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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r 30. 2019

가장 전형적이어서 추악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말로

[드라마리뷰] '빅 리틀 라이즈(2017)'

보통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스릴러물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이 되는 질문은 ‘피해자가 누구인가?’이다. 그래야 사건을 말미암아 이야기 자체가 시작되고, 쾌락살인이 목적인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범인은 피해자의 지인이기 때문에 인물들 간의 진실과 거짓의 줄다리기로 스릴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이 재미있든 없든 일단 사건을 접한 이상 범인이 누군지는 알아야 하기 때문에 작품을 끝까지 보게끔은 만드는 ‘살인사건’이란 소재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는 살인사건이란 소재를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바로 끝까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것이다.


한 외진 마을 몬터레이의 초등학교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하필이면 초등학교에서, 그것도 자선기금을 모금하는 뜻깊은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사건이 발생해 온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경찰들은 주민들을 차례로 불러 피해자와 용의자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기자회견까지 열어 사건에 대해 발표한다.


장면 중간중간에 이따금씩 삽입되는 기자회견 장면을 제외하면 그 어느 누구도, 어느 장면도 피해자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용의자인 다섯 주부들에 관한 가십거리만 진술할 뿐이고,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다섯 주부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관한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아마도 피해자가 누구인지, 용의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단순한 질문에 중점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누구를 살해했는지가 아닌, 누가 누구를 ‘왜’ 살해해야만 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이해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게끔 몰아간 극단적인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살인을 함으로써 정말로 종결시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대체 살인은 왜 일어난 걸까? 그것은 이 작품의 살인이 가장 전형적이기에 추악한 남성성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여성성의 최후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1. 경고; 스포일러와 여성중점적 서평에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드라마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두 가지 사건을 밝혀야 한다. 주인공 개개인의 이야기 만큼이나 두 사건의 교차점이 너무도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모든 재미를 드러내야 이야기가 가능하다. 유감이지만 스포일러는 해야겠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 초등학교 입학식도 전인 예비설명회에서 애마벨라라는 아이가 같은 반 친구에게 목에 졸렸다. 선생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한데 모아 말했다.


“누군진 모르지만 사과하길 바라요.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누가 나와서 자백하고 사과하겠는가. 당연히 술렁이는 관중들 사이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았고, 애마벨라는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지만 그녀의 엄마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선생을 압박했고, 선생은 애마벨라를 앞으로 나오게 해 손가락으로 누군지 가리키라고 한다. 결국 애마벨라는 쭈뼛쭈뼛 한 남자애를 가리킨다.


지목된 아이 지기는 곧장 아니라고 주장했고, 당연히 애마벨라의 엄마 레나타와 지기의 엄마 제인은 각자의 아이를 믿으며 본격적인 진실게임을 시작한다. 일이 커지는 걸 꺼리는 나머지 학부모들이 빨리 자백하고 사과하라며 제인모자를 압박할 때 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를 믿는 셀레스트와 매들린은 끝까지 그들의 결백을 믿고 응원해준다. 그들의 진심대로 지기는 결백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누가 ‘왜’ 애마벨라를 괴롭혔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선 셀레스트의 속사정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애마벨라를 괴롭힌 아이가 바로 셀레스트의 아들 맥스이기 때문이다.


2. 사소한 거짓말로 가릴 수 없었던 폭력의 현장



셀레스트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동시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게 됐다. 남편 페리는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거창한 단독주택을 혼자 번 돈으로 관리 가능할 정도로 유능한데 출장을 자주 다닌다. 그래서 외로운 아빠가 되는 것에 조금 불안함을 가져서인지 출장을 며칠 미루고 아들들의 입학식을 참석하려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장난끼 많은 쌍둥이 아들들과 잘 놀아주는 재밌는 아빠이자, 아이들 앞에서도 엄마에게 애정표현을 거리낌없이 하는 다정한 남편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행복해 보이기만 했는데, 예비설명회를 다녀온 날 셀레스트가 애마벨라와 지기의 이야기를 꺼내자 페리가 무섭게 정색하며 말한다.


“우리 애들이 지기라는 아이랑 못 놀게 해. 폭력적인 친구와 어울리면 안 되잖아.”


