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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y 16. 2019

아무도 안 물어본 여행기를 1년이나 썼어요?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에필로그

잘 지냈어요? 저를 기억하나요? 산티아고 순례길로 여행을 떠나기 전, 당신에게 편지를 남겼어요. 혼자 떠나는 여행에 겁먹었던 과거가 무색해질 정도로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말했었는데.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보따리도 함께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났어요. 순례자치고 아주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세계일주를 할 계획도 없고 학교를 그만두지도 않았어요. 떠나기 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입니다. 순례길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주부터 가기 전 일했던 만화카페에서 다시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지금은 학교에서 연결해준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중입니다. 어떤 친구는 순례자가 돌아와서 하는 일이 인턴이라니 저보다 더 아쉬워했지만, 지금의 상황에 만족해요.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과 편안한 마음,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요.


6개월 동안 거의 매주 당신에게 순례길 이야기를 전했어요 아팠던 순간, 행복했던 추억, 다정했던 친구들을 설명하니 시간이 훌쩍 지났어요. 여행을 결심하던 순간이 벌써 1년 하고 3개월 전이네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보낸 11편의 이야기와 한국으로 돌아와서 쓴 23편의 여행기를 합쳐, 당신과 34번 만났어요. 그 사이 작고 철없던 23살은 키 대신 마음만 1cm 자란 24살이 되었습니다. 이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오래 적었을까요? 일 년이 넘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포르투갈 리스본 (Lisbon)
포르투갈 포르투 (Porto)
포르투갈 포르투 (Porto)

종종 악몽을 꾸곤 했어요. 원래 꿈 자체를 자주 꾸지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꿈을 꾸는 날엔 대부분 무서운 꿈이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깨어나서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흉기를 든 채 쫓아와 미친 듯이 달렸어요. 또 다른 날은 꿈속의 제가 눈을 뜨면 낯선 사람이 절 치려고 지금 자는 방으로 찾아온 적도 있어요.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수업 교수님이 다가와 목을 조르기도 했죠. 실제로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었어요.


휴학 전엔 악몽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친구들과 꿈 이야기를 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악몽에 대해 말했어요. 갑자기 마음 착한 친구가 울기 시작했어요.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는데 얼마나 힘들면 그런 꿈을 꾸냐고 말하더군요. 오히려 제가 더 당황했어요. 늘 괜찮다고 참고 버티느라 자신의 마음이 정말 아프지 않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이미 알면서도 모른 채 숨겼을지도 모르지만.


휴학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더 이상 학교 문제로 골치 아플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하고, 여행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차근차근 돈을 벌고 있으니 저절로 모든 게 나아질 거라 확신했어요.


맹목적인 믿음이 무색하게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어요. 평소 일하는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사람이 살해당했어요. 범인이 현장을 처음 목격한 저를 보고 집으로 찾아와 독약을 먹이려고 했어요. 가까스로 도망쳤고 살았어요. 범인은 아주머니였는데 그분의 아들이 나타나 독약을 아주머니께 먹였어요. 잠에서 깨어나서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만큼 지친 상태라는 것과, 내면의 상처는 흘러가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어요.



어쩌면 1년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 대신 불안을 여행한 글을 적었나 싶어요. 처음 글을 쓸 당시의 저는 과거 상처에 직면하기 무섭고 두려웠으며, 현재는 지치고, 미래는 무너진 동굴 안처럼 막막하고 답답했어요. 혼란스러웠어요. 왜 힘든지, 어디가 아픈지, 대체 무엇이 끝없는 불안을 만드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거든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해야 했어요. 스스로의 목소리로 묻고 대답을 듣기로 마음을 정했어요.



끝없는 질문의 길은 어려웠어요. 세 번째 글까지 쓰는 내내 펑펑 울었어요. 제대로 마주친 제 모습이 너무 불쌍하고 그동안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눈물이 쏟아졌어요. 순례길을 출발하기 전날 밤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적었어요. 용기 없는 저를 토닥거렸어요.


제가 어둡고 우울해 보이나요? 누구나 어두운 상처 하나씩 안고 살아요. 원래부터 어두운 사람이 아니라 가장 어두운 모습을 마주하고 당신에게 보여줄 만큼 솔직했어요. 상처는 숨길수록 곪아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큰 흉터를 남겨요. 솔직해야만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흉터가 남지 않도록 반창고를 붙일 수 있어요.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걷기로 몸이 고돼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때의 감정과 나에 대해 제대로 느끼려고 노력했어요. 어떤 날은 외로웠고, 어떤 날은 따뜻했고, 어떤 날은 꿈 같아서 깨지 않길 바랐으며, 또 어떤 날은 순례길이라는 현실이 와 닿아서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위해 선택하고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건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온 현실은 여전히 냉혹해요. 대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토익을 공부해야 하고, 취업에 울고 웃는 취준생에 불과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룬 게 별로 없어요. 인턴으로 출퇴근할 때마다 버스와 지하철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 치이고 부족한 잠 때문에 늘 꾸벅꾸벅 졸아요. 사회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넘치고 때론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아요. 순례길에서 돌아온 6개월 동안 화나는 일이나 지치는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치열했던 물음표 끝에 힘든 순간을 겪어도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아요. 불안으로 밤새 뒤척이는 일도 없고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요. 이제야 제대로 스스로를 직면할 용기가 생겼고 어떤 상황에서도 제가 가진 힘을 믿어요. 아껴주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어요. 이 정도면 1년 넘는 시간 동안 여행을 떠나고 글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에게 여행은 순례길을 걷던 순간만이 아니라 여행을 결심하던 순간부터 모든 시간이 여행이었어요. 그러니 질문이 멈추지 않는 한 여행은 끝나지 않아요. 앞으로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려 합니다.


보고 싶었던 당신,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의 여행은 시작되었나요?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나요?

이 글로 인해 오늘은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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