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할
할은 신났다. ‘하필 이럴 때 민수까지 아파 주다니! 그렇다면 지금 내가 여기서 발견하는 건 전부 내게 되는 거야! 100% 나의 실적!’ 할은 유로파 탐사 유닛을 챙겼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서 능숙하게 유닛을 챙겨 입었다. 지구에서 입어봤던 훈련용 유닛보다 그 부피는 컸지만 무계는 훨씬 가벼웠다. 스캇의 포획유닛까지 챙겨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첫 직접 탐사이고 혼자 나가는 것이니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유로파 대기에는 지구와 달리 암모니아, 메탄, 황화수소의 비율이 높고 그중 황화수소의 비율이 유난히 높은데 이 가스들을 걸러주는 필터 때문에 블라디미르의 유닛의 부피가 더 큰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가볍다니! 블라디미르의 기술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 처음엔 미세하게 썩은 달걀 냄새가 났지만 이 정도는 기지에서 미하르와 민수의 토사물 향기를 이미 경험해서인지 충분히 참을 만했다. 유닛을 입은 할은 거대한 풍선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끝 한 마디씩만 랩에 씌워진 듯 유닛 표면에 밀착되어 밖으로 꼬물꼬물 튀어나와 있었다. 손바닥의 공기압을 느끼며 검지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한 번 튕기니 그 작은 사이로 핑크색 홀로그램 지도가 생성됐다. 아름다운 초록색 반짝임이 보인다.
유로파는 행성 전체가 거대한 젤로 덮여 있다. 표면장력을 형성해주는 탐사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늪에 빠지듯 끊임없이 가라앉을 수 있다. 물론 가라앉는 도중 딱딱한 바닥을 만나 튕겨 오른다면 다시 젤 밖으로 나올 수 있겠지만 뎊스게이지가 알려주는 재탄력 가시거리는 사방 수미터 이내에서 재도약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젤 속에서의 산소 부족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닛 안에 비축된 공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비상시 사용할 수 있는 공기압 추진기가 있지만 이것도 공기를 사용하므로 횟수 제한이 있다. 즉, 넘어지지 않아야 하고 넘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스캇은 이 유닛 사용에 특히 능숙했다고 한다.
‘처음이지만 알고 보면 처음이 아닌 거야, 이미 여러 번 시뮬레이션해봤잖아. 나도 스캇만큼 할 수 있어!’
할은 훈련받은 대로만 움직였다. 최대한 침착하고 능숙하게. 급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속도가 붙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리가 푹 푹 꺼지고 바닥이 출렁거렸지만 젤의 표면장력을 흐트러트리진 않았다.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출렁이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할은 할 스스로 이 직접적인 첫 경험이 처음인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할은 초록색 반짝임으로 향했다. 그곳에 민수가 방생한 그루이트가 있다. 그리고 곧 할은 넘어졌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야악!!!]
돌고래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할의 발 밑에서 잔잔하게 출렁이던 젤이 갑자기 푹 꺼졌다. 순간적으로 할은 잠시 공중에 떠 있다 바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디딛고 있던 게 사라졌기 때문에 떨어졌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떨어지고 난 후다. 할은 여기가 지구였다면 풍선 같은 유닛의 탄성으로 지금쯤 바닥에 부딪혀 공처럼 튀어 올랐을 거라고 상상하며 젤 속에 꾸루룩 가라앉고 있었다. 얼핏 둘러봐도 빛이 닿지 않는 젤 아래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기압 추진기를 써야만 한다. 그리고 추진기를 사용하려면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데 아까부터 할의 발목을 잡고 마구 몸부림 치고 있는, 활짝 핀 카틀레야 꽃처럼 생긴 성기를 달고 있는 이 그루이트를 해결해야만 한다. 할이 젤 속에 빠진 것도 이 그루이트가 갑자기 젤 속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뭐지? 이건! 나를 공격했어?! 왜? 이런 사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할은 더 이상 침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그루이트를 떼 내지 못 한다면 추진기 출력을 최대로 쓴다고 해도 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할도 있는 힘껏 그루이트를 떼 내려 몸부림쳤다. 젤 속에서의 몸부림은, 더군다나 유닛을 입은 채로 움직이는 건 할한테 매달려 있는 저 그루이트에 비하면 0.5배속 슬로우모션으로 보일 테지만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해 봐도 별 수가 안나는 침착하지 않은 할은 추진기를 그루이트를 향해 쐈다. 할은 총알처럼 나가는 날카로운 공기 줄기를 기대했는데 농도가 짙은 젤 구간이었나 보다. 뻗어 나가는 듯 보이던 공기는 젤 속에서 작은 공 모양으로 뭉쳤고 할의 발목을 붙잡은 그루이트는 그 공기공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다른 그루이트가 나타났다. 발목의 그루이트와 달리 엄청 컸다. 할은 이제 완전히 당황했고 또 다른 그루이트에게 추진기를 마구 쏴댔다.
