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4 보고서
민수가 화제를 바꾸어 어색하게 스캇의 애도를 하고 그를 추억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미하르도 스캇은 정말 좋은 녀석이었다며 그만한 친구는 구하기 힘들 거라고 이야기하고 큼지막한 고깃 조각을 씹었다. 민수가 그런 미하르를 위로하고 싶었는지 자신이 스캇 대신 좋은 친구가 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미하르는 스캇 같은 친구가 되어 준다면 대환영이라며 자신만 받은 고깃덩어리를 민수에게 조금 떼주었다. 재시는 입술을 움찔움찔하며 허공만 바라봤다.
“아, 맞다. 스캇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스캇의 사망 시각을 대충 계산해 봤거든.”
할은 다소 복잡한 ‘트램 단축 이동 계산법’을 이용해 스캇의 사망 시각을 유로파 시간으로 도출했었다.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여러 명이 동시 다발적으로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며 아파하는 건 할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재시는 눈치는 없는데 똑똑한 휴먼을 자신이 싫어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스캇의 사망 시각이 미하르가 아팠을 때랑 일치해.”
“뭐라고? 내가 아팠을 때? 내가 언제 아팠을 때? 끄어억!” 미하르가 트림을 했다. 지독한 냄새.
할은 손으로 코를 막고 대답을 이어갔다. “그게, 내가 젤 평야에서 그루이트들과 있을 때야. 정확하게는 어떤 때 냐면 말이야.”
할은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조사기록을 몇 가지 더 확인하더니 더 흥미로운 게 있다며 이야기 이어갔다.
“맞네, 맞네. 그때, 바로 그 시간에 노랑빛 발광 나노칩이 성기 깊숙이 심어진 그루이트는 새끼를 낳았어. 봐봐.” 할은 기록 몇 개를 자신의 개인 홀로그램 스크린에 띄워 모두에게 공유했다. “여기 새끼 머리가 나오는 거 보여? 그리고 여기 이 주변을 봐봐.” 할은 기록에서 주변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홀로그램 스크린의 방향을 회전시켰다. “새끼가 나오려고, 그러니까 출산이 시작될 때 노랑빛 그루이트가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마구 뒹구는 게 보이지? 저 몸 뒤틀리는 것 좀 봐봐. 경기를 일으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들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니까. 바로 이 시간에 미하르가 아파했고, 스캇은 우주에서 죽었지. 아마 스캇도 죽기 전엔 엄청 아파했을 거야.” 할이 잠시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 미하르를 제외한 민수와 스캇의 이야기에 재시의 얼굴빛이 어둡게 깔렸지만 계속 말을 이어가고 싶었다. 정말 신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흥미로웠어.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은 몇몇 지구의 휴먼 여성처럼 임신과 출산을 해. 하지만 거기에 따른 고통과 신체적 부담은 그것들이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대신 떠안지. 고통의 전가? 대리 고통. 이런 거라고 볼 수 있어. 그런데 어떤 알고리즘으로 거느리는 노예들만 일괄적으로 아픈 걸까?”
할이 아파하는 그루이트들을 유심히 보며 “아까 아팠던 민수의 증상과 이것들의 아파하는 증상이 참 비슷하지.”
재시가 참지 못 하고 할의 말을 끊었다.
“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음… 그렇지만 재시, 그렇다고 보이는 걸 외면해도 안되지.”
할은 단호했다.
기록을 보던 민수가 반문했다.
“하지만 할, 지금 노랑빛 그루이트가 새끼를 낳을 때 도망가는 저 그루이트는 보랏빛 그루이트가 거느린 노예 아니야? 이러면 대장 그루이트가 출산을 할 때 그 노예들이 대신 아프다는 결과는 근거가 부족하다 싶은데.”
지적한 민수의 얼굴은 불안했고 지적당한 할의 눈빛은 빛났다.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서 보자. 내가 보충 설명을 해 줄게.”
