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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Oct 22. 2022

마르시온과 가톨릭의 역사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냐가 운명이 된다.

교회의 춘추전국시대

 교회를 잘 모르던 시절 나는 교회가 만들어진 이후 일정한 형태로 쭉 유지되었고 한국에서도 2000년 전과 똑같은 형태로 전통적인 믿음을 따르고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공부를 해보니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한때 기독교는 유대교였고 예수는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 죽었다. 기독교의 실질적인 시작은 유대교의 한 분파가 예수를 메시아로 보고 메시아의 시대가 왔다고 해석하는데서 시작했다. 기존 유대교는 메시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고 보았고 이러한 해석을 이단으로 판단 그들을 추출했고 추출된 자들이 '그리스도교'가 된 것이다. 

 이런 분화와 독립은 여러 종교의 초기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새로운 해석에서 이단(같은 종교 다른 해석)이 탄생하고 어떤 이단은 새로운 종교가 되는 건, 끝없이 있어왔고 그건 현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죽은 후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파들로 나눠져 서로 다르게 예수 현상을 해석하였고 그에 따라 다른 교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치며 자신들이 진짜 신앙임을 주장하였다. 마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시대처럼 말이다. 물론 이들은 창이나 대신 말로 싸웠다. 오늘 소개할 세력이 바로 이런 분파 중 하나인 '마르시온'파였고 지금의 성당으로 유명한 '가톨릭(보편교회)'이다.


마르시온파의 운명

구약과 신약을 보면 그들이 섬기는 신의 모습이 굉장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신은 난폭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신약에서 묘사되는 신은 실로 사랑과 평화의 신이다. 이것 말고도 성경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기엔 너무 많은 모순과 의문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돌파하기 해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기독교의 분파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마르시온파는 여러 모순과 의문 중 구약의 난폭한 신과 신약에서 예수로 대표되는 사랑의 신이 동일한 신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신약에서 자기들이 보기에 말이 되는 성경을 꼽아 최초의 정경화 작업을 했는데 이는 곧 가톨릭도 정경화 작업을 하도록 만들었으니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시온

 모순 없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성서만 선택하는 합리적인 성경의 해석,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 등 마르시온파는 합리적이고 평등한 문화를 기반으로 많은 교인들을 모았고 가톨릭과 비슷한 세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개인적으론 합리와 평등을 미덕으로 섬기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부합하기에 친근하고 이들을 응원하고 싶어 지게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고 욕망을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녀를 낳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시온만 이런 이유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마르시온과 비슷하게 지식과 합리와 평등을 강조하며 욕망을 부정한 영지주의는 마르시온 보다는 오래 생존하며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기독교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세력이 공고화된 가톨릭에 의해 마르시온도 영지주의도 이단으로 분류되면서 그 흔적은 역사에서 철저하게 지워졌다. (현대에 발견된 고문서인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는 있다) 


합리적 질서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마르시온이나 영지주의는 앎과 지식, 평등 같은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적 미덕들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워낙 로마 가톨릭의 타락의 역사가 유명하다 보니 뭔가 꼴통 같은 것만 있을 것 같은 교회사에 민주주의와 합리주의의 씨앗이 2~5세기에 꽃피다가 졌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사실인데 어쨌든 이것을 이것을 자주 언급할 건데 이런 성향을 간단하게 ‘합리적 질서’로 호칭하려고 한다.


가톨릭(보편교회)의 특징

 이런 운명을 밟았던 마르시온과는 정반대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가톨릭은 ‘전통'과 ‘사제 계급’, ‘종교적 절차’를 강조했다. 이런 가톨릭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게 '사도계승'이다. 사도계승은 성경에 예수로부터 교회를 세울 권리를 받았다고 기록된 '바올'로부터 연결되는 교회의 권위가 없으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는 아주 꼰대스런 문화를 뜻한다. 이것의 실체를 쉽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조선에서 있었다. 그 당시엔 성서를 보고 자생적으로 교회를 꾸려 신앙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신부들이 조선땅에 도착해 그들이 자기들끼리 세례와 같은 성사(가톨릭의 예식)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신부들은 그들의 신앙을 부정했고 중국에 있었던 가톨릭 사제로부터 다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가톨릭 성당. 웅장함 경건함을 연출하기 위한 높은 천장.

 이걸 볼 때 가톨릭에게 중요한 건 중앙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사제들이 독점하는 '권위'였던 것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개신교의 예배에는 성사도 몇 개 없고 형식도 보통 자유롭게 구성되는 것과 반대로 가톨릭의 예배는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최근에 와서 지역 언어를 허락했다), A부터 Z까지 매뉴얼로 정의되어 있는 전통성 있는 성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선 오직 남성만 사제가 될 수 있고 성서 해석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교리까지 억지로 결론을 내려놓고 '믿어!'라는 결론을 내기까지 했으니 말만 들어도 깝깝하고 얼마나 위계적인 질서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인지를 느낄 수 있다. 


