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뜨거운 한여름이다. 일 년 내내 한여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계절이 바뀔때마다 달라지는 냄새에 나는 온몸으로 아드레날린을 느꼈었고, 그런 시간 속에서 새로운 인격체가 되어 가는 준비를 한 기억이 있다. 특히 겨울에서 여름이 되어갈 때 느끼는 따스한 공기 냄새, 가을에서 겨울에 넘어갈 때 맡을 수 있는 코가 뚫릴 듯한 그 서늘한 공기 냄새가 그러하다. 그 계절 속에서 겨울의 나와 여름의 나는 특히 매우 달랐다.
겨울의 나는 겨울잠에 취해있는 곰이기도 하고, 인적없는 대나무 숲에서 휭 휭 바람 소리만이 친구일 것 같이 외롭게 지내는 산장노인과 같이 지냈었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내 몸이 특별히 아프다거나,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고독을 하루종일 씹으며 사는 숭고한 시인도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런 사람으로 지내고 싶었던것 같았고, 겨울만큼은 그렇게 조용함, 지루함, 적당한 무기력감을 즐기며 조용히 지내 주어야 하는것이 예의인것 같았다. 찬바람과 눈보라가 그렇게 하라고 내게 전해주는것 같다고 하면 이유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여름이 되면,
내 나이 40살이 되어, 가족 모두 베트남 호찌민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정말 많은 고뇌와 두려움, 설렘으로 밤잠 못 자는 시간으로 몇 달을 보내게 되었다. 단순히 이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결혼 한번 더 하는 기분이 들만큼 초조했었는데, 코로나가 온 세계를 뒤흔든 이 시기에 난 두 아이 손을 덥석 잡고 큰 짐가방 4개를 끌고 베트남 시설 격리를 감행하며 남편을 만나러 왔다.
남편이 먼저 출국을 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때만큼은 진정한 어른이어야 했다.
어른들은 이런 낯선 상황에서도 두려운 표정을 잘 감추고, 익숙한 듯이 일을 잘 처리하지 않은가.
나 혼자 이삿짐을 보내고, 먼지 가득한 빈집에서 버리고 떠날 잡동사니 그릇, 옷, 이불만 웅켜진채 아이들과 지내면서도 나는 어른이 되려고 애를 썼다. 혼자 중고차 시장에 자동차를 팔고, 내 안식처를 부동산에 해결하면서 나는 멋진 아빠가 되는 듯한 고리타분한 격려까지 해댔다.
독립, 미션 완성, 인내. 감정 통제.
이것들이 당시 어른으로서 내가 염두해야 할 항목들이었으며, 그렇게 나는 내게 너무 높은 벽과 같은 "어른 도전기"를 겪었다.
그렇게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 41살이 되었고, 호찌민 도심지에 내 터를 잡고 산지도 일 년이 되었다. 여전히 오늘의 공기 냄새는 매우 덥고, 햇빛이 따가워 콧등에는 항상 땀이 차있다.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출근 전 식사를 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노상에서 사람들이 목욕탕 의자와 흡사한 의자에 움츠려 앉아 쌀국수를 먹고 있는데, 그들도 나처럼 땀을 흘린다.
그런데 나처럼 화나 있지는 않다.
더워서 흘러내리는 땀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너 자신을 괴롭히기까지 하냐는 듯 무심하게 땀을 흘려버린다.
문득 15살 때 한여름의 어린 내가 기억 속에 소환되었다. 그 아이는 자기 덩치만 한 가방을 들고, 신발주머니를 한 손에 돌리며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얼굴은 조금 있으면 곧 터질 듯할 만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흰 피부가 좋을 때도 있지만, 유난히 여름에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불편한 기분에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해댔던 그런 여자아이였다.
