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할
재시는 이 식사 준비를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아니 거의 6시간을 다이닝룸에만 있었다. 할이 지구에서부터 챙겨 온 식재료를 해동하고 다듬느라 실질적인 준비는 할이 유로파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된 거라고 한다.
“할 덕에 진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할”
재시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온 할을 두 팔로 힘껏 잡아당겨 꼭 안아주려고 했지만 할이 안기지 않으려 뒤로 뺐다. 재시의 앞치마에 묻어 있는 식재료의 잔해들 때문이었다. 할은 먹을 것을 지급받거나 혹은 구입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아니, 나는 뭘 한 게 없어. 그냥 같은 같은 트램으로 온 것뿐인데, 굳이 고맙다고 한다면 운반료만큼의 자원을 지불한 지구유니언 측에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공식적으로 일개 기업인 블라디미르 그룹과 지구유니언은 동등한 관계이지만 지구유니언은 동등함을 넘어선 보다 더 친밀한 사이이길 원했다.
“그래. 고맙지, 고맙지.” 재시는 들뜬 걸음으로 모두를 다이닝 테이블로 안내했다. 할이 읽은 재시의 기록에는 재시가 세 번의 출산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는 재시가 체내 임신을 세 번이나 경험했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시의 뒷모습은 그냥 20대가 아닌, 훨씬 열심히 관리하는 20대인 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키도 할보다, 아니 남편 민수보다도 8cm가량 더 커 보이는 것이 멀리서 보면 할보다 더 근사해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할은 웃엉덩이를 하나로 바짝 모으고 배꼽을 등 쪽으로 힘껏 쥐어 잡고서 재시의 뒤를 따랐다. 가슴은… 가슴은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스스로 선물해줄 것이다.
테이블에는 연기가 나는 죽은 생명체들이 접시 또는 그릇 위에 놓여 있었다. 어떤 것들은 윤이 반질반질했고 어떤 것들은 액체 속에 잠겨 있었다. 주로 식물이 많았고 곳곳에 토막 난 동물 조각도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자극적이야!” 할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을 뱉었다. 순간 재시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 나빠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하하, 당연하지. 할은 그렇게 느낄 수 있어. 유니언에서는 지급받는 큐브만 먹고 살아왔을 거 아냐.”
재시는 할 앞에 어떤 동물의 살덩어리를 놓아주며 큰소리로 웃었다.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 여러분 제일 연한 부위는 오늘 이 자리를 있게 해 준 할에게 양보합시다. 고기는 처음 씹어보는 것일 테니.”
미하르는 언제 속이 안 좋았냐는 듯 재시의 요리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스캇 녀석이 아팠던 건 다 이것 때문이야.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런 거라고. 이제야 정말 살 것 같다! 재시, 재시가 요리를 꽤 하는구나!”
“미하르, 제발 천천히 먹어.” 그런 미하르를 챙기며 흐뭇하게 자리에 앉으려는 재시를 민수가 불렀다.
“재시, 나 물 한잔만 가져다줄 수 있을까?”
재시는 바로 물컵을 가지러 갔다. 할은 이 광경이 몹시 생경했다.
“할도 이번 기회에 요리하는 법을 배워보는 건 어때? 혹시 알아? 나중에 또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지?”
씹는 것에 열중하느라 할이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입속에서 나는 무언가가 씹히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민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할? 할? 민수가 물어보잖아.” 물 잔을 채우며 재시가 할을 도왔다.
“응? 민수? 뭐라고 했어?”
“하하, 할도 요리를 배워 보는 게 좋겠다고.”
“아… 음… 그래, 민수 왜? 혹시 블라디미르 그룹 소속 팀원들은 요리기술이 필수야?”
“하하하, 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요리 같은 거 안 해. 나뿐만이 아니라 미하르도 그런 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민수가 할이 귀엽다며 웃었다. 미하르도 입꼬리가 올라간 채 열심히 고기와 채소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은 입은 계속 움직이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머리를 굴렸다.
민수에게 물이 가득 찬 컵을 건네는 재시가 또 친절하게 거들었다.
“민수, 할을 당황시키지 마. 할, 나는 의사잖아. 이건 모두의 컨디션을 위해서 하는 일이야. 의사로서 팀원들 컨디션 유지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말이야.”
“아… 그래? 나는 또 내가 모르는 무슨 말실수라도 한 줄 알았네.”
뭔가 납득이 안 가는 할은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고 싶었지만 마땅한 주제가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일 만만한 그루이트 이야기라도 꺼내야 하나 싶어 미하르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미하르가 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에 있던 음식물을 바닥에 뱉고 “어! 이거 왜 이래?!” 하고 소리쳤다.
만족스러움이 충만했던 그의 얼굴은 뱉음과 동시에 역함으로 꽉 찼다.
“미하르 왜 그래?” 재시가 드디어 의사다운 일을 하려는지 미하르에게 다가갔다. 미하르의 안색을 살필 줄 알았는데 미하르가 먹던 음식의 냄새를 ‘습습’ 맡았다.
“왜 괜찮은데, 미하르. 설마, 또 속이 안 좋니? 좀 참아봐.” 무언가 재시의 말에 귀찮음이 묻어났다.