위계적 질서

 그렇다고 이런 딱딱한 체계만이 보편교회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보편교회는 영지주의나 켈트 문화에서 필요한 요소를 유동적으로 흡수하며 적응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중앙권력이 이런 문화를 이단인지 아닌지 결정하고 지방 교회는 이런 사제들의 지침에 복종하는 중앙집권적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것이 바로 가톨릭 문화의 본질은 위계적 질서에 있단 걸 말해준다. 어쨌든 앞서 언급했던 '합리적 질서'와 반대로 중앙집권, 권위, 절차와 규칙의 강조 이런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것을 ‘위계적 질서’라고 앞으로 부르려고 한다.


교회 춘추전국시대의 결말

 최종적으로 가톨릭이 춘추전국시대에서 승리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가톨릭(보편교회)이 되었다. 독재에 공산주의에 승리한 아주 모범적인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왜 합리에 의한 질서가 위계에 의한 질서에 졌을까?'


신비주의 전통에선 체험을 한 사람이 권위를 갖는다. (바올은 사도계승 때문에 꿈속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야 했다)


나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 

나는 그 이유를 인간의 비합리성 때문이라고 본다. 신의 개념을 상상하며 높은 정신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 부정한 동물의 몸에 갇혀있는 것도 억울한데 죽음까지 맞이해야 하는 운명은 불합리하다. 모든 종교는 그런 불합리에 대한 설명인데. 불에는 불, 물에는 물. 불합리한 운명에 대항하기 위해선 불합리한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당시 가톨릭 교회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진행되는 가톨릭 예배를 지켜보는 것은 합리적인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이지만 그로 인해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신비함과 경건한 감정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감정, 구원의 가능성을 느끼게 해 준다. 그것이 바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신비 체험뿐만이 아니라 가톨릭은 실제로 이해하기 쉬운 교리를 선택했다. 그들은 마르시온처럼 깊은 지식을 강조하지 않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축구 경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욕망하기 때문에 믿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톨릭은 인간의 욕망과 잘 부합하였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산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은 모두 성욕, 물욕, 권력욕 같은 충동에 결정되지 않는가? 가톨릭은 인간의 통제되지 못하는 욕망을 죄로 규정하고 열심히 죄를 저질러도 교회에 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내세운다. 오늘날 사람의 욕망을 나쁘게 보지 않는 비신자의 시점에선 사실 병 주고 약 주는 거지만 성도들에게 교회의 예배가 매주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고 의미도 찾아주는 속 편한 생태계였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거나 인간의 행동을 침착하게 바라볼 뿐 적극적인 의미 또는 열정을 부여하지 못하는 콜드 한 조직은 역사적으로 성공 정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마르시온이 바로 그러한 조직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충동적 욕망을 부정했다. 욕망을 부정하는걸 오히려 좋은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고고한 믿음은 소수의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과 공허한 마음을 충족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것뿐이었고 엘리트적 종교라는 한계에 부딪혀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마르시온은 가톨릭에 졌다.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을 확대 및 재생산하는 두 가지 싸움에서 말이다.



권력은 권력과 규합한다.

 비합리성과 욕망에 대한 대해 쭉 설명을 했는데 그것만으론 가톨릭의 생존을 설명하진 못한다. 마지막 나는 바로 기존 국가권력과 가톨릭의 이해가 잘 맞아떨어진 점도 지적하려 한다. 가톨릭이 생기기도 전에 인류가 처음 무기를 들고 전쟁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위계적 질서를 잘 활용하여 번성한 조직이 바로 '전사'계급이고 전사들이 나아가 군인, 군벌, 더 나아가 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위계질서를 통해 사람들을 구분하는 가톨릭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살았던 로마 제국의 통치 질서와 잘 부합하였다. 중앙 사제만 컨트롤하면 전 국가의 종교인들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그 사실을 현대에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가 바로 코로나 팬데믹이다. 신천지를 포함한 수 없이 난립한 독립적 개신교 교회들이 통합된 대변인 없이 제 각기 방역에 대응하고 정부와 불협화음을 낸 것과 비교하면 로마 교회를 정점으로 하는 가진 가톨릭은 코로나 시기에 정부의 방역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잘 컨트롤되는 중앙집권적 체제의 장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한국 정부가 가톨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로마가 가톨릭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역사가 증명하듯 정치권력과 친하게 지내는 조직은 번성한다.


There is no stable order without a hierarchy.


