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어쩌다 나의 삶에 들어왔고,
이것은 지금의 나에게 삶의 안내판이 되어주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보다 오래 산 어른들의 말은 대부분 옳다고 믿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안에서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 애썼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가며 분명히 느끼게 된 것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가 같은 깊이의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분은
당신이 살아온 삶이 전부 다가 아님을 알고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또 어떤 분은
당신이 걸어온 길이 정답이라 여겨
그 길을 권유했다.
'내가 옳으니 이 길로 가라'라고 하는 이 마인드가
바로 꼰대의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어른과 대화를 하다 보면 늘 막히는 말이 있다.
"네가 더 살아보면 알아."
이 말 앞에서 나는 늘 속수무책이었다.
특히 따르고 싶지 않은 어른이 꼭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그 시간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고,
그 기간을 살지 않은 내가
경험으로 반박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맞다.
나는 그 시간을 살지 않았다.
그러니 경험의 총량으로는
그 말에 맞설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그저 어른과 사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아야 할까.
인문학을 만나며
이 질문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인문학은
어른의 말을 부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준다.
삶의 경험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삶의 원리, 인간의 본질,
세상이 반복해 온 구조는
몇 백 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어른의 말을 마주하는 유일한 방법은
같은 경험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삶의 원리에 부합하는지
차분히 대입해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네가 더 살아보면 안다'라는 말이
정말 삶의 본질에서 나온 말인지,
아니면 그저 한 개인의 경험에 머문 말인지는
원리를 대입해 보면 분별할 수 있다.
어른의 말이 다 옳은 방향인지는
한 사람의 인생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넓은 시선이 필요하고,
그 시선을 길러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말과 사회의 기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이제야 자각하게 되었다.
외부의 시선과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나만의 기둥을 세우지 않으면,
나는 평생
'아직 어려서 몰라서 그런 건가?'라며
별 의심 없이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 역시 받아온 말을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건네는
어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에 불과한 내 삶이 전부라 생각하며
아이에게 꼰대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내 기준이 아닌 외부의 기준대로
살면서 말이다.
인문학과 철학은
나를 멈춰 서서 나에게 묻는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는 존재인가
그것은 정말 '옳은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전제는 무엇인가?
몇십 년을 산 한 사람의 말이 더 믿을만할까
아니면 몇 백 년을 건너도 바뀌지 않는
수천만 사람의 경험에서 관통한 세상의 원리가 더 믿을만할까
중요한 것은
어른의 말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이 삶의 원리에 닿아 있는지를
스스로 판별할 수 있느냐이다.
경험은 어른들이 더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원리를 아는 사람은
경험 앞에서도 휘둘리지 않는다.
그 힘은 말싸움의 힘이 아니라
사유의 힘이고,
그 힘이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어른들과 사람대 사람으로서
대화할 자신감을 얻었다.
나보다 더 산 어른들과의 대화가 늘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리고 "네가 더 살아보면 안다"는 말 앞에서
자꾸만 작아진다면,
인문학을 공부해 보는 것은
스스로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