그날도 볼이 얼마나 벌겋게 달아올랐는지, 길에 지나가던 낯선 아주머니 한분이 "아이고, 너 엄청 덥구나. 얼른 집에 가라. 얼른" 하며 내 발길을 더 재촉하셨었다. 그러나 그때도 내 발길은 여전히 가벼웠으며, 새빨갛게 익은 장미꽃처럼 나풀대며 뛰어다녔다. 그 어린 나는 내가 느끼는 더위로 인한 불편함은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란 것을 그때는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집에 가서 간식을 먹으며 숙제를 하고, 친구와 놀 생각에 나는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고, 화낼 이유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벼운 일에도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온몸으로 자극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 자극을 눈으로, 입을 통해 내 방식대로 다시 내뱉어 내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사춘기 여중생이 따로 없다.
또 시간이 지났다. 아침 9시 29분. 몇 번 호흡을 더 고르고 나면 또 다른 1분이 지나겠지...
아직 난 많은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1분의 시간, 1시간의 시간이 나를 채찍질할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 열심히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문득 나이 40을 맞이한 이후 나의 변화이다.
나 지금 이렇게 멍하게 앉아있어도 되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믿고 하루하루 살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즐겁게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는 않았다.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되물음은 보통 나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나 지금 내 생활 열심히 살고 있거든! 나 지금 즐겁거든! " 이 정도는 돼야 누군가 내 나이를 트집 잡아도, 할 수 있는 소리 아니겠나 싶었다.
이렇게 나는 나이 40이란 간판을 들고, 호찌민에 온 이후 생각이 깊어졌다.
수많은 생각 중 날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한 생각꾸러미가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날 이 세상에 놓고, 내 이름 " 이 지 연"이란 예쁜 이름을 짓고 얼마나 행복해했을까.
난 과연 그 이름의 값어치를 하고 사는 건가
내 이름... 참 좋은 뜻을 지닌 이름.
갑자기 한국에 있는 나이 든 내 엄마 아빠에게 너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드는 우리 아이들에게 민망함의 웃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얘들아 엄마도 사실은 이런 딸이란다.. 이런 사람이란다..."
난 한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중,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었다. 물론 그 전에는 누구나 들으면 알법한 큰 어학원에서 토익 강사로 일했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많은 게 달라졌다. 난 그렇게 똑 부러진 엄마가 될 수 없는 기질을 가지고 있나 보다. 워킹맘으로는 너무 부족했던 거지... 그래서 공부방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공부의 방법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교육상담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컨설팅이라고 하더라. 교육컨설팅
그러다 이젠 호찌민에 있다. 난 다시 내 이름대로 살고 싶다. "알지" "고울 연"
나는 교육 컨설팅에 집중을 하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새벽 공부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고 있는 이 교육학 책은 교사들을 위한 책이었지? 그런데 이 내용을 아이의 엄마에게 알려준다면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렇다면 유행하는 공부방법 이것저것 우리 애한테 실험해볼 필요도 없을 텐데..."
내 아이를 가장 잘 이해하고 파악하기 쉬운 엄마들을 위한 교육학 책을 만들자.
엄마가 엄마표 영어를 하든, 영어학원에 보내든, 개인강습을 시키든 간에 기본적으로 이러한 내용들을 숙지하고 있다면, 아이도 엄마도 덜 상처 받지 않을까
코로나로 인해 온 가족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다. 물론 SNS에서는 세상 화목한 가정밖에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 신기하다. 나랑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사는 게 참 지겨운 듯 , 걱정이 많다는 듯 이야기하는데.... sns만 들어가면 나도 변한다 ^^
매일매일 나는 글을 쓴다. 나는 아무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는, 그리고 아무 돈이 안될 수도 있는, 그래서 하다가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는 엄마들을 위한 영어학습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내 책에서 한다. 브런치에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작가가 되었다. 브런치 작가.
요즘은 아주 재미있는 고민을 많이 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을 쓸 수 있을까.
40대 주부가 뒤늦게 sns도 하고, 구독 수도 신경 쓰고 있는 귀여움을 부린다. 이렇게 또 하루를 난 다르게 살아보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 나는 내 이름을 다시 한번 더 상기 키실 수 있을 테니까.
아이 영어공부에 대한 고민 또는 정보 교환을 하는 공간입니다. 마음껏 들러주세요 ^^
매거진 < 내 아이 영어공부법 찾기 시작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