역사에서 반복되는 합리적 질서와 위계적 질서의 싸움

 가톨릭의 승리- 마르시온을 끝으로 앎과 지식, 철학을 강조하는 해석이 종교에서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었다. 훗날 그것이 영지주의와 함께 이단시되어 가톨릭에서 퇴출됐을 뿐이다. 앎과 지식, 철학으로 대표되는 '합리적 질서'가 가톨릭에서 금지되고 암흑시대로 불리는 중세시대에 가톨릭은 수도원으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열풍이 불었다. 그렇다고 합리적 질서의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이 '합리적 질서'의 바통을 이어받아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켜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뒤에 각자의 믿음에 따라 성경의 독자적인 해석이 가능해졌다. 그렇게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질서에 대항하는 '합리적 질서'가 개신교란 이름으로 완전히 부활한 것이다.

 그렇다고 개신교가 모두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여전히 가톨릭 같은 위계적 질서의 도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개신교 내에서도 카리스마적 리더가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세습도 하기도 한다.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교회도 있다. 그렇게 합리와 비합리, 위계와 평등의 싸움은 이어졌다. 세월호 사건 때문에 나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구원파’ 교회가 바로 '합리적 질서'를 내세우는 교회의 사례이다. 구원파가 내세우는 마케팅 포인트는 ‘성경공부’다. 여전히 가톨릭은 '원죄'가 있다는 어거스틴의 교리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어필하지만 사실 성경에는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나와있다는 걸 아는가? 구원파는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통해 죄가 용서되었는데 사람들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기성교회가 잘못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내가 구원파를 '합리적 질서'의 예가 된 것이다. 똑같은 질서로 구성된 만큼 그들 또한 마르시온과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엘리트 직업을 가진 소수의 지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기성교회의 예배 같은 종교적 행위를 무시하며 공부를 통한 철저한 ‘앎’을 강조한다. 이렇게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가지에서 가지가 나오고 그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끝없이 갈라지면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이 선택받는다. 정치든 종교든 비즈니스든 뇌에서든. 영원히 안정적인 건 관념에만 존재한다.



합리적 질서와 위계적 질서의 응용을 위한 브런치북

 브런치 북의 시작을 교회사로 시작했지만 시리즈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교회사는 아니다. 이 글을 쓴 것은 ‘합리적 질서’가 ‘위계적 질서’의 경쟁을 교회 밖으로, 고대시대 밖으로 꺼내 그 지혜를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본능은 이천 년이 지났다고 이천 년만큼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따라서 이런 지혜는 비즈니스, 인간관계, 행동의 해석, 이념, 개념, 물건과 사람들을 조직하는 등 모든 인간사에 광범위하게 적용이 가능하다. 

'악'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적당히 필요한 위계질서

 이 말은 즉슨 '위계질서'를 잘 써먹자는 이야기인데, '평등'의 시대에 이런 주장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인간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위계질서가 관여하고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소소하게는 SM과 같은 성적 판타지, 군대, 훈육할 때 부모와 자녀의 관계,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관계를 리드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으로 나뉜다, 부부라고 하더라도 의사결정의 지분을 51% 가진 사람과 49%를 가진 사람으로 구분된다, 전통적인 위계 조직인 군대, 최고를 두고 경쟁하는 스포츠, 연예계나 일부 대학의 학생문화도 위계적 질서로 운영된다. 이런 것들은 각자의 성질에 맞는 적절한 위계가 성립할 때 제 기능을 하는 것이고 너무 강력한 위계가 형성되거나 위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붕괴된다.

 개인적으로 성격이 진보적이다 보니 위계가 익숙하지 않고 이런 위계를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는 프로젝트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왜 이러 이야기를 하는지 잘 이해를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한때 교육계에서는 위계를 일체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시절이 있었고 나도 그런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관찰한 역사와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위계는 피하거나 없애야 할게 아니라 잘 조직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위계가 무조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건 위계를 통한 질서가 항상 옳다고는 할 수없기 때문이다.


위계 vs 평등, 합리 vs 비합리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할 수 있지만..


'위계적 질서 vs 합리적 질서' 브런치북 시리즈의 목표

 모든 문제의 답이 '위계'는 아니라면 모든 문제의 답이 ‘합리’가 아니다. 다만 나는 위계적 질서를 설명하는데 더 힘을 주려고 한다. 합리적 질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민주주의는 합리적 질서로 창조한 조직원리의 정점에 있다. 그리고 과학은 합리와 지식으로 구성되어 21세기를 인간사회를 견인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익숙한 이야기이므로 위계적 질서와 합리적 질서의 응용이나 조화를 도모하는 할 때 더 사려 깊게 고찰해야 할 부분은 위계적 질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위계가 왜 나쁜지에 대한 증거는 위계가 필요하다는 증거보다 훨씬 많이 퍼져있으므로(매일 9시 뉴스에 나온다) 굳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글을 시작으로 계속 연재될 브런치북 시리즈에서 '위계적 질서'와 '합리적 질서'의 관점에서 사회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조직해야 할지, 어떤 지혜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지 글로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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