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수 없는 이야기들
반출생주의 철학은 '고통'을 이유로 삶을 적극적으로 비관하며 나아가 출산이 비도덕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철학 사조다. 이들은 고통에 인생의 초점을 두면서 삶을 평가한다. 이런 주장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생철학,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에서도 흔적이 발견되며 현대에도 반출생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삶에서 오직 고통에만 방점을 둬야 한다면 이들의 철학은 논리적으로 틀린 것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을 그만둘 논리적이고 그럴싸한 이유를 찾는 자살지망생이 아니고서야 이런 철학에 도대체 어떤 효용이 있는지 난 알 수 없다. 나는 자살을 고려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삶을 긍정하는데 도움이 될 철학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또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심지어 자살을 고려하는 사람도 마음 한편엔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적극적으로 발버둥 치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철학엔 도대체 효용성이 있을 수 있을까. 도덕을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라 정의한다면, 우리의 삶에 대한 본능을 부정할 정교할 논리를 만들어 자살의 재료를 제공하는 반출생적 철학이야 말로 진정으로 비도덕적인 시도가 아닐까?
‘foot-in-the-door technique’ 번역은 ‘문간에 발들이기’로 하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이것은 주로 협상술에 주로 응용하곤 하는데 이것의 골자는 작은 것을 요구해 의지를 관철하게 되면 더 큰일도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현상,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 큰 성공이 되는 현상, 작은 타협을 통해 큰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 이 모두 '문간에 발들이기'에서 파생되는 현실의 사건들이다.
도덕을 인생의 수단으로 보는 나의 독특한 시선은 차치하고, 양보해 도덕을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반출생주의는 위험하고 부정한 생각이다. 반출생주의를 인정하며 다른 의견으로서 존중하는 것도 '문간에 발들이기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은 고통에 삶에 대한 판단의 초점을 두지 않는다. 대신 삶의 의지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삶에 거둘 수 있는 작은 성취와 의미를 하나하나 붙잡아 가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런 반출생주의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고 인정하게 되면 삶의 의지와 실천을 부정할 여지를 만들어주게 된다. 바로 '문간에 발들이기 효과'때문이다. 한번 인정한 부정적인 논리는 사람의 마음에 상주하다가 삶이 어려워질 때 불난집에 부채질하고 기름을 붓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의 힘을 경계하는 심리학자 피터슨은 ‘부정한 말은 글로 쓰지도 말라’라고 조언한다. 굳이 심리학자의 의견에 권위를 두지 않더라도 부정한 말은 불안을 일으키며 결국 스스로를 성취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는 건 인간의 삶에서 두루 발견되는 진실이다. 우리는 자기실현적 예언의 힘이 괜한 불안과 사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정한 말을 조심한다. 시험기간에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 것, 직장에서도 큰 작업을 앞두고 내심 부정한 예측의 가능성을 말로는 꺼내지 않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지혜다. 한번 뱉어진 말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반출생주의 철학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부정한 것이며, 확장해서 보면 비도덕적인 생각이다. 따라서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의: 필자가 앞으로 말하는 낙태는 산모의 생명에 위험 같은 충분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낙태를 칭합니다
근대의 시작에 있어 가장 효과적이고 세상을 많이 바꾼 발상은 인간에게 인권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낙태죄의 폐지는 아이의 인권에 대한 해석의 퇴보를 동반한다. 낙태권도 ‘문간에 발들이기’ 효과를 피할 수는 없다. 민주사회의 인권은 국민을 자산 취급하던 전제군주의 자유와 인민의 자유가 충돌할 때 인민의 손을 들어주면서 발생한다. 이런 구도는 낙태권에서도 반복된다. 산모가 아이를 전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된 자산 취급하며 자유의 손들어주는 것은 인권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권의 후퇴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반석을 빼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째서 우리는 인권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바로 민법에선 태아를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간에 발들이기 효과'의 시작이다. 민법에서 태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게 작은 타협이었고 이제는 낙태죄가 폐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큰 타협은 뭐가 될까? 인간으로 간주하는 기간이 14주에서 24주가 되는 것? 34주가 되는 것? 무너진 반석이 현실에 끼칠 영향은 글로는 감히 표현하기도 무거운 이야기다. 대신 영화 이야기를 하나 하고자 한다.
