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de in x Jun 28. 2019

서랍 속 필름카메라와 함께 여행을 떠나면 어때요?

[에세이] 자동 필름 카메라와 함께한 2월 대만 타이중 여행

꼬꼬마 시절을 찍어주던 필름 카메라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예전에는 늘 부모님께서 사진을 찍어 주셔서 렌즈를 보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는데, 이젠 다른 나라를 필름 카메라의 프레임에 담을 만큼 자랐다. 부모님은 오빠와 나에게 많은 걸 주셨지만, 귀중한 자산 중 하나는 어린 시절 사진이다. 굳이 특별한 순간만 찍은 건 아니다. 매일 누워있기만 했던 갓난아기부터 무조건 족발의 가장 큰 뼈다귀를 들고 다니던 욕심쟁이 유치원생의 모습까지 시간 순서대로 앨범에 정리되어있다. 넘길수록 신기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가족들과 앨범을 두고 둘러앉아 하하호호 이야기꽃을 피우도록 도와준다.


어느 순간 모든 정보가 디지털로 바뀌었고 DSLR, 미러리스 카메라, 심지어는 휴대전화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편리한 디지털 시대에 한동안 필름 카메라는 어느 집의 창고로, 서랍장 깊은 곳으로 먼지가 쌓인 채 과거 주인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다.


유행은 돌고 돌아 ‘뉴트로’라는 말이 대세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인스타그램에 하나둘씩 필름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필름이 표현할 수 있는 감성과 젊은 감각이 만난 사진들은 매력적이었다.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만만치 않은 필름의 가격도 고민이고 괜한 귀찮음이 발동해 스캔이나 인화를 맡기는 과정이 손이 많이 간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손쉽게 찍고 확인하며 지울 수 있는 핸드폰 카메라의 편리함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에 차일피일 미루었다. 거의 1년 가까이 미루다가 친구와 함께 가는 대만 여행에서 재밌는 사진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귀찮음을 넘어섰다. 드디어 우리 집 필름 카메라도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필름 4 롤을 채워서 스캔을 맡기겠다는 고집으로 4개월이 흘렀다. ‘혹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은 기간 동안 고장 나서 초점 없는 사진이 나오지 않았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사진을 확인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후 확인할 수 없고 여행에 가져갔던 필름을 수개월 동안 방치했더니 사진 속 풍경이 낯설었다. 분명 대만이고 갔던 곳이며 직접 찍은 사진인데 생경했다. '여기가 어디지?' 라며 기억을 더듬다가 '아! 맞다! 거기!' 라며 잊고 있던 대만의 추억을 머릿속으로 소환했다.


특히 첫 필름은 필름 카메라를 취미로 하는 친구가 입문자인 나에게 선물해준 유통기간이 지난 오래된 필름이었다. 첫 필름으로 찍힌 대부분의 사진은 강한 초록색 필터를 덧씌운 색감이었다. 마침 첫 사진이 처음 보는 이상한 돌하르방 사진이라 당황했다. 어두운 초록빛의 사진을 여러 장 넘기자 상상했던 필름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다. 2월의 한국은 추운 겨울인 반면 타이중은 따뜻해서 여행 당시 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본 꽃이 반가워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수개월이 지나 다시 떠올린 연분홍색 꽃나무와 하늘색 하늘이 청량했던 기억은 필름 사진의 색감처럼 아련하고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같은 풍경의 마지막 사진은 스캔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사라졌다. 


빵가게 앞에서 소보로빵모자를 쓴 모아이석상입니다.


요란했던 첫 필름의 여파로 인해 다음 필름은 대체적으로 무난했다. 다음 필름은 타이중 여행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무지개 마을, 고미 습지, 흔들린 야시장 사진이었다. 필름 카메라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지개 마을은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건물이 있는 장소로 주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남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건물에 빼곡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광차로 오는데 필름 카메라로 보니 사람이 찍힌 사진도 거의 없고 지붕이나 창문을 찍어 한적하게 보였다. 불과 수개월 사이에 사진 속에서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었다.



고미 습지는 ‘대만의 우유니 사막’으로 불린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처럼 물이 고인 부분과 하늘이 대칭을 이뤄 장관을 이룬다고 생긴 별명이다. 여행 날엔 우유니 사막처럼 대칭된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주황빛의 노을은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실루엣으로 보이는 노을 사진엔 빛바랜 기억만큼 전체적으로 노이즈가 덮여 있었다. 



세 장소는 같은 날 소화한 일정이었다. 하루 종일 더운 날씨에 돌아다녀 힘들었는지 야시장에서 찍은 사진은 두 장의 풍경사진이 전부였다. 그조차 밤에 찍어 모두 흔들렸다. 핸드폰으로 찍었다면 잘못 찍었다며 지울 사진인데 흔들린 느낌도 나쁘지 않고 되려 매력적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의 순간과 닮았다.



