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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r 16. 2019

일본은 왜 UDI라보가 필요했을까?

[드라마리뷰] '언내추럴(2018)'

그저 그런 뻔한 일본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일본 작품 특유의 만화적이면서 과장된 연기와 연출로 적응하기 쉽지 않겠네, 법의학을 소재로 했지만 어쨌든 추리물인데 결국 ‘범인은 바로 당신!’이라면서 끝나겠지, 뻔한 인물들이 뻔한 사건들을 뻔하게 해결하며 다 같이 어깨동무하고 웃으면서 끝나는 게 매화 똑같겠지 싶었다.


역시나 캐릭터 설정이 너무 진부했다. 주인공 미스미는 공손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할 건 다 하는 여자법의학자이고, 그녀를 자기보다 부검 실적이 낮다며 무시하는 나카도는 실력은 좋지만 까칠하고 오만한 남자법의학자다. 당연히 그는 원래 무뚝뚝할 뿐 본심은 다정해서 해달란 건 다 해주는 츤데레다. 그리고 이 둘의 수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독극물 분야 천재 여자병리사 쇼지, 은근 법의학을 죽은 사람을 위한 학문 아니냐며 꺼리다가 점점 법의학자로서의 꿈을 키우는 남자알바생 쿠베, 이들 모두가 소속된 팀을 책임지는 소장까지.


이들이 보여줄 이야기야 뻔하지 않는가. 시체를 부검해 사인을 밝히고, 피해자의 주변인들을 조사해 피해자가 죽은 진짜 이유를 밝히고, 살해당했다면 진범을 밝히고, 그 어떤 난관에 봉착해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기가 막힌 해답을 찾아 짠-하고 사건을 해결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뻔한데, 달리 재밌는 점이 있으려나? 내가 2화까지 볼 수나 있을까?


그런데 웬걸, 눈 떠보니 두 번째 정주행을 마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 뻔한 설정과 뻔할 것 같은 진행방식이 오히려 「언내추럴」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반전요소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물이 뻔하기 때문에 드라마 속 사건에 더 집중하게 됐고, 사건에 몰입할수록, 범인이 누구인가에 더 집중할수록 더 깊숙한 곳에 파헤치고 마주해야 할 진실을 보여준다.


그 진실은 주인공들과 우리들에게 말한다. “범인이 누구인지에만 신경쓰지 말고, 이 사람이 왜 죽었는지, 왜 죽어야만 하는지를 밝혀내라”고. 그것이 UDI라보, 즉 부자연사 규명연구소(Unnatural Death Investigation)의 법의학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사인을 모르는 시신은 부검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굳이 UDI라보라는 기관을 세워서 따로 관리해야 하는가? 유족 측에서 특별히 거부하지 않는 이상 어떠한 사건의 피해자라거나 갑자기 돌연사한 경우에는 무조건 부검을 한 다음에 그 결과로 수사를 진행하지 않나?


왜 일본은 UDI라보가 필요했을까?


1. “누가 죽었는가?”

 ; 억울한 죽음으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기 위해


1화에서 UDI라보는 이렇게 소개된다.


“일본에서는 부자연사의 80% 이상을 부검하지 않은 채 적당한 사인을 붙여서 화장하고 있다. 도쿄 23구는 부검률이 비교적 높은 17%지만 부검률이 최악인 지역은 2% 이하로 선진국 중에서도 최악의 수준이다. 그 상황을 바꾸려고 만든 게 UDI라보다.”


게다가 일본의 법의학자가 170명, 그중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법의학자는 150명뿐이라고 한다. 이 말들을 종합하면, 인력도 부족하고, 제대로 된 부검의식도 부족해서 대충 그럴 듯한 사인을 만들어 화장시켜버린 사람들이 거의 전국민이라는 말이다.


결국 그렇게 사인을 밝혀내지 않고 지나친 탓에 누군가는 누구보다 건강했지만 메르스에 감염돼 목숨을 잃었음에도 허혈성 심장질환으로 돌연사했다며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는 부검하지 않았더라면 단순 자살 사건으로 단정 지어져 하마터면 살해 당한 사실을 밝히지 못할 뻔했다. 부검만 제대로 이뤄졌다면 연쇄 살인을 막는 건 고사하고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음 자체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부검만 제대로 이뤄졌다면 말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누굴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지 못한 피해자 본인? 아니, 당연히 그를 잃은 그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연인이다. 영문도 모른 채 나의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레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조차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 의사들은 눈대중으로 적당한 사인을 갖다붙일 뿐이고, 부검을 의뢰해도 어떤 의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다. 내 가족이 왜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호소해도 그들은 쉬쉬하고 만다.


