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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10. 2021

맹자의 엄마

엄마  하기 참 힘들다.

요즘 애들은 어찌나 다들 야무지고 말도 잘하고 똑똑한지 집에서 하루 종일 춤추고 노는 내 아이 둘을 보면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 쉬는 걸 보면, 나도 지극히 평범한 엄마인가 보다. 이 불안감은 분명 엄마라면 누구나 제 새끼에게 가지최소 필요조건이며,  덕분에 그 아이들은 매일매일 그렇게 똑똑 해지는 건가 싶다. 또한 아이들이 일취월장하게 하는 데에는 분명, 부모의 맹모 삼천지교, 단기지교, 삼종지도 등과 흡사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일 테고, 더 나아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여 아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늦깎이 사회인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 큰아이가 6살이 될 때쯤 나는 우리나라 사교육이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단언하게 되었는데, 이는 해외에서 지내본 대부분의 엄마들은 더욱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어느 나라가 이렇게 골목마다 학원을 즐비하게 갖추고 있으며, 엄마를 위해 학원 셔틀차는 학교까지 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다음 학원까지 토스해 주기까지 한다. 그게 전부가 아니지, 내 아이가 머리가 굵어지고 엄마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나이가 되면, 내 아이 자습까지 알아서 시켜준다고 하고 주말에도 학원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 가끔 아이가 수업을 마쳐도 엄마가 올 때까지 내 아이 보육까지 책임져주기도 한다고 하니, 어쩌면 이러한 사교육이 있어 부모로서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맹자의 엄마가 존재하고, 그 맹자 엄마들은 제 아이의 부모로서, 또는 학원이라는 사교육의 이름으로서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이가 세 살이 되면, 근처 문화센터라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내 아이의 오감을 자극시켜주고, 신체발달과 정서적 안정을 시켜준다는 다양한 수업들이 어미인 나보다 더 어미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역시 배운 사람들은 다르구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내 아이 낮잠시간까지 바꿔가면서 사교육의 출발지인 문화센터를 다녔다. 그때마다 기저귀 가방에는 온갖 전투식량과 위급 시 사용할 멜로디 나오는 책 한 권을 꼭 쑤셔 넣고, 잠투정을 대비해 공갈젖꼭지까지 가지고 다녔던 무시무시했던 시절이 소름 끼칠 만큼 자세히 생각난다.


유치원에 가서도 일하는 나를 위해 유치원은 오후 늦게까지 어미 노릇을 해주었고,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발레학원에서 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열심히 운동시켜주었고, 퇴근 후 내가 쏜살같이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까지, 아이들은 발레학원 빈 공간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색칠놀이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아이의 앞으로의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장차 필요한 교육비 벌이를 위해 나와 남편은 열심히 일을 했었고, 우리는 이왕 나가서 돈 버는 거라면, 맹자의 어미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해 보자고 결의를 다졌었다.


그러나, 현재 나는 교사라는 직장을 그만두고 두 아이와 함께 집에서 때늦은 가정보육을 하고 있으며, 맹자의 어미가 되는 데에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맹자 엄마가 되기에 일단, 나는 너무 나약해서 어미로서도, 사회인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여 양다리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실력 없는 바람둥이 같은 모양새였다. 냉철한 판단력으로 흔들림 없이 아이를 휘어잡을 카리스마는 턱없이 부족했고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생명 존재의 이유만큼이나 원대한 본질적인 문제로 고민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맹자의 어미가 아들을 세기의 훌륭한 성인으로 키운 것은 사실이나, 나는 내 아이들을 맹자와 같은 세계적인 인재로 키울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나도 아이도 서로를 맹자와 맹모의 관계로 한정 지어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결론이 내려진 데에는 뿌연 새벽처럼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내 어미가 있었기 때문일 테고, 그분은 아직도 내게 겨울 새벽 공기만큼이나 차갑고도 머리가 쨍할 만큼 신선한 공기가 되어 주신다.




내 부모는 한 번도 내게 공부에 있어 어른의 힘을 보여준 적이 없으셨고, 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은 "우리 강아지 예쁘다. 우리 강아지는 참 잘해 " 였었다. 어린 시절 너무나도 지겹게 내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있는데, " 지연아, 너희 학교에서 네가 제일 예쁘제? 네 친구들 중에서도 네가 제일 예쁘제? " 였었다.  이 마약 같은 중독성 있는 농담을 나이 서른을 맞이했을 때까지 들었는데, 시간으로 계산하면, 30년 가까이를 들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말 내가 그분들 말씀처럼 인물이 출중하고 , 내 일은 알아서 척척 잘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으셨을 테고, 그렇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게 늘 이야기해주셨을 가능성이 크다. 마음 아프게도 나는 내 부모의 격려와 칭찬만큼이나 뛰어난 외모와 학업 수준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내 부모의 어떤 의도가 숨어있든 간에, 나는 누구나 겪는 불장난 같은 사춘기를 겪으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나 스스로 그분들의 말씀을 믿어가고 있었다.

