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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Oct 06. 2018

자리에 예민하다는 문제

상관없는 척 담담하게 먹기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기 창가쪽에 앉으면 안되나요?”

“아뇨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어디선가 들어본 음식값에 자리값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에 비추어 보면, 내 마음대로 앉을 권리라는게 어느 정도는 있는 듯 한데, 어쩌다 만나는 편리한 서빙을 위한 직원의 강제 자리배치는 도무지 값을 지불하는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

왜 원하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지 묻는 순간부터 갖가지 핑계가 쏟아진다.

“여기기 편해요.”

“뭐가 편한데요?”

“뭐 바람도 시원하고 편해요...”

“????”

자꾸 캐물으면 직원의 표정부터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라리 ‘예약’ 팻말을 두면 이해가 빠를 것을.. 그렇지만 결국 식사를 포기하고 나가고 싶은 멘트를 듣고 만다.

“아니 그럼 앉고 싶은데 앉으시던가.”(반말이야 뭐야?!)

넓은 업장에 순차적으로 청소을 하고 마감을 한다던가 혹은, 웨이팅이 긴 맛집에서 손님이 나가서 비는 자리대로 앉는다던가 하는 당연한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도무지 바람이 시원하고(혹은 따듯하고) 마냥 편하다는 자리 안내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봐도, 안내하는 테이블쪽에 손님이 몰려있고 술을 판매하는 경우 시끄럽기까지 하다.

자리뿐 아니라 소리도 신경쓰는 나로써는, 자리에 대해 신경을 안쓸래야 안쓸 수가 없다.

아직 자리를 요구하다가 ‘안팔테니 나가라’ 소리를 들어본적은 없지만, 혹여 그런 최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만, 말을 아끼고 잠자코 앉아 먹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 자리에 대한 서비스가 부족한 곳을 떠나, 반드시 같은 메뉴의 다른 식당을 찾기로 다짐한다.

나로써는 그들이 일하기 편한 자리로 앉기를 반강요하는 것으로 보이고, 갖가지 이유를 대는 것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먹는 기분을 맘껏 즐기려는 나에게, 얼른 아무데나 앉아서 먹고 가라는 약간 부족해보이는 서비스 정신이 못내 서운하다.


문득,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자리에 대한 욕심이랄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 대해 극한의 예민함을 꺼내드는 이놈의 성격이, 시키는대로 앉아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예민한게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이기심은 아닐까. 권리를 주장하는 블랙컨슈머 같은 이기심.

그러고 보니 자리에 대해, 이 예민한 생각으로 포장된 듯한 이기심에는 약간의 배려가 빠져있다.

“거기 아무데나 편한데 앉으세요.”라고 한다면  ‘안내조차 없는 무관심한 업장으로,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나’ 하고 더 꼬아서 생각해본다.

‘일하기 편한대로 자리배치를 강요한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나는 ‘직원이 일하기 불편한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 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편하다는 자리에 앉게 하고, 해주는 서비스를(기껏해야 음식 서빙이지만) 받는 것이 손님의 입장에서 더 나은 대우라고 직원은 해석할 수도 있다. ‘음.. 그래 그럴수도 있지’

배배 꼬이다 못해 조금씩 튿어질 것 같은 사회부적응자스러운 생각은 제발 그만두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받으려고 하는 이기심을 내려놓기로 한다.

앉으라는 자리에 밝게 앉고, 밝게 음식을 받아 먹으니 나쁠 것이 없다. 원치 않았던 자리 덕에 기분이 그닥 밝진 않았으나 밝게 맞이하니 단순하게 배를 채운다는 생각은 줄어들고, 맛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기며 직원과의 불필요한 언쟁도 없을 것이니, 신경쓸 것이 줄었다. 어떤 말을 어떻게 요리조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배려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쩌면 배려일 수도 있을수도 있지... 않을까 아닐까 배려가 맞을까...’ 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발상과 생각의 전환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면, 예민해서 찌르면 터질 듯한 이 못된 승질도 조금씩 나아지지 않겠나.

권리를 주장하다 못해 이기적이며 예민한 갑질이 넘쳐나다 못해 무시무시한, 이 사회에서 말이야.


반드시 마음에 드는 서비스를 모두 받으며 살아야 한다면, 혹은 그를 위해 매 순간 논쟁을 하며 신경이 곤두 서 있어야 한다면, 그보다 피곤하고 지치는 인생이 있을까.

예민하다는 타이틀을 포기하고 조금 유하게 살아보는 것이 결코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 알게되는 것.

또 지금부터 앞으로 이어질 수 많은 삶과 인간에 대한 일종의 축복을 받은 것 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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