할은 젤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혹은 자신을 포획한) 저 초록빛 그루이트가 보랏빛 그루이트가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를 갖고 싶어 하는 걸 봤다. 초록빛 그루이트는 보랏빛 그루이트가 내놓은 (상품을 진열해 놓은)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과 두루두루 성교를 해 본 후, (마치 원하는 상품을 고르려고 테스트해본 후) 그것들 중 세 마리를 골라냈고 그중 두 마리의 성기를 쥐고 놓지 못했다(두 마리 모두 갖고 싶다). 뭔가 고집을 피우는 듯(거래가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 듯) 초록빛 그루이트는 성기를 잡은 손을 여러 번 세게 쥐었다 풀었다 했다. 그때마다 성기를 잡힌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댔고. 그러던 중 할이 보랏빛 그루이트 앞으로 던져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순간, 나도 상품의 일부 취급을 받았던 게 아닐까 싶어. 내 가랑이 사이를 툭툭 뒤져가며 나한테서 돌출 성기를 찾는 것 같았거든. 나의 키가 남성형성기 그루이트와 더 비슷해서 그랬을까... 내 키가 그루이트들한테는 애매하지.”
할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이후의 일은 노랑빛 그루이트가 출산을 했고 (같은 시각 미하르가 아프고 스캇은 죽었고) 다시 초록빛 그루이트와 보랏빛 그루이트가 돌고래 소리를 몇 번 주고받더니 결국 한 마리씩 교환했다. 그 자리에서 보랏빛 그루이트는 초록빛 그루이트에게 넘겨받은 것과 성교를 진행했고 초록빛 그루이트도 최종 결정된 것과 성교를 진행했다. 그것은 여성형성기 대장 그루이트가 지금부터 이것은 나의 노예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테스트로 하던 성교와는 달리 대장그루이트 몸속 젤이 들락날락거리는 남성형성기에 마구 휘감겼다.
이후, 할은 남성형성기 그루이트 노예들이 젤에 잠기지 않도록 떠받들어줘 편하게 기지로 돌아왔다.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돌고래 소리로 그것들에게 몇 마디 소리를 내니 할을 그렇게 운반해 줬다. 이 부분을, 할이 어떻게 기지로 무사히 돌아왔는지… 바로 이 부분을 민수, 재시, 미하르는 가장 건성으로 들었다.
“보랏빛이 거느린 노예 그루이트는 원래 노랑빛이 소유하던걸 이전에 거래로 넘겨받은 거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말이 돼! 많이 거래될수록 그만큼 자주 아프게 된다는 가혹한 결말이지만 말이야. 자, 이제 알겠지? 어때?”
할의 설명이 끝났다. 이제 마지막 한 문장만 남았다.
“유로파 그루이트에게는 거래의 문화가 있어.”
할의 눈빛이 확신으로 꽉 찼다. 재시는 이 눈빛이 못마땅했다.
“하하, 고작 자기들끼리 바꿔가며 성교를 하는 게 거래의 문화라니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안 그래, 민수? 아니야, 미하르? 다들 뭐라고 말 좀 해 봐! 거래의 문화라니! 할,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민수는 고장 난 구형 로봇의 얼굴이 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고 미하르는 무슨 생각인지 약에 취한 것처럼 웃기만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할은 계속 생각했다. 그루이트들은 할이 처음 본 휴먼 여성이었을 것이다. 기지 내에서 재시는 그루이트 근처에도 안 갔고 그 오랜 시간, 기지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할의 가랑이 사이에 돌출 성기를 찾아볼 생각을 했던 걸까? 그것들은 어떻게 휴먼 남성이 가진 돌출 성기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걸까?
테이블에서 유로파의 홀로그램 지도가 나타났다. 풍만하고 아름다운 핑크색 구체에 다채로운 색들의 점이 하나씩 하나씩 반짝반짝 나타났다. 그런데 그 위치가 놀라웠다. 바로 탐사기지 앞이다.
민수가 다른 홀로그램 스크린에 외부 상황을 띄웠다. 성기에서 각각의 아름다운 색의 빛을 뿜어내는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이 젤에 정강이까지만 담근 채 곧게 서 있었다. 저 위치는 저만큼 얕은 곳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자기들이 거느린 남성형성기 그루이트들 중 몇 마리를 젤 속에 담가 놓고 그것들을 밟고 그 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다른 몇 마리들은 그보다 얕은 젤 위에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아까 할 혼자 보았을 때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돌아와서 다시 찾아본 스캇의 ‘그루이트 보고서’, 생활 섹션을 다시 보고 이렇게 마주하니 거기 묘사된 그대로다. 대장(주인), 노예들(소유물), 무리 생활, 철저한 상명하복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할이 처음 보았을 때도 느낀 거지만 저 여성형성기 대장 그루이트들은 진짜 근사하고 아름답다. 거기다 성기의 위치에서 빛까지 뿜어내게 하다니. 하, 분하지만 스캇은 정말 천재다.
