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온난화를 200년이나 늦추다
어린 시절 흥미진진하게 보았던 김용의 소설 영웅문 1부 (원제: 사조영웅전)는 여진의 금나라가 중원을 제패하고 이에 밀려난 송나라가 남쪽으로 내려갔던 남송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형제를 맺은 곽소천과 양철심의 자제인 곽정과 양강의 출생에서부터 아버지들의 죽음, 그 아비를 죽여놓고서도 부인의 미모에 반해 남겨진 모녀를 데리고 돌아가는 금나라 고관, 금나라의 횡포를 피해 몽골로 도피한 곽정과 그의 모친.. 김용 소설의 특징이자 매력인 소설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과 실존인물의 절묘한 결합신공은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때 북쪽 몽골 고원에서는 수많은 부족들을 통일하고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는 한 영웅이 등장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테무친, 훗날의 칭기즈칸으로 불리게 된 사람이었다. 바로 곽정과 그의 모친이 몽골로 도피하였을 때 우연히 어린 시절 또래 나이인 테무친의 아들, 쿠빌라이를 만나 형제의 정을 나누며 칭기즈칸의 원정에도 참여하며 그의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품은 주인공 곽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며 결국 무대는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기에, 이 소설에서는 칭기즈칸의 중원 및 중동과 유럽에 대한 정복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등장하지 않는다.
* 김용의 소설 작품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시라
- https://brunch.co.kr/@jacquestein/1
그러나 우리는 안다.
헬레니즘 시대를 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대제국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떨게 했던 포에니 전쟁의 영웅 카르타고의 한니발, 프랑스의 나폴레옹..
인류의 역사에서 전신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는 쟁쟁한 인물들이 여럿 있으나, 그 성과와 통일을 이룬 영토의 크기에서 압도적으로 최고인 사람이 바로 칭기즈칸이라는 것을.
(물론 이중에 알렉산더 대왕은 생전의 업적이나 전략만으로도 칭기즈칸에 비견되거나, 그가 32세에 죽지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뛰어났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는 것은 차치하자).
그리고 우리는 또 알고 있다.
천하를 호령한 그의 몽골 기병대가 휩쓸고 지나간 곳은 파괴의 살육의 참담한 현장만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몽골은 항복하는 적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지만, 항전하는 적에게는 군인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모두 몰살하였으며 모든 것을 파괴했던 무시무시한 악마들이었다.
오죽하면 러시아(이후 소련까지)를 포함한 전 유럽에서는 칭기즈칸에 대한 공포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였으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난 결과, 칭기즈칸은 몽골 자국 내를 제외하고는 의도적으로 잊혀진 이름이 되었었다. 1979년 독일의 밴드 칭기즈칸이 노래를 불러 국제적으로 히트하기 전까진 ^^
사실 위에서 언급한 무시무시한 살육과 파괴의 정복자 이미지는 피정복국가와 그 국민에게는 끔찍한 기억이자 역사이겠지만, 칭기즈칸은 몽골 제국 내부의 시선으로 보자면 종교에 대한 관용, 계급 폐지, 몽골부족 통일 전까지 성행하던 약탈혼에 대한 금지 등 선진적인 정책을 많이 시행했던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군주였다.
또한 선전 포고 없이 적국에 쳐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고문을 금지했고 무조건적으로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죽이지 않고 그전에 자신들에게 완벽하게 복속할 기회를 주기도 하는 등 몽골인들에게는 모두가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영웅인 것이다.
13세기에 초원에서 홀연히 나타나 아시아, 중동,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거의 모든 문명권을 제패했던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이자, 단기간에 수많은 문명을 파괴하고 수없이 많은 인류를 살육했던 '칭기즈칸'.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이 세운 광활한 몽골제국은 동으로는 한반도, 서로는 비엔나 인근까지 뻗어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했다. 심지어 그의 아들들이 서쪽으로 정복 전쟁을 이어가던 중, 칭기즈칸의 사망으로 그들을 불러들이지 않았었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바뀌어 있었을지 자뭇 궁금하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동유럽뿐만 아니라 서유럽 전체와 바다 건너 영국까지도 몽골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을 수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서구 열강들의 득세로 이어진 제국주의 식민시대 역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세력의 주도로 상당히 바뀌었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가 바로 지구 차원의 위기를 억제시켜 기후 온난화를 무려 2세기나 늦춘 환경 영웅이라는 것이다. 물론 칭기즈칸 본인은 전혀 알지도, 의도하지도 않았던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중국발 미세먼지로 대기오염이 나날이 심해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칭기즈칸이 기후 온난화를 무려 2세기나 늦춘 환경 영웅이라는 것일까?
