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글 근육을 기르며 그 글이 나의 삶에 스며들고 있다.
돌아보면서 하나씩 성장해 온 내가 보였다.
앞으로도 한 발씩 나아가보려 한다.
지금은 근육을 정교하게 다듬는 때가 아니라
일단 계속해서 그 근육을 쓰면서 감각을 기를 때.
열심히 양을 쌓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브런치 장도 그 일련의 과정 중 하나이다.
정신을 계승하는 공저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미움'과 '멋'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있다.
나의 언니였다.
어렸을 적 언니는 나를 자주 괴롭혔고,
나는 언니가 무서웠다.
엄마 말은 듣지 않아도 언니 말은 들을 정도였다.
어느 날은 어린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른 채,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다.
폭력도 있었다.
그때 느꼈던 수치심과 두려움, 억울함은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말로 풀어내지 못했다.
대신 친구들에게 언니 욕을 하며 속을 달랬다.
"언니 진짜 극혐."
그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가족은 피할 수 없었고, 미움은 그렇게 마음 안에서 자라났다.
나는 성인이 되고 한동안 이미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덮어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언니가 감정에 휘둘려 행동으로 표출될 때마다,
'이번엔 어떤 부분이 기분이 상했을까?'
기분이 상했을 언니를 먼저 살피며
큰 갈등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관계는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관계가 건강해서가 아니라,
나도 나의 감정을 누르고
언니 스스로도 감정을 눌러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감정은 존중할 수 있지만,
감정으로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언니는 자신의 행동을
내가 그만큼 감정이 상했기 때문에 그럴 만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며 사과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었다.
행동을 인정한 사과가 아니라,
행동을 감정으로 덮어버리는 설명에 가까웠다.
그것은 책임이 아니라 합리화였다.
자신의 감정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표출해 버리는 것에 대해
가족이니 이해해줘야 한다는.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합리화에 동조하고 있었다.
상대를 바꿀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포기하는 쪽을 택했고,
그 선택을 '현명함'이라 스스로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장이 아니었다.
나는 관계에서 성장을 택한 것이 아니라,
퇴화를 택하고 있었다.
'또 그러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단정 지으며 상황을 무마해 왔다.
그러자 관계는 고착되었고,
상대는 그 구도 안에서 편안해졌으며
나는 점점 나 자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깨달아 좋았던 단 한 가지는,
존재와 역할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동생이라는 역할에 나를 가두고 있었던 것 같다.
상대를 언니라는 역할로만 생각하니 쉽게 위축되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도 한몫했을 것이다.
말을 삼키고 판단을 미루며, 결국 자신의 존재를 접게 된다.
하지만 축을 '존재'에 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도 존중하고, 타인도 존중하며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무례가 아니라,
존중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미움은 오롯이 상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역할로만 사람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 때문이었다.
언니라는 역할, 언니와 동생이라는 관계에 중심을 두고 바라보니 나는 작아졌고,
그 위압감이 미움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 퍼즐이 이제야 맞춰졌다.
내 존재가 있고, 그들의 존재가 있다.
우리는 서로를 우주처럼 대하면 된다.
그러면 복잡할 것이 없다.
내가 실수하면 알려준 상대에게 감사하고,
상대가 실수하면 너그러울 수 있다.
그리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 된다.
감정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이는 싸움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만 하면 된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도 말한다.
상대 또한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미움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하지만 이성의 힘으로 분별할 수 있고,
내가 선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두려울 것은 많지 않다.
이런 힘 또한 상대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회가 수직적이어서 내가 말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내 시선이 수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 시선부터 수평으로 맞추려 한다.
내가 말하는 수평은
함부로 대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서로를 존재로 존중하기 때문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지켜야 할 선을 분명히 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자,
나를 지키는 방식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 존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태도,
그 자체가 내가 말하는 '멋'있는 사람의 자세였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742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3Z4R2VoCVZjnu1j7FOnxVFrJ1a5LaNKu4G7H4Q3GRHTvBsQ/viewf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