영화 ‘아일랜드’는 사람을 장기 공장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문간에 발들이기'를 허용해서 생긴 부정적 미래를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기획팀이나 이사가 복제인간을 장기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을 했을 때 회사구성원들 중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객도 회사의 이런 상품을 접했을때 분명 윤리적 갈등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영업팀은 자유와 권리를 같은 이야기를 동원해 설득했을 것이다. 이윽고 고객이 인권보다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우선시하게 되면서 잔혹한 장기공장은 완성되었다. 기획팀도, 영업팀도, 개발자도, 고객도 모두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작은 타협'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큰 타협'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화 '아일랜드'는 강압적 지도자나 폭력적 사건 없이도 ‘문간에 발들이기’를 통해 자연스레 완성된 디스토피아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묘사된 인권의 붕괴 도미노를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삶의 ‘반석’을 위험하는 이슈에 대해선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작은 타협이 큰 타협을, 큰 타협이 완전한 방종을 만든다는 인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때론 ‘편협하고 과장된 해석’으로 치부받을 지라도 말이다. '인권의 붕괴 이슈가 그렇게 까지 해야 할 이슈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 한다. 인권을 기반으로 삼아 삶을 긍정하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이다. 이건 나 혼자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쾌락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삶의 의지를 사수하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가 높으며 심지어 그게 다른 이슈에 대한 진보적 태도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더라도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낙태죄 폐지에 대한 긍정을 반출생주의 철학과 동일한 선상으로 본다. 이 아이디어들은 자신의 목적(반출생주의는 생명에 대한 비관, 낙태권은 신체의 자유)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 높고 근원적 가치(인권, 삶의 의지)를 후퇴시키고 오염시키려 한다. 따라서 이런 생각들은 우리들의 삶에 효용성이 일절 없거나 효용성이 있더라도 효용보다 더 큰 비용을 동원한다. 물론 낙태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무식하게 인권을 무시하는건 아니다. 이들은 낙태가 비도덕적인게 아니라 '권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이 타인에 대한 모든 전권을 가진다는건 백인이 흑인노예를, 부모가 어린이를 미숙한 노동력으로 취급하던 시절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태아는 산모의 재산이 아니다. 민법처럼 태아의 권리를 부정하며 산모의 재산으로 취급하는 법은 비도덕적고 더 나아가 악하다. 때문에 낙태권은 보장될 가치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민법이 개정되어 더 적극적으로 태아의 권리를 보호해야한다.
"낙태를 허용하지 않아 침해되는 산모의 자유가 죽음을 당하는 태아의 인권보다 중요한가?"라고 묻는 다면 나는 '아니다'라고 나는 확신한다. 매우 애석하지만 정말로 태아에게 인권이 없다고 해석하더라도 "낙태를 못해 감수해야하는 산모의 비용이 윤리문제를 타협하는 비용보다 큰가?"라고 묻는 다면 '크지 않다'라고 나는 답한다. 현실의 인간의 고통을 앞두고 타협을 경계하기 위한 보수적 태도가 과도하다는 비판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충분히 정당성 있고 가치 있는 경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가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사회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보다 훨씬 건강하고 희망차고 삶을 긍정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구성원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공동체라면 마땅히 사회는 지켜야 할 가치와 규칙을 개인에게 가이드하고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반출생주의, 낙태권 같은 생각을 부정하게 여기고 타협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 사회의 법과 미덕도 이에 따라 구성되기를 바라고 말이다.
사람에게 출산은 '삶의 의지'의 적극적 실현, '거대한 생명의 서사'같은 건설적이며 제3자가 감히 침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한다. 그 이미지로 인해 사람에게 부모님이란 존재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우리 삶에 영원히 기억되고 삶의 의미를 견인해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출산'이 '신체의 자유'같은 비교적 사소한 것과 다툼을 해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출산의 위상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정적 타협은 출산을 그저 '생산'일 뿐인 사회, 여자는 도구일 뿐인 사회를 향한. 작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이 될것이다.
이런 경계가 가능한 이유는 기꺼이 기쁨으로 낳은 '아이'와 신체의 자유를 포기하고 낳은 '아이'는 분명히 다른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난 사람들이 기꺼이 기쁨으로 낳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낙태권은 고통을 감수하고 완고함으로 지켜온 의미를 빼앗을 것이다. 편의와 자유란 이름으로 실행된 의미의 편집은 사람들이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출산의 의미를 빼앗을 것이다. 우리는 의미의 동물이다. 잔인한 현실이지만 현실에서 의미를 제거하면 '기계'가 남는다. 산모의 인격을 부정하는 '애낳는 기계'라는 멸칭이 사용되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빈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이 가지는 적극적인 의미를 소중하게 여기면 좋겠다. 누군가 하찮게 여기면 한대 쥐어박아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