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셋이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이름은 ‘졸업생은 없는 졸업여행’이다. 모순 가득한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린 대학교 같은 과에서 만났다. 입학하던 순간부터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영상 동아리를 같이 하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넘치고 아끼며 건강을 걱정해주는 다정한 사이다. 그런 사이라도 여행을 같이 가 본 적은 없었다. 영상 동아리에서 함께 셀 수 없는 밤을 새웠고 한 친구의 자취방에서 다 같이 야식으로 치킨을 먹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 사이라도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를 해보지 않았다. 한 명이 대학교를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아리에서 순수하게 영상을 만들던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졸업할 나이가 되었다. 이번 1학기를 끝으로 친구는 개인적인 이유로 대학교를 졸업 대신 수료한다. 다른 친구는 현재 휴학한 상태로 다음 학기에 교환학생을 떠난다. 그리고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은 다 해보고 졸업하자는 생각으로 한 학기 더 휴학하기로 결정했다. 우린 인생 선배님들이 이야기하시는 “요즘 애들은 왜 졸업을 안 하는지 모르겠네. 빨리빨리 졸업하고 취직이나 하지 말이야.”의 요즘 애들을 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생활하던 학교에서 멀어져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가까운 곳이라도 놀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셋 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갈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졸업생은 없는 졸업여행’이 틀리지 않은 이유이다.
여행 준비는 거의 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빴고, 두 번째로 여행한 두 친구가 여행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 편이 아니었다. 세 번째로 오랜만에 셋이 뭉쳐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에 들떠서 뭐든 좋았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강원도를 제안했다. 속전속결로 통과되어서 다음부터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목적지는 강릉, 교통수단은 기차로 정했다. 여유로운 그들 덕에 덩달아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기다릴 수 있었다. 대략적으로 가고 싶은 명소를 뽑고 우리만의 추상적인 여행 목표를 세웠다.
옷을 맞춰 입고 사진을 많이 찍자!
(어딘지 모르지만) 맛있는 거 먹고 (검색은 안 했지만) 예쁜 카페도 가자!
경포대에서 자전거를 타자!
밤에 야식도 먹으면서 이야기 많이 하자!
돌아올 때 기차
귀여운 목표를 정한 우리를 태운 강릉행 열차가 출발했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의 나이가 된 취준생 3명의 대화를 나눴다. ‘누구는 어디에 취업했다더라.’, ‘또 다른 누구는 무얼 준비한다더라.’, ‘인턴도 하기 쉽지 않다.’, ‘도대체 앞으로 뭘 해야 할까?’ 등등 적당히 우울해지고 여전히 남 일이라고 믿고 싶은 말이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우리와 다르게 기차는 강릉을 향해 빠르게 달렸고 서울에서 멀어지는 거리만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뜨렸다. 어느 순간 셀카 어플로 사진을 찍거나 친구는 챙겨 온 종이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완벽한 여행이었다. 어떤 순간도 완벽하다고 느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유유자적한 태도는 여행 중에도 변함이 없었다. 모든 게 좋았다. 택시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갔던 순두부집은 마침 브레이크 타임이었으나 기다리면서 순두부 집 옆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순두부 젤라또와 아로니아 소르베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브레이크 타임 후 먹은 해물짬뽕순두부는 맛있어서 신이 났다. 배가 부른 상태로 패기 넘치게 경포호수로 걸어가는 도중 길을 헤매서 돌아갔다. 덕분에 강릉의 명소인 강문 해변도 지나고 경포해변도 지나며 사진을 찍었으니 즐거웠다. 많이 걸어도 괜찮았다. 결국 해가 뉘엿뉘엿 해질 때가 되어서야 경포호수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의 모든 선택은 경포호수에서 자전거를 타며 가장 완벽한 일몰을 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경포호수의 일몰은 주황, 분홍, 노랑이 어우러져 하늘을 가득 물들였고 하늘이 호수에 비쳐 물 역시 은은한 노을의 색으로 번졌다. 하늘과 대비되게 나무와 산은 검은색에 가깝게 어두워졌다. 하늘과 호수의 경계가 오히려 분명해져 노을이 그은 선을 기준으로 세상의 두 개로 쪼개진 듯했다. 달리는 자전거 페달과 함께 점점 짙어졌던 노을은 어느 순간 밤의 어둠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 경포 호수의 가로등엔 하나둘씩 불이 켜졌고, 분명 자전거 대여점에 갈 때까지 호수 주위의 많은 자전거는 우리가 호수를 반 바퀴 돌았을 즈음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만났던 강릉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되면 걸어 다니고 걷기에 무리가 있는 거리는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들은 관광객이 많이 오기 때문인지 모두 말씀을 잘하셨다. 강릉의 역사와 추천 명소를 알려주셨다. 특히 올림픽 경기장을 지나며 소개해주거나 6월에 열리는 강릉 단오제에 사람이 많겠다는 말에 “올림픽도 했는 걸 뭐.”라고 웃으시는 모습에서 평창 올림픽을 무사히 마친 강릉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야시장은 닭강정 가게들이 주를 이뤘는데 가게에서 일하는 베트남 아주머니는 연신 옷을 똑같이 입은 우리에게 예쁘다며 칭찬해주시고 우리의 옷보다 더 예쁜 미소를 보이셨다. 5월의 강릉은 보는 즐거움도, 사람도 완벽한 도시였다.
우리의 모습은 어기를 가든지 눈에 띄었다. 옷을 맞춰 입기로 정한 후 한 친구가 꿈을 꾸었다. 우리가 노란 실로 박음질된 연청 멜빵 반바지를 입고 여행을 하는 꿈이었다. 예지몽이라며 비슷한 의상으로 찾다가 검은색의 긴 멜빵바지에 각자 색이 다른 티셔츠를 입었다. 첫날엔 머리도 똑같이 양갈레로 땋아 세 쌍둥이처럼 보였다. 셋이 찍은 사진을 자세히 보면 우연히 뒤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찍혔는데 우릴 쳐다보고 있는 경우가 여러 장 있었다. 게다가 흥분해서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니 다른 사람들 눈엔 신기했을지 모르겠다. 허나 여태까지 못 해본 일을 이제라도 함께 해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유치해도 셋이 뭉치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여행 내내 자지러지게 웃었다. 진지한 미래 고민도, 막막한 취업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농담에 농담을 이으며 웃었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숙소에서 팩을 하다가 마사지를 하고, 갑자기 야밤에 스트레칭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찍은 사진을 보며 웃긴 표정과 자세를 확대하며 또 웃고 서로의 프로필 사진을 신중하게 골랐다. 그날따라 평소에 챙겨보지 않는 TV 프로그램도 유독 재미있었다.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은 모든 고민과 걱정을 뒤로하고 환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모든 걸 완벽하게 만든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서 피곤했는지 셋 다 잠이 들었고 그 사이 기차는 우리를 다시 현실로 돌려놨다. 월요일이 되면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학교를 가고 출근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난 편도선이 부어 침을 삼키지 못할 정도로 심한 감기에 걸렸다. 짧지만 강렬한 졸업여행은 끝이 났다. 이번 여행을 마지막 졸업여행이라며 아쉬워하는 나에게 친구가 장난스레 했던 말이 기억에 난다.
“한 사람씩 졸업할 때마다 축하해주는 의미로 떠나면 되지!”
‘졸업생 없는 졸업여행’ 대신 ‘졸업을 축하하는 여행’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다. 친구의 말 대로 어디를 가든, 뭘 하든, 언제든 좋으니 셋이 함께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길 바란다. 완벽했던 우리의 5월 강릉 졸업여행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