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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Feb 16. 2019

부모도, 자식도, 이번 생이 처음인 게 죄는 아니지만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

1.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이 영화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단 한 장면으로 설명하라 말한다면 주저 없이 오프닝 시퀀스를 들이밀 것이다.


고요한 심야에 유유히 펄럭이는 하얀 커튼과 서늘한 바람 소리. 동시에 들려오는 잔디 스프링클러 소리는 카메라가 커튼 너머를 보러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빠른 박자로 돌아간다. 하얀 커튼에 가까워질수록 화면이 하얗게 번지고, 다음 순간 전환된 장면에는 빼곡하게 모인 반나체의 사람들이 토마토 축제를 즐기고 있다. 빨간 토마토를 여기저기 마구 던지는 사람들의 함성. 토마토를 온몸에 발라 빨갛게 물든 사람들 속에 주인공 에바가 있다. 사람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즐겁게 축제를 즐기던 에바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로부터 압박을 받는 사람처럼 굳어간다. 에바를 둘러싼 사람들의 함성은 점점 비명처럼 들려오고, 그들을 둘러싼 토마토는 이제 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들려온다.


“당신이 내 아이를 앗아갔어!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같으니!”


유일하게 안심하고 몸을 뉘어야 할 집이 더 이상 편안하지 않다. 즐거워야 할 축제는 즐거워하는 마음 자체만으로 죄가 된다. 에바는 잘못한 게 없지만, 죄인이 되어야 한다. 어린 나이에 살인을 저지른 케빈의 엄마라는 이유로 길을 가다가도 뺨을 받고, 껍질이 모두 부서진 달걀을 사 먹어야 한다. 에바는 엄마라서 커튼으로 가려진 진실을 마주해야 하고, 피로 얼룩진 케빈의 죄와 죗값을 함께 나눠야 한다. 가장 가혹한 점은 케빈이 죽인 수많은 사람 가운데 그의 아빠이자 여동생, 에바의 남편이자 딸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녀만큼은 케빈에게 손가락질할 수가 없다. 남들이 에바에게 하는 것처럼 그를 욕할 수도, 경멸할 수도 없다. 엄마이기 때문이다.


에바로선 억울할 따름이다. 자식을 낳는가 안 낳는가는 선택이지만 어떤 자식을 낳느냐는 선택할 수 없는 건데, 살인마를 낳은 게 에바의 죄는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이 영화 속 케빈이라는 인물은 여러 자료에서 사이코패스의 예로써 사용될 정도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에바에게 누군가가 한 말처럼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런 사이코패스적 성향이 케빈을 살인마로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케빈이 살인마가 되는 것이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바는 케빈이 태어나고부터 단 한 번도 그에게 왜냐고 묻지 않는다. 기저귀를 찬 갓난아기가 자신과 놀아주는 엄마를 무서운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볼 때도,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욕을 자신에게 해도, 물감으로 채운 물총을 에바의 방에 잔뜩 뿌려 더럽힐 때도, 여동생을 괴롭힐 때마저 에바는 케빈에게 왜 그러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혼을 내고, 똑같이 노려보고, 아들의 컴퓨터를 뒤지기까지 한다. 이해해 보려고 아들과 밥을 먹으려고는 하지만 또 싸우고 만다. 에바는 처음부터 케빈을 이렇게 이해한다.


이상한 아이. 날 때부터 날 싫어하는 아이. 심성이 고약하고 나쁜 아이라고.


하지만 과연 케빈이 저지른 살인이, 그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단순히 케빈이 날 때부터 악마의 본성을 타고 났기 때문일까? 사이코패스로 태어났으니 살인을 저지른 행위는 당연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살인이 너무 쉬워진다. 한 번 케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2. 케빈은 최악의 아들일까?



케빈은 확실히 좋은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그의 가족에게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케빈의 친구나 다른 지인들은 일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케빈과 그의 가족들 사이의 모습으로만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케빈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 최악의 아들이 됐다. 


차근차근 짚어보자. 기저귀를 찬 갓난아기에게 우리가 바라는 거야 간단하다. 세상 물정 몰라 순수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꺄르르 웃어주고, 기저귀를 떼고 나선 말 잘 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고, 바르고 건강하게 어엿한 어른이 되길. 모든 부모의 마음이자 가족이든 친구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바라는 최소한의 마음이다. 케빈은 그 모든 부분에서 반대로 행동한다.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일 때부터 케빈의 눈빛은 항상 에바를 노려본다. 엄마 노릇 하겠다는 에바의 몸부림을 비웃어 줄 정성도 없다는 듯 에바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의 눈빛이 동일하게 날카롭다. 보통 아이라면 말을 떼고도 남을 나이에도 입을 절대 떼지 않고, 어쩌다 말을 시작하게 되어 ‘엄마’라고 말해보라면 ‘싫어’라고만 말한다. 7살은 넘어 보이는데 여전히 기저귀를 못 뗐고, 동생이 태어나면 철이라도 들 줄 알았는데 툭하면 동생을 괴롭히더니 결국엔 동생 눈 하나를 의안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 다음은 알다시피 아빠와 동생을 죽이고 학교 강당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을 사냥하듯 살해했다는 것.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케빈의 악행은 도가 지나치다. 그건 인정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케빈이 안쓰럽고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기에 그를 변호해주고 싶고,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가 그랬듯이 케빈을 안아주고 싶기까지 하다. 에바는 마지막 장면 속 교도소에서 케빈과 마주 앉고서야 물었다. “왜 그랬니?” 케빈은 “이유를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모르겠다”고 대답하지만 나는 그가 에바의 품에 안기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는 그저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은 소년일 뿐이었다.


그럼 대체 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가?