그건 앞서 언급한 바로 그 무시무시한 파괴와 약탈의 결과로 인해 문명화되었던 도시와 마을을 자연상태로 되돌린 덕분이었던 것. 칭기즈칸의 몽골 대제국 건설 이후, 이산화탄소 배출이 엄청나게 감소해 전 지구적인 대기오염과 기후 온난화를 무려 2백 년 이상 늦춰줬다는 것이다.
지난 2011년 환경전문 뉴스 서비스인 몽가베이(mongabay.com)에 의하면, 카네기연구소 지구생태학 연구팀의 율리아 폰그라츠(Julia Pongratz) 박사의 연구에서 칭기즈칸과 그의 군대가 벌였던 정복전쟁을 통해 지구온난화가 최소 200년 이상 늦춰졌고, 지구의 기온도 떨어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특히나 당시에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던 중국의 인구가 급감, 유라시아 대륙에서 무려 4,0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주요 대도시들이 자연상태로 되돌아가면서 사람들이 난방 등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던 목재와 석탄 사용이 급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 MPG)의 과학자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는데, 산업혁명기 이전에 전 지구적으로 기후에 영향을 끼쳤던 사건들로 크게 13세기 몽골의 정복전쟁, 14세기 유럽의 페스트(흑사병) 창궐, 16세기 유럽의 신대륙 발견 및 정복, 17세기 명나라의 멸망과 만주족 청나라의 등장 등이 손꼽혔다.
이는 모두 단기간에 수천만 명 이상이 사망한 역사적 사건들로 특히 중국 문명권의 파괴가 극심했던 몽골의 침략은 그중에서도 단연 1위로 꼽혔다. 몽골의 침략 이후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농경지에 삼림이 울창해지면서 그 산림이 광합성으로 줄인 탄소만 7억 톤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는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중국의 인구 급감, 고대로부터 진행된 급속한 도시화 속도의 지연과 함께 크게 줄어든 목재와 석탄 사용량 등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중국은 이미 남북조시대가 끝난 6세기말~7세기 초인 수·당 시대부터 인구가 1억 명을 돌파했었고, 그로 인해 땔감으로 사용하던 목재량이 급감하고 일부 지역들의 사막화가 진행됐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도시가 즐비해 목재가 부족했던 화북지역을 중심으로는 이미 당나라 말기부터 석탄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세기 송나라 때는 다양한 분야에 기술적 진보가 일어났고, 화폐(지폐) 사용이 정착되어 원거리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석탄 사용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으며 대기오염과 같은 환경문제도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송나라가 몽골과의 오랜 전쟁 끝에 멸망하고 이 과정에서 송대의 뛰어났던 과학기술들이 사라지면서 인류의 석탄 사용량과 기술문명의 발달이 상당기간 후퇴하게 된 것이다.
또한 몽골제국이 거쳐가며 멸망시킨 서하, 위구르, 서요, 호라즘(이슬람) 등 남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 서로는 카스피 해를 넘어 중앙아시아 전역을 거의 지배하에 두고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뻗어나갔던 정복지역의 파괴와 문명의 후퇴까지 감안하면 기후 온난화와 같은 환경문제에 끼친 그 영향은 실로 전 지구적이었을 것이리라.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한없이 슬프고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었겠지만,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는 아마도 무심한 표정으로 담담히 지켜보다가 무심코 한마디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저 녀석(칭기즈칸), 좀 하는데?
땅과 대기가 더러워져 피곤하던 참인데 칭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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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쓸데없는 상상.
만약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의 외전(外傳)이 있어 칭기즈칸이 죽은 이후, 몽골제국의 정벌이 중원의 무림고수와 영웅호걸들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끝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남송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남중국 일대가 초토화된 후 몽골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지 않고, 우리 고려처럼 화친의 조약을 맺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중근세 중국의 기술 문명이 유실되지 않고 대를 이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그랬다면 송나라는 몽골과의 어머어마한 전쟁의 과정을 통해 국방과 외교에 대한 중요성에 눈을 떴을 것이고, 또한 국가적 차원의 기술개발과 국방력 강화에 계속해서 힘을 쏟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중국을 국제 질서의 중심으로 인정하고 조공(朝貢)을 바치면 조공국의 국왕을 책봉(冊封)해 주면서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는 중화사상에 젖은 안일한 외교가 아니라, 몽골과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영토의 확장에도 더 적극적이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와의 피곤해질 관계는 잠시 제쳐두자.
만약 역사가 그렇게 전개되었다면 제 2차, 3차 정화의 원정이 일어나 중국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산업혁명 역시 중국에서 일어나 동아시아 일대가 문명의 중심이자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올라섰을 것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그 누가 절대 그랬을 리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