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전화
94년 국민학교 하굣길
늘 한 손엔 떡꼬치
다른 한 손엔 할머니 손
할머니 침대 머리맡의 소라과자 센베
입천장 까지도록 먹던 오란다
주기도문 외우면 용돈 타던 일요일
할머니 방에선 늘 약 냄새
다리 건너 시장의 계란집
계란 한 판 들고 오면서
할머니와 몇 번이나 멈춰 쉬었던 뚝방길
의정부 국도극장
할머니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둘이 봤던 이집트 왕자
회룡중학교 축제
할머니의 캠코더에 남은
내 첫 자작곡 무대
할머니의 떡국
그 안엔 늘 소고기
신곡동 동아아파트
동호수는 기억 못 해도
848 5804
수능 전날 밤
손에 쥐어준 할머니의 편지
한문이 가득했던 기도문
이등병 첫 면회
할머니가 지팡이 없이
나에게 뛰어오신날
휴가 때마다
할머니랑 둘이갔던
동호 갈비
고기는 내 앞에 몰아주고
할머니는 공깃밥에 게장만
할머니 침대 머리맡
A4로 뽑아 붙인 내 사진
TV에선 절대 안 나오는 내 노래
할머니는 TV에서 내 노래 들은 것 같다고
휴가 때마다 녹음했던 할머니와의 대화들이
내 자장가였던 병장 시절
하지만
산산조각 나버린 가족들과
마주치는 게 껄끄러워
할머니의 전화를 피했던 몇 년.
그렇게 내가 클수록 할머니는 점점 작아졌고
내 안에서도 점점 작아만 졌다.
더 이상 할머니의 전화가 오지 않았고
몇 년 후 다시 만난 나의 할머니는 병원에서
초점이 없이 천장만 바라보셨다.
엄마도 이모도 삼촌도 못 알아보셨다.
그런데 나는 알아보셨다.
입술이 바짝 마른
앙상한 나의 할머니
나는 나쁜 놈
정말 나쁜 놈
목사님이 할머니를 좋은 곳으로 보내주셨고
할머니는 더 작아져서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내가 아주 작은 생명체로 세상에 태어나
할머니의 품에 안긴 그때처럼.
다시 한번 할머니의 전화를 받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