“그, 그래. 너무 급하게 먹어서 그런 가 봐. 좀 쉬었다 천천히 먹어 볼게.”
미하르는 그대로 들고 있던 도구를 내려놓은 채 눈을 감고 깊은 호흡만 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약간의 식은땀도 비쳤다. 냄새를 피하려는지 입을 한껏 벌리고 목으로만 숨을 쉬는데 그것만으로도 몹시 불편해 보였지만 재시는 미하르가 그렇게 숨 쉬게 내버려 두었다. 미하르는 진짜 재시의 요리가 불편하다면 그냥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도 될 텐데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재시가 상관인 대장 민수의 아내라서 눈치가 보이나 보다. 보유 자원 규모만 다를 뿐 지구유니언이나 블라디미르 그룹이나 조직사회는 다 똑같구나.
“할은 어때? 먹을 만해?”
재시의 질문에 할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 자극을 말로만 표현하는 건 몹시 어려웠다. 춤을 춰야만 했다. 소리도 질러야 했다. 큐브만 알고 있던 할의 인생에서 이런 구강 자극은 처음이었다. 이 자극 때문에, 오로지 이 자극 때문에 재시를 사랑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모든 걸 있는 그대로, 침착하고 지적이지 못 한 방법으로 표현한다면 이들은 나를 업신여길지도 모른다. 이 쾌감을 솔직하게 방출하지 못하다니, 아 괴롭다! 할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 입은 계속 움직였다.
“재시, 이 스테이크…”
이때, 여유롭게 음식을 음미하던 민수가 손날로 콧구멍을 막았다. 스테이크를 쏘아보는 그의 얼굴에 메스꺼움이 번졌다. 낯빛이 흙색이 된 민수는 헛구역질이 올라는 듯 애꿎은 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민수!” 재시가 이번엔 스테이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민수를 살폈다. “민수, 당신이 왜 이러는 거지? 당신은 이럴 이유가 없잖아.”
말이 좀 이상했다. 그럼 미하르는 아플 이유가 있어서 아프다는 건가. 민수의 헛구역질 때문인지 목구멍으로만 숨 쉬며 버티던 미하르도 결국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나 싶었는데 결국 뱃속의 음식물이 넘어왔는지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재시는 그런 미하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재시의 눈은 민수만 쫓았다.
“민수,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당신이 왜 아픈 거야?”
“재시 제발 진정해.” 민수가 구역질과 토사물 사이에서 가까스로 대답했다.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당신이 왜 이렇게 아픈 거냐고?!”
왜인지 재시의 목소리엔 걱정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민수가 아픈 건 처음이라지만 재시는 어떻게 치료하면 좋을지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본 듯 격앙된 목소리와는 달리 능숙하게 민수에게 약물을 투여했다. 다행히 미하르와 민수의 증상은 더러운 것에 비해 크게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할은 지금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며 튀지 않게, 조용히 자신 몫의 요리를 한점 한점 입에 넣었다. 미하르와 민수 때문에 입맛이 떨어질 법도 한데 한 번 알게 된 이 구강 자극을 멈추는 건 쉽지 않았다. 뭐, 저 둘은 재시가 알아서 하겠지. 이때, 테이블 중앙에 한 줄기 빛이 올라왔다. 이 빛은 곧 천장까지 닿더니 동그란 구체로 변해 이곳, 유로파 행성을 보여주는 홀로그램 지도로 바뀌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핑크색이다.
“그루… 이… 트.” 몇 가지 약물에 진정제까지 투여받던 민수가 눈을 가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핑크 구 한쪽에 초록색 빛이 반짝였다. 민수가 몇 시간 전 방생한 그루이트 속에 심어둔 나노칩이 반응을 보내는 것으로 보통 그루이트들은 젤 속 깊숙한 곳에서 생활하는데 그 그루이트가 젤 표면 근처로 올라온 것이다. “그래, 그 그루이트네.” 재시는 차갑게 대답하며 투여 중이던 진정제를 끝까지 주사했다. 민수는 반짝이는 초록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취한 듯 넋 놓고 바라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민수의 입에서 토사물과 섞인 침 한 줄기가 바닥으로 늘어졌다. 재시에게는 그런 민수를 깨울 희석제를 투여해 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할은 미하르에게 연결해 보았고 변기를 붙잡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할은 드디어 구강 자극을 멈출 기회를 잡았다.
“재시, 내가 가볼까?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그냥 관찰만 하고 오는 거잖아. 저 동물들은 위험하지도 않고.” 재시가 잠든 민수를 무빙 체어로 옮기느라 할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재시, 나 혼자 다녀오겠다고. 재시!” 재시를 부르는 할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런 할을 돌아보는 재시의 얼굴엔 아까의 친절함은 없었다.
“그놈의 그루이트… 할 네 마음대로 해. 나는 내 일을 해야 돼.”
“그래, 그럼 재시, 민수가 일어나면 말 좀 잘해줘! 다녀올게.”
재시는 대답 없이 무빙 체어만 움직였다.
“재시? 재시? 재시? 말 잘해 줘, 알았지? 잘 말해 줄 거지, 재시?”
재시가 잠시 멈춰 서서 한 숨을 짧게 쉬고 대답했다. “그래.”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