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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May 16. 2019

가정의 달? 수행평가의 달

본격 수행평가 살아남기

    학생에게 가장 바쁜 달이 언제인지 아시는지.

    모의평가가 있는 3, 6, 9월일까. 내신 기간인 4, 6월일까. 적어도 내게는, 그 어느 시험도 없는 화창한 5월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5월에 처음으로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를 느꼈다. 일주일에 보고서 네댓 편을 써내고, 또 서너 번의 발표 준비를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매년 멘토, 멘티라는 이름으로 1, 2학년 학생들을 진로에 맞게 묶어주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때 내 멘토로 지정된 선배가 1학년 때는 공지가 붙는 모든 대회에 가리지 말고 참여하라고 했다. 수상하든, 않든, 대회를 경험해 보아야 2학년 때 정말 필요한 상만 탈 수 있는 거라고. 그래서 정말 모든 대회에 신청서를 냈었다. (선배 이름을 꼭 기억하겠다...) 열정만 가득했던 고등학교 새내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그 모든 대회의 8할이 5월에 있었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모든 수행평가의 8할도 5월에 있었다. 시험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대신 주어지는 현실은 때로 시험보다 더 가혹하다.

    

    현재 고등학교 3학년 교과과정에는 적어도 40%의 비율로 수행평가가 포함되어야 한다. (적어도 대구광역시 교육청의 지침에 따르면 그런가 보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30%였는데, 이도 20%대에서 증가한 수치였다. 경험상 2년 혹은 3년마다 한 번의 빈도로, 학기 첫 교과 시간에 교육부의 방침이라 어쩔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10%씩 반영 비율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반영 비율을 늘리는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사교육을 방지하고 더욱 과정 중심적인 평가를 하기 위해서다.

 

취지는 좋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과목별로 수행 평가 비율이 높은데, 이를 평가 항목 하나로만 구성하여 점수 편차를 크게 하면 형평성에 문제가 생긴다. (점수 편차가 크다는 말은 엄격히 채점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수행평가 시스템의 태생적 문제 때문인데, 객관식 문제 또는 채점 기준이 명확하게 명시된 주관식 문제 이외에 수행평가에서 임의로 점수 분포를 크게 했다가는 선생님들에게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 항상 성적이 좋던 아이가 수행평가 하나를 설렁설렁했더니 학부모님이 교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무슨 기준으로 우리 아이의 성적을 깎았느냐, 주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한 점수를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한다든지. 그렇게 되면 아마도 해당 평가 항목에서 왜 그 아이의 점수를 감점했는지 길고 긴 해명을 해야 할 테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40%를 잘라서 두세 개, 많게는 서너 개의 항목을 만들어 각각의 점수 편차를 아주 적게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면 혹여나 ‘장래가 촉망받는 학생’이 어쩌다 하나를 삐끗해도 반영 비율이 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강력한 학부모님께 해명할 위험도 적어진다. 그래서 나의 이번 학기 한국사 수행평가는 다음과 같다:


내용: 한국사 관련 자유주제 탐구 보고서 A4 한 면 분량으로 제출

평가 기준: 제출 및 무난한 내용(100점), 제출 및 엉망인 내용(98점), 미제출(0점)


    학생 입장은 어떨까. 선생님 한 명은 무난히 과목당 두세 개의 수행평가를 배정하지만 학생 한 명은 과목 8~9개에서 쏟아지는, 전혀 무난하지 않은 주당 댓 개씩의 보고서를 써내야 한다. 그것도 화창한 5월에 교실이나 방에 틀어박혀서. 보고서를 써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인터넷 위키에서 적당히 긁어모은 다음 한 페이지에 욱여넣은 다음 행 간격을 늘리면 된다. PPT 발표를 하라면 조금 더 귀찮다. 예쁜 템플릿을 찾는데 두세 시간을 보낸 다음 대본을 각 슬라이드에 적당히 잘라 넣고 틀리지 않게 읽는 수고까지 해야 한다. 그렇다. 비꼬는 중이다. (물론 정말 많은 노력을 하는 학생들도 있고, 고학년이 될수록 과제의 질도 개선된다.)


이렇게 수행평가를 적당히 해내는 일도 노력과 시간이 들기 때문에, 3학년이 되면 선생님들이 앞서 언급한 한국사 수행평가처럼 간단한 수행평가를 내신다. 내면 일단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주기 때문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변별해야 한다. 수행평가 때문에 지필고사 반영률은 각각 30%로 떨어지는데 이미 치열한 지필에서 반영 점수도 낮아 공부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정말 1점 싸움을 하게 된다. 저학년에서는 수행평가의 아득한 분량, 고학년에서는 지필고사의 좁은 문 때문에 고통받는 셈이다.


    수행평가 비율을 이렇게 늘리고 지필 점수를 줄이면 사교육 방지 효과가 정말 있을까. 사실은, 학교 수업의 정체성이 무너진다. 수업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학생이 많아진다. 수행평가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아진다. 고3 교실의 모습이다. 자사고나 특목고일수록 고학년 학생들 중 수시를 포기하고 정시 길로 접어드는 인구가 많은데, 일단 수시를 포기하기로 하면 일체의 내신을 챙길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수행평가는,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에게 있어 대학 진학에 도움도 되지 않고, 시간은 많이 들며, 수능 공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활동이 되는 것이다. 선생님들도 이런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시기 때문에 수행평가를 전혀 하지 않더라도 약간의 훈계만 있을 뿐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학교에서 과제로 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는 학생 개인에게 생각보다 강력한 자극이다. 학생으로서의 삶이 거의 12년을 향하는 고3에게, 비로소 해금되는 무언의 권리 같은 것으로 무의식에 각인되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학교에서 주어지는 일은 사실상 인생의 단기적인 목표와 다름없기 때문에, 그런 목표에서 표류하는 느낌을 주는 고등학교 3학년 1학기의 교실은 학생에게 묘한 자극을 준다. 절대적일 것 같았던 수업은 어느새 필요한 수업, 잠을 자는 수업. 다른 과목 공부를 하는 수업으로 나뉘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수행평가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신경을 써 보거나 선생님을 향한 마지막 예의 차림 같은 것이 된다.


사실 고3 내신이 홀대받는 가장 큰 이유는 수능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인데, 공정하다는 이유로 대입의 큰 축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시험이다. 고등학교 내신의 중요도를 크게 감소시키는 수능을 폐지하자니 남는 수시의 공정성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그렇다고 정시를 확대하자니 고등학교 내신은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 된다. 문제는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사교육, 개정 교육과정 등 다른 중요한 이슈들과 어지럽게 얽혀 누구도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이중적인 성격의 울타리 너머로 조금씩 발을 내딛기 시작하는 고등학교는 어쩌면 당연해 보였던 일들에 하나둘씩 이유를 묻고, 붕 뜬 목적과 과제들 사이에서 정말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상상했던 우리 교실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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