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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Jan 24. 2020

이세계 문법 읽기

이야기를 통해 영웅을 배우고 영웅을 통해 삶을 배운다.

이세계는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이세계의 xxx'이라는 글이 자주 보인다.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기 소재가 요즘 유행이기 때문이다. '이세계'라고 표현하면 서브컬처에 한정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압도적인 비대칭 정보를 가진 존재와 아닌 존재의 소통"이라 표현할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위기를 막는 사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사람' 정보를 많이 가졌다는 건 물리적인 능력을 동반한 초능력은 아니지만 영웅적 행위의 근간이 되어준다. 어느 누구나 타인과 비교해 자신만의 독특한 도메인을 가지고 있다. 정리하면 이세계는 뭔가를 좀 더 아는 사실만으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이야기이다.


해리포터

기존 영웅이야기의 한계점

 한동안 해리포터나 타입문으로 대표되는 도시 전기물 (현실에서 정체를 숨기고 사는 이능력자)라는 소재는 초능력이란 비현실성을 우리의 일상 속에 녹여내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일단 초능력이 나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리고 능력이 있으면 그에따라 위계가 따라온다. 누구보다는 누가 더 쎼고 그것보다는 누가 더쎄다. 나루토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끝까지가면 결국 부모 잘 만나서 센것 아닌가. 영웅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서는 안된다. 이런 우를 범한 해리포터 작가는 처음에 해리포터를 돋보이게 하기위해 엑스트라로 기용했던 네빌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후반부에 지리멸멸한 이야기를 썼어야 했고 나중에는 구설수를 오를 만큼 소설속 등장인물들의 설정을 바꾸면서 자신의 작품을 부정해야 했다. 

 능력에 따른 위계는 흥미롭지만 위계 중심의 이야기는 위태롭다. 소셜가챠 게임에서 만들어놓고 쓰지도 않는 쓰레기 캐릭터들을 보라. P2W 게임회사들은 능력위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것이 게임성에 악영향을 미치는것을 알면서도 당장 확실한 돈을 벌기위해 게임성을 포기하고 욕먹는 게임을 만들지 않는가. 마블은 초인이라는 태생 때문에 이야기는 언제나 그들만의 리그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문에 인간의 이야기를 원하는 고결하고 보수적인 영화인들과 영화팬들에게 조롱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보 비대칭에 근거한 영웅적 이야기는 평범한 이들에게도 영웅의 길을 열어준다. 다른건 필요없고 그저 주인공은 특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초능력이 배제된 영웅의 이야기는 조금 더 세련된 점이 있다.


21세기의 영웅이야기

 최근에 초능력이 없는 영웅의 이야기로는 <엣지 오브 투머로우>를 뽑고 싶다. 주인공은 외계인과의 전쟁에서 인루절멸의 위기를 자신의 오직 기억을 통해 극복한다. 그는 초인이 아니기에 기합이 들어간 필살기도 혈통에 흐르는 숨겨진 힘도 없다. 그가 현실에서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할 수 있는 건 오직 끝없이 현실에 도전하는 것이다. 정신이 언제나 돌같이 단단할 순 없는법, 결국에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포기할뻔 하지만 동료애에 힘입어 현실의 위기를 돌파해낸다. 이것과 비슷한 서사로는 애니메이션 ˹슈타인게이트˼가 있다. 이것도 기억을 지고 과거로 돌아가 주변 동료들을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하는 이야기다.


책벌레의 하극상


이세계에서 영웅이 되기

 내가 오늘 본 책인 ˹책벌레의 하극상˼도 정보비대칭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골자는 책을 좋아하던 21세기 일본의 20대 여성이 중세도시에 떨어져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고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주인공이 평범하기는커녕 병약한 몸으로 태어난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건강한 시절, 일본의 현대적 문명의 혜택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한다. 유행하는 소재다 보니 평범할 뻔했던 이세계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바로 그런 설정에서 나오는 그녀의 심리적 묘사였다. 어떻게 보면 원래 있어선 안될 기억을 가지는 건 엄밀하게 초능력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만 실천할 수 없음'이란 한계를 처절하게 느끼고 아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협력한다. 이건 마치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평소에 사회성 없는 인간으로서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 점과 대조하면 더욱더 흥미롭다.