타이중을 찾는 여행객의 대부분은 유명한 근교 도시를 여행하러 떠난다. 친구와 상의 끝에 정한 근교 도시는 르웨탄 호수와 루강이었다. 르웨탄은 한자로 일월담이라 불리는데, 태양과 달이 만난 호수라는 뜻이다. 근처에 9개의 민족이 모인 구족문화촌을 구경하거나 보트, 투어 버스 등 즐길거리가 꽤 다양하다. 


당일치기 일정이라서 보트를 타고 현광사를 둘러보고 CNN에 선정된 자전거길에서 자전거를 타기로 가볍게 계획했었다. 대만 가기 전 처음 자전거를 배운 나로서 르웨탄을 떠올리면 치열하게 완주를 목표로 자전거를 탄 기억만 남아있었다. 자전거 타기 전에만 힘이 있었는지 필름 사진에도 현광사를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에 찍은 호수의 전경만 있었다. 자전거 이후의 호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래도 호수 사진은 깨끗한 에매랄드 색으로 나와 맘에 들었고,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은 채도가 거의 없고 산의 원근감 때문에 먹으로 농도 조절을 하며 그린 한 폭의 수목화 같았다. 자전거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잊고 있던 르웨탄이 생각났다. 날씨가 유난히 쨍했고 호수와 하늘은 파랗고 청량했었다. 머리는 장소의 가장 강렬한 경험만 기억했지만 필름 카메라는 놓치기엔 아까운 아름다웠던 순간을 담고 있었다. 



루강이라는 소도시는 전통적인 모습을 선호하는 여행 취향에 잘 맞았다. 특히 필름 카메라 감성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오래된 역사를 지닌 명소와 거리는 타이중 번화가의 고층건물이나 고미 습지, 르웨탄에서 본 자연과 사뭇 달랐다. 마조신을 모시는 천후궁에 도착하자 때마침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고 거대한 탈을 쓴 사람들과 터지는 폭죽으로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었다. 여기가 번져 올라가는 향과 색색의 등과 의식을 위해 사용된 거대한 인형탈이 찍힌 사진을 보자 기억이 향처럼 피어났다. 작은 마차에 신을 형상화한 인형이 올려져 있었다. 인형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 마차 안을 봐야 했다. 함부로 봐도 되는지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관계자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보라고 안내해주며 마조신이라며 소개했다. 의식에 사용되는 중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은 거대한 인형탈 뒤로 마지막에 주인공처럼 마차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천후궁의 필름 사진은 신을 모시는 장소라는 무게감과 신비로움을 눈보다 잘 담아냈다. 



여행에서 가까운 거리는 주로 걸어서 이동하는 편이기도 하고 루강이 크지 않아 충분히 걸으면서 둘러볼 수 있었다. 가슴이 닿을 정도로 좁은 골목이라는 모루샹을 가기 위해 발이 가는 대로 걷다가 카페를 만났다. 창고 같은 건물을 세련되게 꾸민 인테리어와 다양한 음료와 음식메뉴까지 준비된 모습이 신선했다. 루강의 이미지와 다르면서도 절묘하게 어울려서 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걷다가 우연히 맘에 쏙 드는 카페를 만났던 기쁨이 떠올랐다. 


카페에서 다시 걸음을 옮겨 도교사원인 용산사로 향했다. 분명 갈색이었을 목조건물은 세월의 흔적으로 하얗게 바래 있었다. 붉은 등이 기품을 더하던 오래된 사원 입구를 마지막으로 대만 여행 사진이 끝났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하며 조금 번거롭게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스캔된 사진을 보니 편리한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대신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정된 수의 필름 카메라는 당시의 내가 무엇을 봤고 어떤 부분이 소중했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부모님께 왜 앨범에는 풍경만 찍은 사진이 별로 없는지 여쭤본 적이 있었다. 아빠는 지금처럼 사진을 마음대로 찍고 지울 수 없어서 소중하게 필름을 아껴 사람 위주로 찍었다고 답하셨다. 


여행에서 필름 카메라를 들며 다시금 깨달았다. 부모님은 단순히 사진으로 어린 시절 모습을 기록한 게 아니라 지나가버릴 그 순간의 추억과 함께한 소중한 사람을 담았다는 사실을. 


화보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필름 카메라로 찍은 여행 사진엔 친구의 모습이 제일 많았다. 어느 장소이든 친구의 자연스러운 표정과 미소가 담겨있었다. 행복했던 여행의 순간을 프레임 속에 붙잡고 함께한 소중한 친구의 얼굴을 새겼다. 그때의 추억이 사진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거기에 필름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아련한 색감을 덧대니 고작 사진 한 장이 정성스러웠다. 앞으로 조금 귀찮고 번거로워도 필름 카메라로 여행을 담도록 노력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