그러는 동안 경찰들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주변인을 용의자로 세워 죄를 묻는다. 단지 연인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최초 목격자란 이유로, 아내가 죽어가는 동안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단 이유로, 연인이 시신으로 발견될 동안 집에 없었단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법의학자로서 아무 말 없이 부검했단 이유로 말이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안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아픈 사람들이 그가 왜 죽었는지 이유도 알지 못했는데 도리어 그를 죽인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밝히지 않은 사인 하나 때문에 죽은 자는 억울한 죽음을 밝히지 못하고, 밝히지 않은 죽음 때문에 유족들은 원통함에 울고, 억울하게 쓴 누명에 또 울고, 내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울부짖는다.


잘못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져야만 하는 억울한 상황이 왜 생겨야 하는가?


출처 : 언내추럴 공식 홈페이지


2. “왜 죽어야만 했는가?”

 ;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우리 모두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시체는 많은 얘기를 한다. 이 말처럼 시신이 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선 부검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시신이 어떻게 사망하게 됐는지를 파악해야 그가 왜 사망하게 됐는지 원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드 CSI 시리즈 어느 에피소드를 틀어도 빠짐없이 부검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는 정밀하고 정확한 과학수사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당연한 부검이 일본 전국 평균 10% 밖에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모두가 쉬쉬하고, 덮어두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안일한 마음가짐 때문이다.


죽은 사람 몸을 괜히 열고 헤집으며 괴롭히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인에도 눈을 감고 화장을 했다. 메르스 바이러스가 옮은 건 진료를 받은 병원에서였지만 병원이 이 사실을 묵인한 탓에 무고한 사람이 죽고, 해외 출장을 다녀와 감염증상이 있었을 텐데 병원에 진작 가지 않아 메르스가 퍼진 거라며 오히려 욕을 먹었다.


한 남학생은 살인자인 척을 하면서까지 친구가 자살한 원인을 알리고자 했다. 그를 잔혹하게 괴롭힌 동급생에게 복수하기 위함도 있지만 남학생들끼리 원래 치고 받고 싸우면서 크는 거라며 학교폭력을 알면서도 외면한 선생님과 자기도 피해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에 입을 닫은 친구들, 그리고 그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며 눈물로 호소하면서 말이다.


시신이 부검할 수 있는 의대로부터 40km나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어 시신을 옮기기 힘들다는 이유로, 근처에 의대가 있더라도 관할서와 사이가 안 좋다는 이유로, 큰일 만들지 말고, 괜한 일에 나서지 말라며 언뜻 부검을 안 하려고 만들어낸 핑계 같지도 않은 핑계들을 대느라 일본의 부검률은 최악의 수준이 됐다.


그래서 UDI라보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범인이 아니라 원인이다. 죽은 자가 죽어야만 했던 원인을 밝혀낸다는 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자 한다는 것이다. 왜냐, 범인이 아닌 원인을 찾는다는 말은 곧 책임을 묻는 게 아닌 책임을 지고자 함이며 이와 같은 잘못을 외면하지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 다짐하기 위함이다.


3. 사인을 왜 밝혀야만 하는가?

 ; “법의학은 미래를 위한 학문이니까.”


나는 드라마를 보며 생각했다. ‘어, 범인은 저 사람이네. 이런 이유로 이랬고, 이래서 죽였네. 저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면 누가 범인일까?’ 시종일관 범인이 누구인지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중요한 피해자를 보지 못했고, 나의 편협한 선입견을 단단히도 깨주며 드라마는 말해줬다.


“범인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범인만의 잘못이 아니야.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우리가 대신 말해줘야 해. 외면하지 말고 떳떳하게 말해줘야 해.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할 책임이 있어.”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만의 죽음이 아니다. 누군가의 폐렴이 곧 한 국가의 미세먼지 경고등이 될 수 있고, 누군가의 자살이 한 시대가 지닌 사회적 문제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죽음은 곧 개인이 속한 집단과 국가, 사회와 시대의 병폐로 인한 결과이자 시작이며 동시에 진행일 것이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적어도 내가 죽고서도 진실을 밝힐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진상을 적어도 나는 알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어야 하진 않을까? 삶과 죽음 앞에 누구나 평등하듯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손길에 그 어떤 이해관계의 간섭도 없어야 하지 않을까?


나카도의 말처럼, “영원히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반복하는 인생, 지금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 영원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평생 마주하며 살아가야만 하지. 그런 사람을 한 명이라도 줄이는 게 법의학이 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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