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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y 30. 2019

어서 와, 연극은 처음이지? 여긴 ‘어나더 컨트리’야

[무비패스] 연극 '어나더 컨트리(2019)’

이 글은 브런치 무비 패스에서 진행한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Jade : 어서 와, 연극은 처음이지? 여긴 ‘어나더 컨트리’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는 제목 그대로 연극이라는 새로운 세계로의 첫 발걸음이었다. 분명 연극은 언젠가 본 적은 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전이다. 연극의 ‘연’ 자도 낯선 연극 입문자로 ‘연알못(연극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연알못’의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연극 입문 동지들이 ‘어나더 컨트리’를 첫 연극으로 선택하기에 괜찮을까? 왕초보답게 연극의 핵심 요소인 희곡(스토리), 무대(연출), 배우에 맞춰 체크해보자.


‘어나더 컨트리’는 1930년대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고 권위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영국의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자유로운 영혼 가이 베넷과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토미 저드라는 두 청년의 이상과 좌절을 그린 연극이다. 줄리안 미첼이 썼으며 1981년 런던에서 초연되었고 1983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졌을 만큼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배우들이 말하는 어나더 컨트리가 궁금하다면▼

https://kakaotv.daum.net/v/397621783


연극 입문자에게 희곡(스토리)의 체크포인트는 단순했다. 스토리를 이해하기에 어려움은 없는가? 지루한가? 1930년대 영국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한가? 물론 토미 저드가 지지하는 마르크스주의나 당시 영국의 시대상황에 대해 자세한 지식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다행히도 공부하지 않고 봐도 연극을 이해할 수 있다. 연극의 대사들이 쌓여 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맥락이 명확하게 구축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나이가 10대로 설정되어 나오는 농담, 만담에 가까운 대사들도 극의 분위기가 쳐지거나 무겁지 않도록 돕는다. 부담감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면, 국가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젊은 청년들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고뇌와 선택은 지금 시대의 젊은이라면, 그리고 과거의 젊은 시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 중 한 사람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을 관통하는 세상의 변화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은 세월에 상관없는 불변의 질문이다. 아마 연극으로 그들을 만난다면 자연스레 시대적 배경도 궁금해진다. 


무대도 매력적이다. 영국의 학교 분위기를 잘 살린 배경이나 의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대의 창문은 열리고 닫히는 구조로 인물들이 배관통을 타고 오간다는 설정에 등장한다. 제한된 무대에서 야외와 실내의 구별이 분명해지고 공간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의상도 평소에 흔히 볼 수 없는 옷이라 한번 더 눈이 가고 신선했다. 극 중 원칙주의자이자 체벌을 맹목적으로 찬성하는 파울러는 주로 군인들이 입는 제복을 입고 등장했다. 그리고 크리켓 경기나 일반적인 교복에서도 가이 베넷은 옷을 허리에 묶거나 독특한 양말을 신는 등 자유로운 성격을 잘 드러냈다. 기숙사 점호 때 나온 그의 가운의 체크는 요즘 입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예뻐서 좌표가 궁금했다. 풍경과 의상이 주는 시각적인 새로움은 연극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이다.


배우를 빼고 연극에 대해 쓰는 건 ‘연알못’의 생각에도 얼음 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다. SNS를 보면 뮤지컬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여러 번 같은 공연을 보곤 한다. 같은 공연의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보려는 경우도 있었고 같은 배우라도 매번 공연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그만큼 연극에서는 배우마다 인물을 해석하고 연기하는 차이가 존재하고 배우의 연기가 연극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관람 당시엔 이동하 배우님(가이 베넷), 이충주 배우님(토미 저드)이 맡았다. (모든 배역은 사진을 참고해주세요.) 이동하 배우님의 가이 베넷은 자유로운 태도를 지니고 능청스러움을 유연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세상의 냉혹한 시선에 상처 받고 좌절한 가이 베넷의 절규를 봤을 때 소리에 놀라 움찔할 정도로 강약이 확실했다고 생각한다. 배우님에게서 세상이 원하는 대로 이뤄질 거라 믿었던, 아직 어리고 겁먹은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는 주인공만큼 주변 인물들의 성격이 구체적이고 비중도 상당하다. 따라서 연기도 어떤 배우가 뛰어나거나 무대를 장악한다는 느낌보다 배우들 간의 호흡을 중심으로 봤다. 전반적으로 조화롭고 이질감이 드는 배우는 없었다. 좌석이 1층 중간이고 눈이 좋지 않아 인물들을 세세한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클로즈업이 없이도 인물들의 감정은 충분히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가까이 보지 않아도 예뻤고, 오래 보지 않아도 사랑스러웠다. 다채로운 인물들이 나오는 만큼 마음속의 최애캐(가장 좋아하는 인물)를 뽑길 추천한다.


 사실 연극 ‘어나더 컨트리’에 대해 길고 긴 감상 대신 ‘연극 또 보고 싶다.’는 연알못이 할 수 있는 짧고 굵은 칭찬을 건네고 싶다. 여전히 연극은 미지의 ‘어나더 컨트리’이다. 그러나 잠시 스친 그곳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는 현재가 있었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커튼콜의 박수소리가 있었다. 더 궁금하고 또 만나고 싶은 세계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러니 취향이 아닐까 두려워 말고 ‘어나더 컨트리’를 통해 연극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 보자.


안은 : 젊은 이상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자유로울 권리를 찾아서


1930년대 영국, 상류층 자제들만 다니는 명문학교에 가이 베넷과 토미 저드가 있다.