셀레스트는 지기가 누명을 쓴 것일 수도 있다며 별 거 아니란 듯 웃고넘기려는데, 페리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팔을 강하게 비틀어 쥔다. 아픔에 신음하면서도 곧바로 페리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온몸이 경직된 셀레스트의 반응이 심상찮다. 그날은 손을 뿌리침으로써 별 일 없이 지나갔고, 다음날 페리는 곧바로 사과했지만 그날이 페리가 셀레스트에게 손을 댄 첫날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날 이후로도 페리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셀레스트에게 화를 내고,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뺨을 때리고, 그녀가 반격해 뺨을 때리니 있는 힘껏 밀쳐 내동댕이친다. 다음 순간 잃어버렸던 이성을 되찾았단 듯 페리는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 여기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두려움에 경직되어 있는 셀레스트의 두 팔을 꽉 잡고 흔히 격한 싸움 후 화해의 의미로 성관계를 맺는 Make-up sex를 치른단 것. 이게 지속적으로, 그것도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반복되어 셀레스트 몸엔 멍이 사그라들 날이 없다. 한 번은 페리가 셀레스트를 죽을 정도로 목을 조른 적이 있어 두 사람은 부부상담을 받기에 이른다.


상담을 받으면서도 셀레스트는 방어적으로 진술한다. 이혼을 결심할 정도로 자주 맞았으면서 겨우 말로만 싸웠다고 말하고, 서로가 격렬한 관계를 맺기 위해 싸우는 건 아닐까 싶은 적도 있다며 이 과정을 좋아하는 듯 말한다. 눈치 빠르고 적극적인 상담사 덕분에 가정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었지, 안 그랬다면 셀레스트는 자신이 죽든, 이혼을 하든 어떻게든 완벽한 가정을 잃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아빠가 엄마를 폭행하는 사실을 아이들이 모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사랑 넘치는 부부의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한 지붕 아래 사는 이상 옆 방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은 폭행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섣불리 얘기해야 할지 말이다. 지속적으로 폭행에 노출된 아이에게 어느 방향으로든 영향이 끼치지 않을 리가 없다. 그 결과로 애마벨라가 맥스로부터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다.


3. 폭력적인 남성성, 대물림되는 폭력성의 피해자‘들’


셀레스트와 애마벨라에겐 공통점이 있다. 폭행을 당한 것 외에도 폭력을 누구에게 당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단 것이다. 사실 누구에게라도, 상담사나 엄마에게, 선생님에게 말을 했더라면 빨리 끝날 일일 수도 있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왜 그들은 입을 닫았을까.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가해자를 지켜야 했을까. 그건 자기 생명이 끝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지금의 행복과 평화를 깨고 싶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정폭력이기 앞서 여성이 겪는 남성으로부터의 폭력이 무서운 이유이기도 하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힘의 차이는 분명하다. 그 분명한 힘의 방향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흐를 때 어쩔 수 없이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이때 여성은 뺨을 맞았다고 해서 같이 뺨을 때릴 때 어쩌면 발차기를 당할 거란 두려움에 휩싸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어딘가에 얘기하면 보복을 당할 지도 모른단 불안감에 입을 닫아버리게 된다. 특히 엄마의 경우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나만 감내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렇게 믿지 않으면 가정을 잃을 수 있단 생각에 가정을 떠나지 못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폭력의 굴레에서 헤어날 방법은 당사자 혼자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작품에서는 모든 여성인물들이 우정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믿고 응원하고, 여성이란 공감대 하나만으로 전폭적인 도움을 준다. 친구이자 동네주민이었던 다섯 명의 주부들은 셀레스트의 비밀이 밝혀진 모든 순간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결국 살인까지 불사했다. 이것은 페리라는 남성을 죽임으로써 동시에 자신들을 억압하고 굴복시켰던 남성성을 근절시키고 새롭게 독립해낸 것이다.


페리를 죽임으로써 해방된 피해자는 여성들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남성인물들은 꼭 한 번씩 폭력성을 표출하곤 한다. 단순히 페리의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여성들의 굴곡진 몸매에 꼭 한 번씩 성적으로 끌리는 시선을 던지는가 하면, 남성들끼리 견제할 땐 때리고 싶다는 뉘앙스를 섞어 말싸움을 한다. 여성들이 우정을 나누며 함께 고난을 헤쳐가는 모습 등 다면적으로 묘사되는 것에 비해 남성인물들은 대부분 단순한 역할로 보여진다. 성적매력을 눈으로 쫓고 모든 문제를 힘과 섹스로 해결하는 역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성들이 폭력적인 성향을 타고났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남성들이 섹스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단지 남성이 여성에 비해 좀 더 강한 신체조건을 타고났단 이유로 남성과 여성 모두 이미지 메이킹을 가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말이다. 페리의 죽음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또한 획일적인 남성성의 종지부를 찍는 것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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