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전 : 낯선 리스본과 낯선 사람들
인천 공항에서 출발한 지 25시간 만에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는 거의 완벽했다. 출발 전부터 순례길에 대한 정보와 필요한 각종 준비물을 챙겼다. 반팔부터 경량 패딩까지 챙겨 날씨 변화에 대비했고 비상약, 발목보호대, 심지어 순례길을 걸으며 글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블루투스 키보드까지 챙겼다. 하지만 리스본에 도착한 순간 완벽이란 없음을 직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잊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몰랐다는 헛소리가 아니다. 처음으로 유럽이란 대륙에 왔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했다. 포르투갈어로 인사는 어떻게 하고 스페인에서는 주로 어떤 음식을 먹을까? 포르투갈은 비행기로 25시간이 걸린 만큼 멀고 우리나라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3일 정도 리스본을 여유롭게 관광하며 순례길을 준비하길 꿈꿨는데 '낯선 유럽에 적응하기'라는 미션이 생겼다.
특히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하는 과정이 낯설었다. 저녁 8시쯤 리스본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밥을 먹으러 갔다. 테이블이 몇 개 없고 작지만 따듯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손님들은 모두 친구, 가족, 연인과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메뉴판을 봤는데 영어도 아니고 전부 포르투갈어였다. 하나도 알아볼 수 없어서 종업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주문했다. 음식은 예쁘고 맛있었다. 단지 음식에 대해 함께 말할 사람이 없어서 묵묵히 밥을 먹는데 괜스레 외로웠다. 친절한 종업원이 혼자 온 나에게 음식의 맛이나 요구사항이 있는지 질문했지만, 그 마저도 부담스러웠다. 약간의 긴장과 부러움을 느끼며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종업원이 메뉴판을 다시 주며 디저트를 먹겠냐고 물었다. 안 먹겠다고 하니 이번에는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안 마시겠다는 대답에 종업원이 당황했다. 일반적으로 유럽 사람들은 식당에서 에피타이저(스타터) – 메인 요리 – 디저트(혹은 커피) 순으로 식사를 한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디저트나 커피까지 식당에서 먹는지 몰랐다. 그때는 종업원과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계산도 힘들었다. 포르투갈에 팁 문화가 있는지 찾아보려고 급하게 인터넷을 검색했다. 유럽의 식당 예절에 대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팁 문화가 없었다. 그리고 먼저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하거나 계산서를 달라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직원과 눈을 마주치며 기다리라고 했다. 종업원과 열심히 눈을 마주치며 기다렸다. 그가 다 먹었냐는 질문과 함께 접시를 가져갔다. 그 뒤로 계산서를 주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웃는 시간이 이어졌다. 밥을 먹은 지 30분이 지났고 식당에 손님도 거의 없었다. 제발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예의를 무릅쓰고 계산을 해달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친절하게 웃으며 계산서를 줬다. 지금 생각하니 손님이 말해야 계산해주는 것 같았다. 서로 계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 한 끼 먹는데 진이 다 빠졌다.
다음날도 비슷했다. 스타벅스 직원은 영어로 말하는 주문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이름도 잘못 적혀 있었다. 그래도 혼자 꾸역꾸역 리스본을 돌아다녔다. 해가 질 시간을 맞춰 상조르제 성에 일몰과 야경을 보러 갔다. 숙소에서 만난 언니가 혼자 걸어서 다녀왔길래 똑같이 했다가 길을 잃었다. 중간에 관광객이 없는 이상한 골목길을 지났고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데 무서웠다. 시선을 피하며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이미 숙소로 돌아가기엔 헤맨 시간이 아까워서 관광객이 많은 길을 찾아 올라가며 생각했다.
‘그냥 집에 있을 걸.’
괜히 먼 곳까지 와서 겁 먹은 처지라니. 포르투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순례길을 걸으려니 막막했고 준비성이 부족한 스스로를 원망했다. 성에 도착하고 눈에 봬는 게 없었고 머릿속에는 절대 해가 지고 혼자 내려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아까 지난 골목길의 공포와 안전에 대한 절박함이 누구든 붙잡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바로 앞에 서있는 한국분께 말을 걸었다.
“죄송한데, 야경 보러 오신 거면 같이 보면 안 될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셨지만, 감사하게도 허락하셨다. 그제야 마음 편히 일몰을 보고 리스본의 야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빼곡히 자리한 빨간 지붕과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노을에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해와 함께 사라진 빛 대신 주황색의 가로등이 거리를 비췄다. 푸른 바다와 은은하게 빛나는 거리는 낭만이 흘러넘쳤다.
야경을 보고 외롭지 않게 저녁도 함께 먹었다. 두 분은 휴가를 온 회사원이셨다. 인생에서 지금 휴학한 1년이 전혀 문제가 아니며 20대에 떠나는 여행이 잊지 못할 값진 시간이 된다는 이야기에 여행에 대한 확신이 다시 생겼다. 리스본의 밤바다와 광장에서 열리는 풋살 대회까지 보고 나서야 숙소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 리스본의 밤공기는 무척 따뜻했다.
한인 민박에서도 좋은 인연을 만났다. 함께 스타벅스에 커피를 마시러 갔던 언니들은 자신들의 여행은 끝이라며 다양한 조미료와 인스턴트커피, 라면을 주셨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던 일요일에도 라면이 있어서 굶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날 밤, 무사히 여행을 마치길 바라며 같은 방을 사용한 언니들과 조촐한 파티도 했다. 광대가 아플 만큼 많이 웃었다.
리스본은 아름답고 가파른 언덕과 골목들이 매력적인 도시였다. 다만 낯선 곳에 와서 잔뜩 긴장한 마음이 아름다운 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적응하기 힘들었던 여행의 시작에서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은 오히려 큰 힘이 되었다. 여행에서 받은 호의는 평소보다 더 크고 강한 여운을 남긴다. 그들 덕분에 리스본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고 씩씩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도 기초적인 단계부터 조금씩 공부했고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색하게 느껴지던 유럽의 문화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어리숙한 시작에 용기를 준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