‘제발! 하나라도 얻어걸려라! 하나라도 맞아라!’
그러나 또 다른 그루이트는 할이 쏴대는 공기공을 가볍게 피하며 할에게는 일말의 관심을 두지 않고 할에게 붙어 몸부림만 쳐대는 작은 그루이트의 카틀레야 성기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성기를 붙잡힌 그루이트는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할의 발목을 놨다. 성기를 붙잡힌 만큼 저항을 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보였지만 효과는 보지 못했고 그대로 끌려갔다. 할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도 끌고 가주기를 바랐다. 방금 무분별하게 공기를 써버린 탓에 추진기를 쓸 수도, 더 이상 호흡할 공기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흡곤란이 왔다.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할은 멀어지는 카틀레야 꽃잎을 생각하며 눈을 가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빛은 뭘까? 저것들 성기에 생물발광화학물질이 있다고 했었던가? 오렌지빛이 어슬어슬 점점 사라져 가는 게 보인다. 그 빛을 보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분명히 기지에서 내 유닛에서 보낸 위험신호를 감지했을 것이다. 몇 분만 더 버티면 되지 않을까?
‘젤을 먹자!’
지구 유니언이 블라디미르 그룹과 더 돈독해지려는 데는 여기 유로파행성 젤의 영향이 크다. 항성 간 이동 트램에 이용되는 동면 캡슐용 겔(gel)의 원료로 유로파의 젤이 매우 유용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유로파를 처음 발견한 블라디미르가 갖게 될 독점권에서 떨어질 콩고물만 받아먹을 수 있어도 지구유니언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이익이다. 여러 가지 가공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 원 젤이지만 급한 대로 겔(gel)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폐에 흡입된 젤은 무호흡의 가사상태일 때도 잠시 동안 혈관과 뇌에 산소를 공급한다. 결국 정신은 잃겠지만 그 이후의 일은 나를 발견할 누군가에게 맡겨 보자! 할은 조심스럽게 입에 밀착되어 있는 유닛의 연결부를 열었다. 썩은 달걀 냄새가 코를 쑤셨다.
‘치사량은 아니야. 삼키자!’
분명 젤 속의 황화수소 비율은 치사량이 아니야… 수치를 공부했어! 아니라고… 아닌데… 그래도 이건 너무 지독하다. 이러다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식도 구멍으로 젤을 밀어 넣으며 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동면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제발… 잠깐만 정신을 잃자. 역류하려는 젤 때문 에라도 괴로워 정신을 잃고 싶은 할에게 갑자기 그루이트들 소리가 들렸다.
[끼끼끼, 끼이이이이, 키잌 키이끼]
간절하게 정신줄을 놓치고 싶은 할을 방해하는 소란스러운 소리다. 순간 감은 눈을 뚫을 기세로 강한 초록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 초록빛이 할을 젤 밖으로 밀어냈다. 할은 옛날 고전에서 읽은 ‘주마등’을 떠올렸다. 휴먼이 죽을 때가 되면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치듯 지나간다고 했는데, 저 초록빛이 너무 밝아 주마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그제서야 할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