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4 보고서
크게 아프고 난 민수와 미하르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마치 언제 아팠냐는 듯 깊은 숙면을 취한 후 배가 몹시 고프다며 먹을 걸 찾았다.
미하르는 요리 냄새를 맡고 다시 소화불량과 속의 거북함을 호소했지만 재시가 기다렸다는 듯 능숙하게 약을 처방했다. 금세 약의 효과를 본 미하르는 민수와 함께 빠르게 빈 속을 채워갔다. 할은 허겁지겁 먹어 대는 둘을 보니 눈치가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재시의 요리를 그렇게까지 먹어 치우진 않는 건데… 그랬더라면 자신의 빈 접시를 아쉽게 내려다보고 있는 민수에게 스캇의 기록 열람 요청을 부탁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래도… 찔러나 보자.
“저기… 그래서 민수, 내가 말이야 꼭 필요해서 스캇의 연구 기록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할은 바쁘게 움직이는 재시를 쫓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재시, 나 좀 봐줘, 도와 달라고.’ 아무래도 재시가 거들어주면 민수의 허락을 얻어내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재시는 갑자기 먹성이 좋아진 민수와 미하르를 위한 요리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재시가 할의 눈을 일부러 피하는 것은 아닐 거다. 민수가 일어나면 부탁해 보라고 귀띔해 준 게 재시였기 때문이다.
재시도 정확하게는 블라디미르 유로파 탐사팀에 프리랜서로 고용된 의료 팀원이라 죽은 본사 팀원의 기록 열람에 관한 권한은 없다. 대신 죽은 스캇이 남긴 기록의 열람권이 공식적으로 본사 탐사팀 대장인 민수에게 넘어갔다고 귀띔해준 게 재시다. 절대로 스캇의 기록이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대는 할이 귀찮아서 민수에게 떠넘기려고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민수, 정말 딱 몇 가지만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 물론 블라디미르 본사 지침은 잘 알고 있어. 모든 기록이 회사 소유로 넘어갔다는 말이잖아. 그래서 민수만 열람이 가능한 거고. 그러니까 민수가 열람해보겠다고 하고 나한테 조금만 보여주는 방식으로 풀어가면 되지 않을까? 참고만 할 거라서 민수가 보여줬다는 건 절대 비밀로 할 거라고. 전부 통으로 보겠다는 것도 아니야. 스캇의 사생활이란 것도 있으니까… 아! 민수 어떻게 안 될까?”
민수 옆에서 할이 끊임없이 떠들었다. 할은 재시의 귀띔을 듣고 처음엔 다행이다 싶었다. 민수는 친절하니까 바로 허락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수는 처음 봤을 때 본 친절한 미소만 그대로 유지한 체 끊임없이 거절했다. 할은 조금 섭섭해지려고까지 했다.
“아니, 정말 민수 좀… 내가 그렇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할… 조금만 기다려 봐, 일단 본사에 물어보고 알려준다는 거잖아. 무조건 안 된 다는 게 아니야. 물어보고 허락만 떨어지면 할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이렇게 서두르려고만 하는지 나는 그게 오히려 이해가 안 가는데? 할, 너도 조금 쉬면서 잠시만 기다려 봐.”
민수는 본사의 절차를 계속 핑계 삼았다. 할도 하는 수 없이 잠시 물러섰다.
“알았어…”
민수는 한결 편하게 먹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할은 얼마 못 가 금방 또 입을 뗐다.
“아! 그나저나 가장 최근에 스캇이 포획했다던, 내가 여기 동면캡슐에서 나오던 날 민수가 방생해줬다던 그 그루이트 말이야. 초록색 나노칩을 가지고 있는, 거기, 그것의 성기 안쪽에 나노칩이 반짝반짝, 초록빛이 반짝반짝.”
할이 그 초록빛 그루이트 이야기를 꺼내자 재시는 조용히 민수를 쳐다봤고 민수는 재시의 말없는 눈빛을 피해 포크질을 계속했다. 결국 그 눈빛에 치여 헛기침이 나와 재시에게 물을 찾았는데 재시가 듣지 못했다. 아니, 그냥 못 들은 척한 것 같았다. 할은 민수한테 말했는데 대답은 먹는데 집중하느라 한참 말이 없던 미하르가 했다.
