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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y 21. 2019

2시간의 저세상 텐션과 10분의 현자타임 (스포주의)

[무비패스] 영화'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

이 글은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영화가 끝나고 곧장 왓챠를 켰다. 4점의 별점을 입력하고, 짧은 평을 남긴 뒤, 남들의 평을 구경했다. 그 중 뚱이에요님의 코멘트가 제일 눈이 갔다. ‘어찌보면 저세상 텐션.’ 이 한 문장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좋아요를 꾹 눌렀다.


이 영화가 그렇다. 이 세상 텐션이 아니다. 몹시도 괴상한 인물들이 이상한 짓만 골라해서 그야말로 줄거리 자체가 미쳐 보는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고 만다는 뜻이다.


오래된 고전작품 「돈키호테」는 17세기 스페인에서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에 빠지다 못해 정신 이상을 일으킨 한 남자가 자기 스스로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여 기사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 자체도 워낙 환상과 현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데, 이를 리메이크하고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오죽할까.


“난 라만차에서 온 돈키호테, 절대로 죽지 않는 사나이지. 잊혀진 기사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왔다!”


잘 나가는 CF 감독 토비는 돈키호테 내용을 각색한 광고 촬영을 위해 스페인의 외진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10년 전에 찍은 자신의 졸업작품이자 출세작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DVD를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스페인에 왔고, 더 실감나는 연기와 연출을 위해 모든 배역에 현지인을 섭외하며 정성을 쏟았더랬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 촬영했던 마을로 향했고, 그곳에서 당시 주인공 돈키호테를 맡았던 하비에르와 마주친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자신이 정말 돈키호테라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다시 만난 토비를 돈키호테의 충실한 종복인 산초라고 부르며 몹시도 반가워하고 있었다. CF 투자자의 아내와 바람이 난 탓에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토비는 결국 하비에르, 아니, 돈키호테와 함께 갑작스런 여정을 떠나게 된다.


토비가 처음 하비에르를 섭외할 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느 시골에나 있는 조그마한 구멍가게에 불도 켜지 않고 죽은 듯이 구두를 고치던 구두장이 하비에르는 토비가 설명하듯 ‘잊혀진 노인’에 불과했다. 늘 자기 앞에 세운 적에 불 같이 달려들며 당당하기만 한 돈키호테와는 이미지가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토비의 눈에 하비에르가 띈 이유는 그저 그의 얼굴이 ‘보험을 잘 팔 것만 같이’ 특이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평생 연기는커녕 영화에 관심도 없던 노인이 갑자기 영화 주인공을 잘 해낼 리가 없다.


역시나 하비에르는 어설프기만 하다. 칠팔십 평생 처음 잡아본 소품용 검으로 고작 마네킹도 쓰러뜨리지 못하고, 영어로 된 대사를 말하지도 못한다. 영화감독의 꿈을 이제 막 꽃 피우기 시작하며 열정을 불태우던 젊은 토비조차도 하비에르와 돈키호테, 자신의 영화를 포기하던 찰나였다.


어느 순간부터 하비에르의 얼굴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방패와 검을 든 두 팔도, 그런 그의 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도 점차 단단해졌다. 죽은 듯 살았던 과거 보란 듯이 점차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에 매혹되더니, 곧 그 자신이 돈키호테라고 믿었고, 그렇게 살게 됐다.


토비의 영화 때문에 달라진 건 하비에르뿐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순수한 매력에 빠진 토비가 “널 스타로 만들어 줄게”라며 약속한 안젤리카는 배우의 꿈을 꾸고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향한다. 그러나 도시의 문턱은 너무 높았고, 제대로 된 배우가 되지 못한 채 결국 엄청난 재력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재벌의 소유로 전락한다.


사랑스럽기만 했던 딸을 잃은 안젤리카의 아버지는 토비와 다시 만나 “네 영화를 찍고 많은 게 변했다”라고 말한다. 시골 특유의 정감가는 소란스러움과 구수한 냄새만이 가득했던 마을은 토비가 찍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촬영한 직후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이다. 아무리 하비에르가 자신을 돈키호테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장단 맞춰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토비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환상 속에 갇혀 살진 않았을 것이다.


하비에르가 검은 마법사의 던전이라고 믿고 있던 곳에서는 한 노인이 그를 가둬둔 채 토비의 영화를 주구장창 틀어주었고, 그가 집에서 나온 후엔 만나는 사람들마다 마치 17세기에 사는 사람들처럼 하비에르, 돈키호테를 반겼다. 17세기 사람처럼 행동하며 돈키호테를 영웅으로 추대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똑같이 옛날 기사복을 차려입고 말에 타 하비에르에게 목숨을 건 도전장을 내밀고, 아예 성 전체를 빌린 재벌은 국왕의 초대라며 하비에르를 돈키호테로서 성 안으로 들이기에 이른다.


제 3자의 입장인 관객조차 저 장면들이 단순히 하비에르의 망상인가, 아니면 정말로, 영화 「빅 피쉬」처럼 알고보니 모두 사실이었음이 밝혀지는 건가, 어느 쪽이 진실인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현실과 망상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장면들이 2시간 동안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무엇이 진짜인지를 판별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눈 앞의 거인이 진짜인지보단 그 거인에게 겁도 없이 달려들며 위험에 처한 여인을 구하겠다 외치는 하비에르의 모습에 빠져들고, 그가 산초라고 굳게 믿는 토비가 그를 바라보며 얼빠진 표정을 짓는 모습에 웃음 짓는다. 그 2시간 동안 미친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유쾌하고 재밌는 상황들을 함께 겪는다. 그리곤 항복.