“저 초록빛 성기 그루이트. 그 사이 새끼를 낳았네. 동그란 배가 쏙 들어갔어.”
할이 지난 첫 탐사 때, 성기 안 화려한 초록빛 조명 속, 뱃속에 있던 새끼 그루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노랑빛 그루이트가 낳은 새끼 그루이트의 크기와 비교 짐작하건대 초록빛 그루이트도 곧 새끼를 낳을 것 같긴 했다. 빠르게 시간을 추정해 보니 대략 몇 시간 전, 민수와 미하르가 몸이 뒤틀어지며 아파했을 때와 일치한다.
“저 예쁜이들이 나를 찾아온 거야. 다 내가 좋아하는 애들이야.”
약물 때문인지 미하르가 콧구멍을 잔뜩 확장시킨 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홀로그램 스크린으로 뛰어들 기세다.
보랏빛 그루이트가 젤 속에서 한 남성형성기 그루이트의 카틀레야의 수술 같은 그것의 성기를 손에 쥐어 젤 밖으로 꺼내 올렸다. 보랏빛 그루이트가 거느리고 다니는 것들 중 제법 체격이 있어 보였다. 손에 쥐어진 성기도 엄청 통통했다. 그렇게 손에 쥔 채로 기지를 향해 알 수 없는 돌고래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일제히 다른 그루이트들도 젤 속에서 한 마리씩 꺼내어 똑같이 행동했다. 재시는 불쾌함을 숨기고 민수는 작은 반가움을 숨기고 미하르만 숨김없이 기쁨을 표현하고 흥분했다.
할이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야! 저게 내가 말 한 거래의 문화야! 저것들 우리에게 거래를 하자고 온 거라고. 자기 소유물, 자기가 가진 것과 우리의 어떤 것과 거래하기를 원하고 있어.”
이상하다. 다들 대답이 없다. 너무 놀라운 발견이라 할 말을 잃었나 보다.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 이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의 -지적 생명체 기준에 관한 조항-에 의거, 거래의 개념을 가진 저것들은 지적 생명체로 볼 수 있다고. 2형문명으로 도약한 우리 휴먼이 드디어 다른 은하계의 지적 생명체를 발견한 거야! 물론 생물학적인 진화, 에너지 활용법, 그리고 기본적인 소통 방법 등 여러 가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나, 아니 우리가 진짜 엄청난 발견을 한 거라고! 드디어 외계 문명과의 문화교류 시작이라고!”
이쯤이면 다들 크게 감탄하며 할의 대단한 발견을 높이 추켜 세워줘야 마땅한데 다들 말이 없었다.
“자, 어때?”
할이 리액션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스타일로 침묵을 이어갔다. 고요한 룸 안, 스피커로 그루이트들이 기지를 향해 외치는 돌고래 소리만 메아리쳤다.
이윽고 메아리에 미하르가 끼어들었다. 미하르가 꼬인 혀로 입을 열었다.
“할, 이건 기회야!”
“그래, 미하르 맞아. 이건 기회야!”
“아니 내 말은 그 ‘기회’가 아니고 그 ‘기회’라고! 할, 당장 나가서 한 마리 잡아와!”
“뭐?”
“저 초록색 이후로 잡아온 게 없었잖아. 지금 저렇게 코 앞에 있을 때 잡아오라고. 꼭 여성형성기 여야만 해! 나는… 나는 저 보랏빛이 좋아. 제일 좋았어. 보라색 저걸로 잡아와!”
“그건 안되지, 미하르. 저 여성형성기 그루이트들은 이미 포획됐던 애들이야. 성기에서 나오는 빛이 이미 그 증거잖아. 잡아오려면 저 남성형성기 것들 중 하나를 포획해야지. <2형문명 우주환경 보호법>에 생명 윤리에 관한 조항에 의하면…”
“크크, 지겨워. 그놈의 어쩌고 저쩌고 보호법… 할, 잡아오라면 잡아와!”
미하르가 비웃으며 할의 말을 잘랐다. 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싫어? 그럼, 민수가 나가줘. 나의 좋은 친구가 돼 준다고 했잖아.”
“미하르, 일단 진정 먼저 하자. 필요 이상으로 흥분상태야, 지금.”
“왜? 민수! 부탁이야! 나가!”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