이세계의 이야기는 어떤 교훈을 주는 걸까

 나는 픽션을 읽는걸 길티 플레져로 생각하는 편이다. 완전히 끊을 순 없기 때문에 때문에 픽션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항상 가지게 되는데. ˹책벌레의 하극상˼에서 그 단서를 조금 얻은 것 같다. 바로 타인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는 동안 자신을 반성하기 위해서이다. 성경부터 21세기의 라이트노벨까지 픽션은 여러 가지 영웅의 모습을 그려내고 우리는 영웅을 통해 우리 삶을 바라보고 내면의 풍경을 재편성한다. 읽고 느끼는 모든 것이 인간의 인격을 구성한다는 심리학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현실에만 살면 우리는 현실의 논리만을 내면에 세기게 되고 현실의 적응자 나쁘게 말하면 노예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의 논리에 적응하기를 기대받으면서도 영웅적 삶, 도덕적 삶을 내면으로 바란다. 

 성경의 구전 전통은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성경적 인격을 대대손손 이어지게 하는 그 민족적 비결이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내면의 목소리를 오랫동안 저버리면 삶은 파괴되어 버리거나,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여기서 맥락에서 보면 픽션은 우리에게 삶의 질서를 완전히 재조립하여서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역할을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셈이다. 단순한 유흥이 아니다. 삶의 동반자인셈이다.


나쁜세상에서 조금씩 나아가기

 책벌레의 하극상에서 재조립된 세계에는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가득하다. 이곳은 빈곤과 삶에 적대적인 환경이 중요한 이야기의 축을 맡고 있다. 억압적 정치체계, 형편없는 생산성 탓에 각 가정은 만성적으로 결핍된 삶을 되물려주고, 상인은 어딘가에 정착하기 위해 자신의 축척한 부를 모두 귀족계급에게 바쳐야 한다. 각 개인의 자립과 충족을 방해하는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기 위해서 희생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희생을 끝없이 감수하고 그 감수의 씨앗을 지켜봄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자녀에게 헌신함으로써 미래에 언젠가 그들이 삶에서 빚어낼 성취들을 나의 것처럼 즐거워할 날을 기대한다. 배우자에게 헌신함으로써 배우자 또한 다시 나에게 헌신하는 사랑의 경험을 기대한다. 나의 헌신을 누군가는 기억해주고 또다시 헌신으로 돌려주는 것이 생명의 순환, 즉 인간을 짤막하게 표현하면 이 희생으로 쌓아올린 탑이다. 협력 또는 사랑은 또 다른 협력과 사랑으로 돌아오고 각 구성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완벽한 폭력의 절멸과 중립적 세상을 꿈꾸는 SJW부터 폭력으로 폭력을 억압하는 시계태엽 오렌지까지 희망부터 냉소의 프리즘 사이에 현실인간의 삶이 있다.


뼛속까지 냉소주의자는 없다.

 과연 우리 사회는 내가 언급했던 픽션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약간 슬퍼지기도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여전히 따듯한 사회의 비전에 공감하는게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긍정적 비전을 모두 거부한채 냉소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것을 바라기에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한 방어적인 행동이다. 세상에는 허무에 중독된 냉소자와 포기하지 못하고 도전하는 바보같은 낙관주의자들이 있는 게 아니다. 포기하고 냉소하지만 또 내밀어주는 손은 기꺼이 붙잡을 준비가 된 사람들과 상황이 되면 손을 잡아줄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삶은 영원히 미워하고 포기할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머리로 알지만 부정적 사건의 단말로인해 깨지기 쉬운 이 믿음들을 다시 상기하고 냉소의 유혹으로 극복하기 위해 픽션을 읽고 듣고 나누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을 긍정하기 위해 먹는 조그만한 정신의 양식.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그 낙관적 사회의 비전에 동참하는 하루를 맛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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