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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05. 2021

변해버린 나, 멈춰버린 나

 누가 나를?

알람 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얼마나 울렸었지는 모르지만, 분명 난 의욕 없는 손가락으로 알람 소리마저 의욕 없이 잠재웠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더 침대에서 버텨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열 살 된 딸아이가 내게 다가와 인기척을 낼 때까지 나는 의도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깊은 산기슭에서 배고픔에 헐떡이는 사자에 쫓겨 숨을 고르고 있는 새끼 고라니처럼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가여움을 온몸으로 뿜어대고 버텼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멍청하고 흐릿했던 내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힘없는 빛줄기가 내 눈을 괴롭히는 순간이 온다. 그 빛은 곧이어 열 살 내 아이의 아담한 형상을 숭고하게 비춰준다. 그리고 그 작고 아담한 내 아이는 말한다.

 "엄마 언제 일어날 거야?" 


때마침 남편이 땀이 흥건하게 젖은 윗옷을 벗으며 샤워를 하러 간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아파트 단지를 열심히 뛰었나 보다. 사실 부지런한 남편의 모습에 부러움도, 존경심도 들지 않는다. 그냥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아 온몸으로 느끼는 그의 인기척에도 나는 모르겠다는 듯이 부동의 자세를 보인다. 






다시 아이는 말한다. " 엄마 일어나" 


마지못해 일어나 여전히 숨죽이는 새끼 고라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 결혼 십 년 차의 두 아이 엄마라는 제법 직책 높은(?) 여성이다.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힘들게 살아본 적도 없으며, 누구보다도 더 편하게 살아본 적은 없는 그저 아주 평범한 40대의 여자인데, 이것이 때로는 나를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tv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여배우들의 미모를 나는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그들의 통통 튀는 성격, 그들의 우아한 성격, 아니면 그들의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서, 나는 이렇게...... 이렇게만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게도 분명 볼 빨간 소녀처럼 이유 없이 웃어대고 머릿결이 헝클어지는 것 마저 늦봄 벚꽃 떨어지듯 하늘거렸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나는 그것이 행복인 줄 모르고, 삶의 목적지가 코앞에 다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마냥 최선을 다해 달리며 살았다. 그때 만약 말이다. 인생의 결승선이 생각보다 아주 멀리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온몸 다 바쳐 달리지 않았을 텐데, 나는 대부분의 내 또래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몰랐다. 곧 결승선에 도달할 줄 알았다. 그 결승선만 넘으면 나는 행복만 만끽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계속 뛰었다. 운 좋게도 지금의 내 남편은 다정한 말을 건넬 수 있는 따뜻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뜀박질 시간 속에서도 위로의 시간을 가지면서 나이를 먹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 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내 인생의 목적지는 달려보아도, 날아보아도, 때로는 거대한 침묵 속에 모른척하며 새침을 떨어보아도, 여전히 코앞에 있는 "기분"만 드는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사정거리 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과녁을 향해 나는 열심히 활을 쏘아대고 있었다. 


난 과연 스무 살 이후 지금까지 무엇을 향해 뛰고, 날고, 멈추어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영어강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열심히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치열하게 용돈벌이를 하며 나름의 독립된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20대 초반부터 열심히 달려왔고, 그러한 내 모습이 너무 절박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외형적으로도 멋져 보이려고 노력했다. 틈틈이 좋은 옷, 좋은 구두, 좋은 가방처럼 보이는 것들을 사며 나를 화려하게 만들려고 노력해 보기도 했고, 그렇게 빛나 보일 것 같은 내 모습은 분명 열심히 살아가는 내 모습을 더 근사하게 보이는데 중요한 장치가 될 것이라 믿었다. 어쩌면 나는 "즐길 줄 아는 여자"로 살아 보고 싶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주변인의 눈에 너무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보이면 그것 역시 자존심이 상했다. 뭔가 대충 살아가는 내 모습에서 멋진 성과를 보여주는 그림을 20대 내내 그렸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몸 구석구석 모든 세포가 경기를 일으킬 만큼 아주 유치하고 유아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이것만큼은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를 비웃는 그대들보다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덜 자고, 덜 놀고, 덜 쉬고, 더 열심히 살아왔다"라고 말이다. 


그렇게 고상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나는 지금 열 살 아이의 가여운 부름에 어쩔 수없이 눈을 뜨고, 세상모르게 늦잠을 자려고 하는 여덟 살 막내를 열심히 깨워대는 일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8시가 되면 두 아이 모두 온라인 학교 수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내 하루는 눈을 뜸과 동시에 집 안 구석구석을 내달리며 시작한다. 오늘도 아이들 수업 전에 진공청소기로 먼지떨이 청소를 끝마쳤기 때문에 아주 성공적인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변해간다. 시끄러운 청소를 아이들 수업 전에 미리 끝마친 아침은, 꽤 능력 있는 엄마의 자격을 갖춘 것 같아 콧노래도 흥얼거린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늘 존재한다. 하루가 다르게 몸은 무거워지고, 느려지며, 나태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고 청소기를 돌렸지만, 결국 아이들 온라인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방하나 겨우 청소한 날이 있다. 그날 나는 아주 느려 터진 그런 엄마이다. 


이러한 엄마도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은,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를 둔 엄마들은 대부분 꿈도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아주 기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서로 다른 부모 아래, 서로 다른 배움을 받아왔으며, 그중에서 누구는 더 열심히 해서, 흔히 말하는 성공의 맛을 맛본 사람도 있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열심히 해보았지만,  운이 좋지 않았음에 씁쓸한 맛만 보기도 했을 테다. 물론, 열심히 살아야만 인생인가, 내가 좋아하는 지금의 순간을 즐기며 살겠다고 이야기하는 자유를 찾는 비둘기들도 있을 테지. 


그러나, 참 신기한 것은 우리 모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동일한 인간 유형이 된다. 단 "하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목적이 내 삶의 존재의 이유인 마냥 살아간다.



"열 살의 딸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 

성격도 기똥차게 좋아서 많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인물이 나쁘지는 않으면 좋겠지. 

참 그러기 전에 건강해야지. 암~ 건강이 최고이지.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남편에게 미안함이 드는구나. 우리 남편, 아프지 말고 회사생활 잘해서 지금처럼 인정받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누가 내게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으며, 내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라고 책에서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러나 40대의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동일시되어 획일화된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엄마"라는 사회적 스펙을 달면서부터이다. 신은 내게 이러한 명분으로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나. 이러한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 부모의 사랑을 받게 하였고, 교육을 받게 하였고, 벗을 만나고, 사랑을 만나게 했었나. 그 속에서 내가 흘렸던 눈물의 시간, 고뇌의 시간, 성취의 시간, 후회의 시간, 자신만만해했던 그 시간들이 과연 지금의 막중한 임무를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누구의 부름을 받아 이렇게 멈추어 서있는 것인지 오늘도 물어본다. 인간 존재의 부여를 받음과 동시에 내게 내려진 책무였는지, 아니면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발적 역할인지 연거푸 물어본다. 


"누가 나를......?"






그렇게 고민만 하다, 허무하게 저녁 5시 12분이 되었고, 이것은 곧 내가 부엌으로 가서 충성을 다해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미룰 수 없는 내 임무이며, 내가 얼마나 잘났든, 못났든 상관없이 이루어 내야 하는 과제 중 하나이다. 오늘도 나는 전투적으로 고민을 해야 한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방금 전까지 우아한 철학자이고 싶었으나, 다시 "Mommy"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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