"나는 예쁘다. 나는 참 잘한다"


더욱 훌륭하셨던 것은, 내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우수한 학군으로 이사를 가거나  수준에 맞지도 않은 고액과외로 어린 소녀의 어깨에 바위 덩어리를 얹여 놓는 열정을 분별력 있게 판단하실 수 있는 곧은 분이셨고, 그래서 이를 자제하셨다. 대신, 내가 본 어머니의 열정은 세상에서 제일 조용한 열정이었고, 겉으로는 아무 힘도 없을 것 같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과도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궁이에 부채질로 불을 땔 때, 고작 그 부채질로 불이 붙을까 싶다가도, 어느 순간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면 더 이상 부채질도 필요 없을 때가 온다. 나는 그분들이 해주는 조용한 부채질을 받으며 타오르기를 기다렸고, 그분들의 말씀대로 "예쁘다. 잘한다"가 이미 내 몸과 하나가 되어 버린 상태로 봄꽃같이 청초한 청소년기를 거쳤다.


그렇다면, 내 어머니는 자녀 학업에 대한 열정이 진정 없었을까. 왜  맹자의 어미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개입하지 않으셨던 걸까. 오래된 책장에 먼지 쌓인 체 내버려 둔 책들을 하나씩 정리하듯,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야 나는 내 어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부모, 그중에서도 내 어머니는 누구보다 내 학업과 성공에 열정적이셨고,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며 바라셨을 테지만, 맹자의 어머니는 아니셨다. 밖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으로 자식의 마음을 돌처럼 무겁게 하기보다, 많은 인내와 신앙심으로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셨던 분이시다. 반지르르 윤기 흐르는 다양한 기술의 말, 행동 그리고 경제력을 보여주시기보다, 최소한의 말 한마디로 나를 지지하셨던 분이시다. 이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한 교육자란 말인가.


이쯤 되면 맹자의 어미, 맹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자가 묘지 근처에 살 때, 맹자는 춤추고 뛰며 노는 일에 푹 빠졌었다고 하여, 맹모가 이를 걱정해 "여기는 네가 살 곳이 아니다"라고 하였단다. 그 후, 그들은 시장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맹자는 장사꾼들이 돈을 거래하며 물건 파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시 맹모는 걱정을 한다. 결국 "여기도 네가 살 곳이 아니구나"라고 하며, 이사를 감행하였고, 정착한 곳이 학교 근처였다고 한다. "그래, 여기가 네가 살만한 곳이구나. " 라며 자식에 대한 교육 열정을 후세에게까지 좋은 본보기로 보여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모삼천지교에 대한 맹모의 전설적인 교육 열정 에피소드이다.


일단, 이러한 맹모삼천지교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는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를 먼저 따져보아야 할 텐데, 학업이 유일한 성공의 지름길일 수밖에 없던 당대와 현세대는 명백히 차이가 난다. 춤추고 노래하는 환경이 두려워, 장사꾼의 돈 계산에 익숙해질까 두려워, 오로지 학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학교 근처가 최적의 교육환경이라고 하는 맹모의 안목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풍류를 즐길 줄 알고, 돈 세는데 익숙해져, 경제관념에 누구보다 빠른 혜안을 가질 수 있던 맹자를 어미가 생각하던 성공의 방식에 그를 대입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것이 자식을 위한 결정이기는 하나, 과연 다 큰 맹자의 마음도 그와 같았나 라는 의문이 들더라.


맹모의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어느 날 어린 맹자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여 집으로 기쁜 마음으로 왔는데, 맹모가 집에서 길쌈(*길쌈이란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베·모시·명주·무명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배움을 하고 왔는가?"라는 맹모의 질문에 아들은 "예전과 같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는데, 이 말을 들은 맹모는 그 자리에서 칼로 천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무서움에 떠는 아들을 향해 맹모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고 한다. " 네가 학문을 멈추는 것은 내가 칼로 이 천을 자르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군자는 배워서 이름을 세우고 질문을 통해 본인의 지식을 넓히는 것인데, 지금처럼 공부를 멈추는 것은 아주 천한 일이며, 남의 부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고, 재앙과 근심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여자가 먹고사는 방법 (길쌈)을 끊고 남자가 덕을 쌓는 일을 그만둔다면, 도둑이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 이후 맹자는 정신을 차리고 학업에 더 열심히 매진했다고 한다.


어떠한가. 일단 내가 보았을 때에는 맹자보다, 그의 어미 맹모가 더 학업에 욕심이 많지 않았나 싶을 만큼 논리적이며 냉철한 판단력과 깔끔한 언변을 구사하셨던 것 같다. 이렇게 똑똑한 어미 아래 맹자의 학업에 대한 압박은 과연 얼마나 소름 끼칠 만큼 컸을까 싶다. 게다가 그녀의 카리스마가 다행히 그에게 득이 되었던 것 같아, 우리는 이런 훌륭한 분을 현세대에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만약 내가 이런 카리스마를 내 아이들에게 부렸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사실 상상도 하기 싫다. 지금의 아이들은 맹자만큼 순종적이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은 서슴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왔는데, 어느 날 내가 맹모가 되어 여장부처럼 군다면, 이것은 아이러니(irony)이다.


