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유학 생존기 6
올해부터인지 미니멀리즘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내 몸 외에 다섯 개, 열 개의 물건만을 지닐 수가 있다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세어보곤 한다. 물론 미니멀리스트의 삶은 포기한 지 오래다. 간디처럼 물레 하나를 방 안에 놓고 정신을 수련하는 일은 잡다한 일을 좋아하는 내게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거니와, 내게 중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포기하자니 이미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너무 많이 사 버려서 정을 떨쳐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본 상황들 가운데 내가 가장 소유한 것들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은 제일제당 주식이었고,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에는 후지필름 카메라와 노트북, 대금 같은 것들이 있었다. 물론 물질적인 소유물들의 가격 순서와 같지만, 단순히 비싸서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의 범주에서 내가 살 수 있는 최대한 좋은 것들을 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집에 불이 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챙길 물건 세 가지는 지갑과 카메라, 대금이다. 엄청난 양의 사진 파일 때문에 최근까지 핸드폰이 첫 번째 순위였는데, 아이클라우드 정기 구독권이라는 손대면 안 될 엄청난 짓을 저질러버리면서 핸드폰은 그다지 중요한 물건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대부분 물질적인 물건들이었다. 비싸고, 복잡하며, 잊어버렸을 때 대학 과제에 치명적인 것들. 다른 것들은 대부분 대체 가능하거나 다시 살 수 있는 물건들이었고, 불에 타버리면 새로 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부터 창문에 벚꽃이 핀 것이다. 물론 진짜 창문에서 꽃이 돋아난 것이 아니고, 집 바로 앞에 벚나무 숲이 있는데 그게 마침 내 방 창문에서 전부 보이기 때문이다. 그게 참 좋았다. 과제하느라 집 밖에 나갈 시간은 없지만, 책상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는 와중에도 꽃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마치 방에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벚꽃 그림을 걸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고, 새가 날아다니기도 하고, 밤에는 전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자동으로 어두워지는 그림! 물론 이렇게 적으면 조선시대 산조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자연의 풍경을 묘사할 때는 누구나 선비스러워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케이블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게스트로 유명해진 유현준 건축가는 전통적인 차경(借景)의 개념을 말하면서, 창을 자연을 빌리는 도구로 소개한 적이 있다. 창문은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인테리어 방법이라는 말인데, 창을 통해 방에서 보이는 자연은 사계절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실내 소품과 가구들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한다. 물론 내 창문은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할 만큼 아름다운 정원이나 경치를 목전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고 봄에 벚꽃이 피는 그 두 순간들만큼은 인테리어의 일부라고 불러줄 수 있을 만큼 괜찮은 통로가 된다. 그러니까 뻔뻔스럽게도 집 밖에는 한 발짝도 내놓지 않으면서, 남들이 꽉 막힌 주말 산길을 감수하면서라도 해보려고 하는 꽃놀이를, 매일 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꽃이 실용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방에서 꽃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내가 과제를 더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더 잘 먹고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냥 보기에 좋은,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대상이 되어준다고 할 때, 그 역할은 쉽게 다른 곳에서 구해올 수가 없다. 노트북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을 틀 수도 있고 카메라로 좋은 사진을 찍을 수도 있지만, 꽃을 볼 때 즐거운 마음은 자극적인 코미디 대본과는 다른 역할을 갖는다. 웃기려고 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꽃은 거기 있고,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칙칙하기만 하던 창 밖 풍경이 오묘한 연분홍색으로 번지는 모습으로 그냥 좋은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애초에 그런 모습을 잘 찍어보라고 있는 것이다. 불난 집에서 창문을 떼어갈 수는 없겠지만, 꽃이 질 때까지 꽃은 여기 앞에 있을 것이고, 그러면 끝이 없는 과제를 하는 동안 조금 더 기분 좋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기분’은 아무데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