토비이자 산초가 하비에르를 더 이상 진짜 이름이 아닌 ‘돈’이라고 부르게 되듯, 관객마저 하비에르를 용맹한 기사 돈키호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마지막 10분의 현자타임이 중요하다. 그렇게 유쾌하게 하비에르를 돈키호테로서 받아들였는데, 아차, 제목을 잊고 있었다. 이 영화의 제목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라는 것을. 왜 제목이 그 모양일까 의문이 드는 찰나에 밝혀진다. 그 장면은 하비에르를 돈키호테로서 초대한 사악한 재벌의 파티장에서 등장한다.


안젤리카를 소유한 재벌은 자신을 돈키호테라고 믿는 어리석은 늙은이 하비에르와, 자신의 소유물인 안젤리카와 정분이 났던 토비를 놀려먹고자 그들을 파티에 초대한다. 오직 그들만을 위한 파티였다. 돈키호테를 주인공으로 세운 공연이었지만 하비에르에겐 현실인 삶, 그런 하비에르의 진심을 아는 토비에겐 고통이 될 관람이었다.


진심을 다해 공연에 몰입하는 하비에르에 대고 사람들은 깔깔 비웃는다. 커다란 말 모형에서 혼신의 힘을 다 해 마법사를 무찌르고 저주 받은 공주를 구한 돈키호테에게 말이다. 차가운 조롱에 하비에르는 현실을 직시한 듯 다시 예전처럼, 토비의 영화에 섭외되기 전처럼 목소리와 온몸에 힘을 잃는다.


토비는 그런 그를 일으키고자 했다. 재벌에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하는 안젤리카를 구해내자는 명목으로 돈키호테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하며 토비의 제안을 거절했고, 토비는 홀로 안젤리카를 구하려다 성 안 구석 방 안에 갇힌다.


그 시각 안젤리카는 축제의 하이라이트, 낡은 의자들을 모아 불을 질러 하는 액땜에 제물이 된다. 사람들이 그녀를 묶어 불을 지르기 시작했고, 이 모습을 방에 갇혀 지켜보기만 했던 토비는 어떻게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때 방문 밖에서 한 사람이 토비를 향해 달려왔고, 자신을 방해하려는 사람인 줄 알았던 토비는 둔기로 그를 있는 힘껏 쳐버린다. 맥없이 맞은 그는 그대로 창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1층으로 내려간 토비는 안젤리카가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소품에서 내려오는 모습과 함께 추락한 사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헐떡거리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는 말했다.


“내 이름은 하비에르, 보험을 잘 팔 것 같이 특이하게 생긴, 잊혀진 노인…”


그렇게 하비에르는, 돈키호테는 죽었다.


영화와 영화 밖, 현실과 환상 그 어디쯤의 모호한 경계 속의 이야기


무엇이 현실일까? 미친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은 이 영화에서 통하지 않는다. 영화는 오직 단 한 가지만을 묻는다.


“산초? 정말 자넨가?”


토비를 정말로 산초라고 믿으며 묻는 하비에르의 이 질문은 이후 토비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하비에르가 죽고 재벌로부터 버림 받은 안젤리카와 함께 길을 떠나던 토비는 그녀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리곤 말한다. 자신이 돈키호테라고. 하비에르를 미친 사람으로만 바라보던 그의 눈 앞에 하비에르가 보던 돈키호테의 세상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불사의 사나이. 이것은 돈키호테의 성격이자 상징이다. 누군가는 그를 망상의 사나이라 말하고, 미친 자라고 말하며 무시할 테지만 돈키호테에겐 그의 망상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앞에 놓인 풍차를 무찔러야 할 식인거인으로 보더라도, 풍차를 단 집에 살아 귀가하는 여인을 제 발로 걸어가는 비련의 여인으로 보더라도 말이다. 위험을 무찌르기 위해 두려워 하지 않고 곧장 달려가 창을 들이대는 용기와 위험에 빠진 약자를 구하는 기사도 정신이 그의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 사이의 잊혀진 정과 예의, 약자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랑, 이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한 용기를 위해 스페인 라만차 마을의 흔한 신사는 스스로 기사 ‘돈키호테’가 되어 여정을 떠났다.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믿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망상이란 형태로 시간을 건너 결국엔 돈키호테라는 이름이 끊이지 않도록, 정말로 잊혀서 죽지 않게 지금까지 전해졌다.


하비에르든, 토비든, 아니면 오래된 고전작품 속 주인공이든. 그들이 진짜 돈키호테든, 세상에 식인거인이 있든, 그를 위협하는 검은 마법사가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내용이 진짜인지 아닌지 생각하며 보지 않지 않은가.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시골마을의 소리소문 없는 잊혀진 노인은 돈키호테란 이름으로 생명과 희망과 꿈을 찾았고, 돈도 많고 젊지만 자기 작품에 더 이상 예전만큼의 열정이 없었던 천재 감독은 새로운 자신을 찾아 여정을 떠났다. 이전의 삶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가 없다면, 의미 있는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건 그들의 자유일 뿐이다. 그것이 망상이라며, 진짜가 아닌 소품 투성이의 영화라며 비웃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 무례한 사람들에게 잊혀진 기사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돈키호테는 다시 태어나야 했을 것이다.


감독 테리 길리엄은 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25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 세월 속에 녹아든 연륜과 정성과 애정이 고스란히 영화 속에도 녹아 있다. 누군가가 세월을 바쳐 아깝지 않은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는 감동이 있었다. 그만큼 존경스럽고, 값진 영화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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