수학을 줄인 말이란다.
문학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불만 가득한 설명을 통해 이 '통'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는데, 바로 '공교육 정상화법'이었다. 정식 명칭은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으로, 길다. 이 법의 의도는 공교육의 본 취지를 고취하고 선행 교육을 방지하는 것인데,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 적용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해당 법 제5조 1항인 '학교의 장은 학생이 편성된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용 도서의 내용을 충실히 익힐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에 따르면, 학교 교육과정에서 지정된 교과의 교과서 내용 이외에는 수업에 포함시킬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참 바람직한 제도 같아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교과 이름을 뭉뚱그려 국어, 수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어과에는 문학, 문법, 고전 시가 등 다양한 분야가 있고, 수학에는 미적분, 기하와 벡터 등이 있다. 실제로 1, 2학년 시간표는 위와 같은 분류에 맞게 다양한 교과목이 혼재한다. 문제는 3학년의 시간표인데, 수능을 준비하는 3학년의 경우 국어과에서 특정한 분야, 예를 들어 화법과 작문을 교과로 편성하면 해당 분야 이외의 내용을 교과 시간에 수업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대학 수학능력시험 국어 과목에서 화법과 작문 분야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음을 생각해볼 때, 3학년 1학기를 화법과 작문 내용으로 모두 수업하는 것은 그 효율이 매우 나쁠 뿐만 아니라 해당 고교 수능 응시자들의 점수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당연히 이렇게 학교를 운영하고 싶은 교장 선생님들은 없을 것이므로, 적당한 해결책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통합 국어'이다.
통합 국어라고 함은, 한 교과목 내에 국어의 모든 분야를 적절히(본래 취지에 따르면 그렇다) 분배하여 교과용 도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수업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위 문제를 훌륭히 방지할 수 있다. 적어도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황당한 법에 적응하는 방법이 꼭 하나씩은 마련된다. 신기할 따름이다. 만약 전국 고교가 이와 같은 방법을 따른다면, 적어도 수능 이전 한 학기를 일부 분야만 배우는 데 쓰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다. 대신 법은 이름만 남게 되겠지만, 교육은 계속된다! 조금 뒤틀린 방향으로.
아직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았다. 지금까지 수업한 분위기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내가 받은 통합 국어, 자연 통합 수학, 심화영어 등의 교과서는 수능 이전까지 사물함에서 먼지만 쌓일 게 분명하다. 그 이유인즉슨, 해당 교과서로 수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짜잔! 고등학교 재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놀랍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학부모 세대들 중 몇몇에게는 놀랄만한 소식일 수 있다. 그러면 왜 정성 들여 만든 교과서로 수업을 하지 않을까? (사실 정성 들여 만든 교과서는 아니다. 급조한 티가 난다.) 정답은 간단명료한데, 수능에 연계되지 않기 때문. 그렇게 급히 만들어져서 수능에 연계되리란 보장도 없는 우리의 가엾은 '통합' 교과서들은 학교 폐지장으로 가거나 수능 전까지 사물함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대신 전국의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EBS 교재 <수능특강>, <수능완성> 시리즈는 허물어져가는 동네 서점에서도 절찬리에 팔린다. 수능에 연계되기 때문에.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EBS 연계 교재로 수업을 하고 학교 교과서는 형식상으로만 배부하는 것이 학생들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국 모든 학생들이 사실상 같은 교재로 수업하는 것이 교육의 평등을 이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 시작이고 출발이었는지 생각해볼 때, 지금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맞다. 다만 누구나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교육은 시나브로 뒤틀리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