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프롤로그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길이란 풀이 없이 잘 치워진 땅이나 아스팔트였다. 길은 나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길은 밟고 지나가는 것이고,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놓인 준수해야 하는 경로였다. 길은 내게 선택지를 제공하고, 나는 선택한 길을 따라간다. 나는 이미 있는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으므로, 길이 나를 선행했다. 나는 길의 주인인 것처럼 길을 밟으면서도 동시에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길은 늘 침묵하고, 침묵함으로써 강제한다. 길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산 중턱에서 폭풍우를 만나거나 온몸이 젖은 채로 숙소가 없는 마을에 들어서도 길은 이어진다. 다음 마을이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길은 완고하고 거대한 현실을 이끌고 끊임없이 몰려든다.
그러나 표면적인 길만이 길인 것은 아니다. 정서가 비집고 통과하는 모든 현실이 곧 길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현실의 이면에서 흐르는 길을 정의한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나는 걷는다>의 서두에는 이런 편집자의 문장이 있다.
"길을 걸어갔던, 혹은 그러기를 꿈꾸었던 사람들은 길이란 게 걷는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세계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시선이 물질화된 것임을 알고 있다."
이 문장은 물질적인 길을 타협하지 않는 제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여행자가 만들어내는 경험적 세계의 장치로 종속시킨다. 오직 사람이 길과 그 위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이다. 길은 경험의 무대로서 기능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진짜 길은 개인이 하나의 덩어리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여기는 경험들의 집합이다. 이 길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대신에 의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순례의 많은 날들이 마을과 마을 사이의 이동보다는 함께 걸은 사람들, 먹은 음식과 느낀 감정들로 기억된다.
프랑스 남부에서 이베리아 반도 깊은 곳까지 뻗는 길이 오래 보존된 이유도, 그 끝에 야고보의 무덤이 있고 그 길을 걷는 행위가 순례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길로서의 순례길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순례길이 특별한 이유는, 동기가 무엇이든지 그 길을 순례의 과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길 위에서 의미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을 피해서 오는 사람이 있고, 사별한 아내의 유골함을 짊어지고 오는 사람이 있고, 신을 만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순례자들은 각자의 순례를 한다. 그들의 발은 모두 산티아고로 향하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길을 해석하고 정의한다. 산티아고 대성당은 42일간의 여정이 떠받치고 있는 장엄한 엔딩이 아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길의 마침표로서 다만 있는 것이다.
길은 정서가 시공간에 남기는 궤적이다. 개인이 의미를 부여하는 길과 그 자취를 따라 이어지는 여행에는 변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를 초월한 서사가 있다. 길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며, 언제든지 맛과 냄새와 대화의 기억으로 지금을 그 길 위에 접붙인다. 내 정서가 조직하는 이 초월적인 순례길 위에서 나는 아직도 하루 20여 km의 흙길을 따라 은퇴한 카레이서의 경기장과 미군 예비역 파일럿의 콕핏에 앉았다가 한 러시아인이 도망쳐온 우크라이나 전선을 서성거린다. 길 위의 이야기를 나의 정서가 통과할 때 그들의 인생은 나의 궤적이 되고, 그 선이 모여서 장(場)이 되고, 나의 세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