“왜? 그 예쁜이가 왜?” 대답하는 미하르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그리고 반쯤 풀려 있었다. 아무래도 재시가 처방한 약물에 향정신성 성분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증상 호전을 위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처방이었을 것이다.
“예쁜이? 뭐 그래… 예쁜 건 맞으니까. 그 초록색 예쁜이 그루이트가 말이야, 임신 중이었더라고. 뱃속에 새끼가 들어 있더라고. 다들 알고 있었어?”
“응!”, “응?”, “아니.”
미하르는 당연히 알고 있어 보였고 민수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불편해 보였고 재시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재시는 정말 그루이트에게는 일도 관심이 없나 보다.
“아, 그래, 둘만. 둘은 역시 알고 있었구나. 스캇도 당연히 아는 거고. 그런데 왜 스캇의 공식 보고서에선 임신한 그루이트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을까? 노랑빛 그루이트가 낳은 새끼 크기와 초록빛 그루이트의 뱃속 새끼 크기를 비교해 추론, 계산해 보면 그루이트의 임신 기간은 대략 오차범위 내에서 402시간에서 419시간 사이? 최소 처음 스캇이 포획할 때 이미 임신 중이었단 소린데… 스캇이 그때 그루이트의 임신을 몰랐을까? 임신 초기에는 알아보기 어려운가? 그게 아니면 스캇이 일부러 관련된 기록을 숨겼다는 말이 되는데.” 할은 은근슬쩍 민수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민수, 내가 스캇의 기록을 조금이라도 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할, 그 이야기는 아까 끝난 걸로 아는데. 본사의 절차를 기다리기로 했잖아.”
민수에게 단칼에 거절당한 할이 우물쭈물할 때였다. 재시가 요리하던 걸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민수에게 물었다. 뭔가 꾹 눌렸다가 한 번에 튀어 오른 신경질이었다.
“민수,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스캇이 그루이트 임신에 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나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오호… 여성 휴먼으로서 쉽지 않은 체내 임신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했다고 한 재시다. 결코 쉽지 않은 경험이다. 그런데도 스캇이 재시에게 아무것도 안 물어봤다고? 역시… 스캇은 재시를 별로 안 좋아했나 보다.
“나? 그야 그게 여기서 꽤 오랜 시간을, 여기에, 그게 그러니까 오래 있었잖아.” 민수가 말을 버벅거렸다.
버벅거린 민수의 말은 사실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350시간을 꽉 채우고 방생한 그루이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것뿐이었다. 아마 나빠진 스캇의 컨디션으로 새로운 그루이트를 포획해 오지 못 한 탓에 이 그루이트만 오래 있었나 싶다.
“그리고 방생을, 방생을 내가 했잖아. 그걸 포획해왔던 장소로 돌아가 풀어주면서 일렉트릭 피시넷을 벗겨줄 때 본 거야.” 민수가 미하르를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재시, 내가 하기 싫다고 하니까 그날 민수가 대신해줬잖아.” 여전히 눈이 풀려 있는 미하르가 민수를 향해 헤벌쭉 웃었다. “민수 고마워.”
“재시 왜 그래? 왜 이렇게 예민해? 민수가 안다고 하는 것만으로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네. 방생할 때 봤으니 알 수밖에 없던 거잖아. 당연한 건데. 게다가 그건 발광 나노칩 때문에 뱃속이 훤히 보인다고. 그러니까 진정해.”
할이 예민해진 재시를 달래 주었다. 재시는 그런 할을 거들떠도 안 보고 원래의 동선으로 돌아가 푸짐한 고깃덩어리를 들고 왔다. 재시는 고깃덩어리를 미하르에게만 들이밀었다. 민수에게는 고깃덩어리를 주는 대신 뚫어지게 쏘아보기만 했다. “민수.” 나지막이 민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재시, 나는 진짜 밖에서 방생하면서 본 것뿐이야.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진짜 풀어만 줬어. 그때는 스캇이, 스캇이 없었잖아. 스캇이… 아… 스캇…”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