가이는 자신이 학생회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엄격한 규칙과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문제아로 유명하다. 복장도, 시간 약속도,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학생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도 모두 무시한 채 마음대로 행동하기만 한다. 당연히 학생회에선 가이를 예의주시하며 언제고 체벌을 내릴 준비를 하지만 가이는 늘 그런 학생회를 비웃을 뿐이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당시 동성애가 엄격히 금지된 영국에서 가이는 동성애자였고, 가이와 동성애를 나눈 학생이 학생회 간부 몇몇을 포함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트집이 잡혀 체벌을 받더라도 사감에게 자신과 관계를 맺은 학생 명단을 일러바칠 거라고 협박하면 그만이었다. 공간도, 시스템도, 모두 폐쇄적이었던 기숙사에서 꽉 막힌 채 살아야 했던 혈기왕성한 학생들에게 자유분방하고 자신감 넘치는 가이의 유혹은 성욕을 해소함과 동시에 어릴 때의 장난일 뿐이라는 안도감 때문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도 “다들 내게 넘어오게 돼있어”라고 말하는 가이에게 유일하게 넘어가지 않았던 토미는 가이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한 마디로 꽉 막힌 범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본론 책을 몸의 일부처럼 지니고 다니는 토미는 공산주의를 옹호하며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와 권력, 계급중심 사회의 부조리를 부정한다. 그의 눈에 공산주의는 신념도, 재산도, 계급도, 그 어떤 것에 있어 평등할 수 있는 세상의 이념으로 비춰져 있는 것이다.


토미에겐 영국의 대표 스포츠인 크리켓도 노동자들이 일하는 와중에 향락을 즐기는 부루주아만의 유희였고,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위한 추모곡을 부르는 것도 나라의 안위가 아닌 자신의 계급을 위해 싸우다 죽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학교의 강요일 뿐이었다. 그런 토미에게 가이는 꽉 막힌 공산주의자라고 비웃고, 그런 가이에게 토미는 권력체계에 속하려는 한심한 놈이라고 말한다.


그런 둘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동성애자인 가이도, 공산주의자인 토미도 그 시대의 그 공간에선 섞일 수 없는 아웃사이더다. 서로가 바라는 것이 너무도 명확하지만 그들의 성향과 신념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웃음거리가 되고, 때로는 체벌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다. 모두가 그들을 꽉 막힌 이상주의자와 한심한 낭만주의자라고만 생각할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성향과 신념을 무시하지 않았다. 가이는 토미가 옹호하는 공산주의를 귀담아듣지 않을지언정 비웃지도, 부정하지도 않았고, 토미도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인 가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서로는 알았던 것이다. 가이도 토미도,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껏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눌 자유와 모두가 동등한 선 위에서 평등하게 살 자유를 바랄 뿐이었다. 자유롭게 살 권리를, 누구의 왈가왈부 없이 스스로의 삶을 자신만의 방향으로 살 권리를 추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선배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느라 상처받고 우는 후배에게 토미는 말한다. “누가 너에게 함부로 대한다면 당신들은 내게 함부로 할 권리가 없다고 외쳐!” 이것은 가이와 토미,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청년들의 외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꿈과 이상과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하코트라는 남학생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가이는 몇 차례 밀회를 즐기며 사랑을 키웠지만, 가이를 예의주시하던 학생회에게 그들의 동성애를 들켜버려 걸국 가이는 체벌을 받고 만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기숙사장이 되어 졸업하게 되면 프랑스 대사관이 될 거라고 말하던 그의 꿈은 이 사건으로 인해 기숙사장 후보에서 박탈됨으로써 져버리게 됐다.


가이는 말한다. “날 체벌한 학생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내 본성을 숨겨가며 살 수 없어. 나 같은 사람이 사회의 수치가 아닐 수 있는 세상이 있나, 그게 지상 낙원이진 않을까?” 이에 토미는 답한다. “아니, 그냥 지상이야. 이곳과 다른 지상.”


무엇이 아이들을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이 아이들의 성향과 사상을 비웃었을까?

이 아이들의 성향과 사상을 비웃을 권리를 그 누가 갖고 있을까?


작품의 도입부에서 마티노란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이 나온다. 동성애 행위를 나누는 모습을 사감에게 들켜 교장에게 불렸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성향이 동성애자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마저 동성애자인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티노를 두고 학교에선 쉬쉬하며 학교 밖으로 이야기가 새나가지 않기에만 바빴고, 학생들이 믿고 의지해야 하는 학생회조차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마티노의 죽음을 동성애를 들켰으니 당연하게만 생각했고, 남 일 취급하며 외면했다.


마티노의 죽음은 상징이다. 여자든 남자든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기독교 규율에 어긋난다며 박탈당하고, 스스로의 본성 전부를 부정당한 이는 좌절할 수밖에 없단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가이는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스파이가 됐다. 토미가 말한 평등한 세상에서 자신의 본성을 숨기지 않고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의 단 한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받기에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이 있고, 사상이 있기에 지켜야만 하는 신념이 있다. 그 성향을, 사상을 따르고 믿을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을진데, 너무나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프다. 그리고 지금도 이때와 다르지 않아서 가슴이 아픈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좋았던 관객이라면 꼭 1984년 제작된 영화 「어나더 컨트리」를 봤으면 좋겠다. 연극이다보니 개별적인 컷을 나눌 수가 없어 인물 각각의 캐릭터를 집중해서 조명하는데 무리가 있고, 시공간의 제약이 있어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연극은 영화보다 등장하는 인물이 적고 설명식 대사가 많다.

그러니 이 연극을 보고 캐릭터와 배경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가진 관객이 있다면 영화를 꼭 추천한다. 연극을 봤을 때는 잘 몰랐던 가이와 토미의 우정이나, 기숙사 내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특히 아이들의 살벌한 권력 다툼 등을 영화에선 조금 더 쉽고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맙소사, 콜린 퍼스의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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