앞서 말했듯 에바는 케빈에게 ‘왜?’를 묻지 않았다. 3살도 채 되지 않은 그 아이가 눈에 보일 정도로 악의를 품고 있는데, 누가 봐도 엄마를 골탕 먹이려고 금방 갈아준 기저귀에 변을 본다던가, 동생이 아끼는 기니피그를 죽였을 때마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똑같이 노려만 볼 뿐 아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답은 ‘케빈이 내게 하는 복수’라고 내렸다. 남편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지만 에바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리고 에바 본인이야말로 자신이 케빈에게 어떤 짓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기에 케빈이 자신에게 복수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3. 에바는 최악의 엄마일까?



“엄마는 케빈이 태어나기 전엔 행복했어. 매일 아침 ‘여기가 프랑스였으면 좋겠다(케빈이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빌어.”


아직 말도 못하는 갓난 아들에게 에바가 한 말이다. 아마 케빈이 못 알아들을 거라고, 크면 기억을 못할 거란 생각에 섣불리 한 말이겠지만 진심은 진심이다. 에바는 배낭 하나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며 세상을 누비는 여행가였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계획도 없이 임신을 하게 되어 모든 걸 포기했다. 에바에게 케빈은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커져가는 배를 바라보며 환멸을 느꼈고, 목청이 찢어져라 울기만 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갓난아기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싫었다. 그러니 울고 있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공사장으로 끌고 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묻어버리면서 안정감을 얻었을 것이다.


한창 청춘의 자유로움과 젊음이란 꽃을 피워 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하필이면 임신을 해 가정에 종속되어야 했다. 당연히 누려야만 했고, 그 ‘자유’가 자신의 개성이자 특성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바로 에바였으니 억울한 마음에 그 책임을 케빈에게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어린 케빈이 에바의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다. 일생에 한 일이라고는 태어난 것뿐인데, 자신의 삶의 이유이자 생명을 부여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는 걸 태어나자마자 목격했다. 그런 아이가 자신의 가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랑이 넘쳐나는 가정은 터무니 없이 들리고, 서로 제 갈 길 가는 무심한 가정은 욕심으로 들리지 않을까.


‘가족’이란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혈연이 강력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를 낳아준 사람을, 내가 낳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디서 방황을 하더라도 늘 언제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설령 내게 실망을 하더라도 언제나 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 전부를 믿지 못해도 가족 만큼은 믿을 수 있다. 케빈은 이미 그런 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해버렸으므로 신뢰는커녕 사랑조차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에바를 엄마라고 인정할 순 있어도 제대로 받은 사랑이 없어서 제대로 사랑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외동아들일 때는 마음대로 해도 엄마 아빠 모두 케빈에게만 관심을 쏟았으니 마음대로 해도 됐는데, 동생이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엄마가 동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애지중지하면서 사랑을 듬뿍듬뿍 주더랬다.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안아주지 않았으면서 동생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마냥 싸고 도는 모습이 당연히 달가워 보일 리가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케빈의 분노를 자아낸 부분은 자신이 없어도 행복하게 웃는 가족들, 자신의 빈 자리가 느껴지지 않는 세 사람의 완벽한 그림.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자신마저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케빈은 살인을 결심하고 계획한다.


케빈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을 못살게 군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기 보단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된 건 아닌가 싶다. 애초에 케빈이 에바에게 부여받은 존재성 자체가 ‘어릴 때 잘못 대했더니 소름 끼치게 복수하려고 하는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존재를 에바에게 증명해 보이는 방법으로 가족을 포함한 살인을 선택한 게 아닐까? 케빈이 맞지도 않은 어린 시절의 옷을 커서까지 계속 입고 다닌 이유 또한 동생이 태어나기 전 자신에게 몰두하는 엄마의 관심을 돌려받고 싶은 것은 아닐까?


4. 가족이 되는 건 쉬워도, 가족을 하는 건 어렵다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 아들을 둔 엄마’ 영화라고 소문이 나긴 했다. 사이코패스라는 케빈의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 그 방향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 영화는 에바와 케빈의 관계가 살인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극단적으로 보이다 뿐이지 충분히 공감이 가능한 가족영화에 가깝다.


형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부모님이 나보다 내 동생을 더 예뻐하진 않나?’

‘나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부모님 기대에 못 미친다고 나쁜 아들딸이 되어야 하지?’


나만 하는 생각이 아닐 것이다. 친구 부모님과 괜히 비교가 되고, 존경하지만 가끔 서러울 정도로 싸우고, 부모라는 이유로 노크도 없이 내 방에 들어오는 것마저 싫을 때가 있다. 난 왜 태어났을까 싶은 울적한 날이면 괜히 아프지 않아도 아프다고 아이처럼 엄살을 피우고 싶기도 하다. 케빈처럼.


부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부모이면서 태어난 사람들은 없다. 다들 이번 생에 처음 태어나 처음으로 아이를 갖고 함께 성장하면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 과정에서 처음 맞이한 아이에겐 때론 모질게도 혼을 내고,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 아이에게 과한 요구를 할 때도 있다. 어제보단 오늘 더 괜찮은 부모가 되고자 노력하면서 내 아이의 인생에 책임감을 가지고 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사회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잘 됐으면 하고 바란다. 에바처럼.


단지 케빈과 에바에게 필요했던 것은, 서로에게 바라는 점과 서운한 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나눈 대화일 뿐이었다. 만약 에바가 케빈에게 ‘너 대체 왜 그러니’라며 케빈이 조금이라도 어릴 때 물어봤더라면 케빈이 범죄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가 없었던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을 정도로 케빈을 듬뿍 사랑해줬더라면, 케빈의 사소한 나쁜 행동들을 ‘케빈은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아이’라고 단정 지어버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에바는 조금 더 빨리, 교도소가 아닌 안락한 집에서 케빈과 마주 앉아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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