마지막으로 맹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 이야기이다. 당시, 제나라는 맹자를 귀한 대접은 해주되, 실제로 그의 생각을 나라 정책에 써주지 않으니, 맹자는 제나라를 떠나길 원했으나, 봉양하고 있는 늙은 어미에 대한 걱정으로 쉽게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맹모는 " 부녀자의 예법은 곡식을 찧어 오곡을 만들며, 술과 장을 만들고, 시부모님을 모시며, 바느질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은 주역에서도 일치하는데, "부녀자는 자기 마음대로 뜻을 만들지 않는데, 어릴 때에는 부모의 말을 따르고, 출가를 하면 남편의 말을, 그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의 말을 따르는 것인데, 너는 너의 예법대로 행동하라. 나는 나의 예법에 따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내 아이들을 위해 이것을 지혜라고 이름 붙여,  여자로서의 인생을 버리고 자식만을 따라가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나는 좋은 엄마이고 싶고, 아이가 잘 되길 바라는 엄마인 것은 분명 하나, 그들에게 엄마의 희생을 두 눈으로 목격해서, 그들의 성공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생색내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이 의무는 생명이 다하는 한, 지켜내야 할 존재의 이유이다. 내 딸들에게 내가 어미인 듯, 내게도 내 어미가 있으며, 그녀는 내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으실 테고, 두 딸을 키우는 한 엄마가 올바른 여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 인생에 더 나은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분명 내 주변에는 수많은 맹모가 있을 테고, 그 많은 맹모들은 지금도 인생의 유일한 쾌락을 자신들이 보여주는 희생과 헌신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녀들은 자신들의 불타는 희생이 가져올 "내 아이 성공"이라는 결과에 대한 기대치로 근근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순수한 맹모들은 결과는 어떻게 나오든 간에, 아이를 후회 없이 지원해 준 것에 성취감을 느끼고, 스스로 잘 해내고 있음을 격려하기도 한다.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 우리도 누군가의 새끼이며, 우리 존재의 이유를 이런 데서 찾아야 하다니. 내가 맹모여야만  내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까. 내가 맹모여야만 내 아이는 공부 잘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탄탄한 자기 자리 하나 정도 가지게 되는 것일까. 내가 내 아이에게 잡초 하나 없는 꽃길만을 보여준다고, 과연 내 아이가 휘몰아치는 인생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도 살아날 수 있을까. 맹모가 아닌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이에 대한 열정이 부족해서, 혹은 세상을 너무 몰라서 조용히 있는 것일까.


집안의 모든 분위기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내 어미의 모든 청춘과 열정이 자신에게만 쏟아져있다는 것을 알 때, 그 어미의 아이는 과연 행복과 기대감으로 본인의 학업과 기술에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것일지 나는 감히 의문이 생기더라. 내 아이는 어린 유년기를 거쳐  불꽃놀이 같은 십 대를 겪을 테고, 나아가 고민과 결정의 연속인 20대를 겪게 되겠지. 어쩌면 내 아이가 장미꽃 같은 처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독립을 위해 늦게까지 준비의 시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때 내가 맹모가 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역할인가. 한 번 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때는 혹여나 부러질까 무서워 안기조차 두려워 두 손으로 조심히 받아 안던 아기들이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건강한 독립이며, 그러한 독립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미와 자식은 서로에게 일관된 방식으로 대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고정된 사고방식, 습관적인 행동에 서로가 흠뻑 스며들었을 테고, 어느덧 성인이 되었다고, 서로의 방식에 맹모처럼 칼로 천을 잘라내듯 끊어내기는 어려울 테다. 내 아이가 스스로 독립된 인격체라는 멋진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미는 열정을 가지되 조용히 지켜만 보아도 충분하며, 이왕이면 그 열정을 조금은 식혀도 좋지 않을까 싶다.


내 아이가 원하지 않은 맹모는 아무 쓸모가 없으며 내 아이의 인격체로서의 독립을 무시할  맹모는 더욱이 쓸모가 없다.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은 아이의 작고 큰 성공에서 어미가 늘 격려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신뢰일 것이며, 아이가 진정 어미의 열정이 필요로 할 때, 그때 손을 내밀어도 늦지 않다고 본다. 내 아이는 분명 내가 맹모로 살기보다는 맹모 아닌 "엄마" , 더 나아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며, 그렇게 살아가는 어미를 보는 내 아이는 비로소 더 큰 힘을 얻고 더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옛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지 않았나. 좋은 유치원, 좋은 학교, 좋은 학원, 좋은 과외교사를 고르는데 지나친 에너지를 붓기보다는, 아이가 바라는 좋은 사람이 되어 그들의 좋은 해바라기 꽃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내가 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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