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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Nov 10. 2022

어떻게 삶을 조직할 것인가

Feat. 위계적 질서, 욕망을 긍정하는 삶을 위한 에세이

벼룩 실험

 벼룩을 병 속에 한동안 가두어 놓은 다음 병뚜껑을 제거하면 병 높이밖에 뛰지 않는다는 실험을 다들 한 번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이 실험에서 벼룩은 병을 넘을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더 높이 뛰지 않았을까. 바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그 판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걸까? 병의 뚜껑을 닫았던 시기에 전력으로 점프하다가 부딪친 그 통증이다. 이건 벼룩의 잘못은 아니다. 때론 고통을 두려워하는 능력도 필요로 하다.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면 온몸이 멍들어 먼저 죽어 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벼룩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작게 측정함으로써 고통을 피한 '생존자'이자 자유와 가능성을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스스로는 알 수 없는 한계. 누군가 말해줘야 알게된다.


단순하게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고통의 역사

내가 아는 동물은 모두 고통을 중요한 생존의 지표로 사용한다. 그래서 인간의 메커니즘도 벼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선상의 양극단을 상상해보자. "고통이 없는 행동", "고통이 있는 행동" 고통이 없는 쪽을 향해 나아가는 게 생명의 단순한 이치이다. 그 명령을 따라 인류의 조상은 위험한 동물을 피해 동굴로 향했고 변덕스러운 날씨를 피해 건물 안에서 살기를 원하고 위험한 기계를 피해 사무실 근무를 희망했고 노력의 고통까지도 피하고 싶어 세탁과 반찬 서비스까지 구독하지 않는가. 인간의 역사는 고통을 피하고 편의를 쫒은 역사다.

 고통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중 영장류들은 다른 대다수의 동물과 비교해 특이한 통증을 가지는데 바로 사회성에서 비롯된 고통이다. 사회적인 고통은 가장 인간다움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적 고통엔 뭐가 있을까? 부모님의 체벌, 직장 상사의 질타, 깡패들의 물리적 위협과 폭력 모두 사회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고통이지만 반대로 관계가 부재함으로써 생기는 고립감이란 고통도 존재한다. 인간을 조종하기 위해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고문임을 생각하면 고통은 많은걸 설명할 수 있는 지표다.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게 교양인 위계적 질서


고통을 사용하는 방법

 발달된 개인과 사회는 고통을 적절하게 적절하게 사용한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징역을 통해 고통을 가하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매로 훈육하든 벽을 보게 함으로써 고통을 준다. 회사에선 상사들은 가끔 성질을 부리는 것으로 부하들에게 고통을 준다. 그럴 때면 부하들은 상사에게 알랑방귀를 낀다. 아부하는 것이 가장 쉽게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겐 고통을 주고 아부하는 사람은 받아들임으로써 작은 사회의 왕이 된다. 아이들이라고 어른과 다르지 않다. 작은 사회인 학교에선 누가 일진이고 누가 모두의 외면을 받는 대상인지 체크하는 것을 배운다. 일진들은 학교에 고통에 기반하여 위계질서를 세움으로써 왕의 자리에 오르고 군림한다. 그리고 이런 게 사회에서도 반복된다. 국제관계에서도 반복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우아해 보여도 근간엔 폭력의 균형으로 형성된 균형이 있다. 고통이 삶 전반에 연결되어 있는 만큼 고통은 위계적 질서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위계적 질서 속에서 발견되는 고통

 위계적 질서는 애매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약속보단 계약, 합의 보단 명령, 민주보단 중앙집권. 이 모든 고리를 잇는 것은 고통이란 확실한 매개체다. 사회에서 제시한 위계적 질서에서 아랫것에 해당한다는 낙인은 고통을 유발한다. 저학력, 못생김, 저등급, 이부망천 듣기만 해도 저렴한 말들은 모두 위계질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특징이 있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니까 교양없는 말인것이다. 위계적 질서는 적나라하게 좋고 나쁨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좋은 것은 숭배되고 나쁜 것은 멸시, 무시된다. 생물은 고통을 싫어하기 때문에 위계에서 좋다고 평가된 것을 쫒는다. 좋은 아파트, 좋은 친구, 높은 자리, 좋은 회사. 권력자가 될 수 없다면 권력자의 친구, 그것도 될 수 없다면 권력자의 친구의 친구라도 말이다.


한쪽이 닥칠때까지 싸움뿐이다.


분수를 아는 순간 갈등이 끝난다.

 영원한 챔피언이 없듯 한번 세워진 위계가 안정된 상태로 영구히 보존되지 않는다. 현재의 위계를 거부하며 개체가 등장하면 갈등이 시작된다. 자신의 뜻을 관철한 쪽이 승자, 뜻을 꺾은 쪽이 패자가 된다. 만약 생물이 고통을 피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먼 옛날에 멸종해버렸을 테지만 다행히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성향 때문에 갈등은 완전한 파멸 전에 봉합된다. 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에서 적응한다. 소히 '분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꼭 싸움의 형태로만 이것이 동작하지는 않는다. 중산층이면 중산층으로 살기 위한 생각과 행동양식 하층민이면 하층민으로 살기 위한 생각과 행동양식. 분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적 맥락으로 존재하고 분수에 대한 개체의 '적응'은 위계적 질서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자신의 분수를 알아차리고 훈련과 얼차려에 적응한 군인은 휴가를 나가도 누군가에게 경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지 않는가. 훈련병들은 강력한 위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한 것이다. 위계적 질서는 사람의 마음과 습관, 무의식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왕따는 일진의 눈도 쳐다보지도 않고 바닥을 봐야 하는 것을 학습. 부잣집 자녀들은 임대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과 교류해선 안된다는 것을 학습. 누군가의 눈엔 어처구니 없어보일 수 있는 학습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차별하는 자로서의 위치에 서는 훈련과 패배적 관점에서 차별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회는 균형에 도달하게 된다. 균형에 도달하지 못할때는 언제나 시끄럽고 분열이 드러나겠지만 말이다.


일관성이 없어서 성공한 인간


인간의 특성. 유연한 사고

 모든 차별과 갈등에 대해 인간이 모든 것을 걸고 격렬히 저항하며 평등을 추구했다면 인간은 개미나 벌 같은 아주 특이한 사회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항상 자신의 목숨을 대의와 이타적 동기로 희생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때로는 위계질서를 존중하면서도 때론 위계질서에 저항하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양식을 무장했으며 더 놀랍게도 하룻밤 사이에 유동적으로 입장을 바꾸기도 한다. “그때그때 달라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남 이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모두 유연한 전략적 선택과 거짓말은 인간의 독보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아한 인간의 대의명분과 선함 그 내면에 존재하는 추악한 위계적 질서,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모든 것을 다 가지는 것이다. “가장 높은 것을 가장 많이”라는 끝없는 명령. 이것 때문에 수컷은 목숨을 걸고 다른 수컷과 다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섹스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암컷이라고 다르랴 자신이 오늘 밤 선택한 파트너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것이 정말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인가?'를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운동선수가 버린 콘돔에 있는 정액을 훔치는 여자들도 생겨났다. 욕망이란 정직한 위계 앞에 서면 모든 생물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욕망과 동의어로 취급해도 될 위계적 질서의 근원적 명령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이성과 합리적 관점에서 '욕망은 야만적인 것은 숨겨야 한다.'라고 보는 사람부터 그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인간도 동물인데 뭐 어때서?'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사람까지.

 욕망을 바라보는 역사의 계보학만 해도 책 하나를 쓸만한 광대한 주제지만 그건 나중에 다루고. 위계적 질서를 바라보는 태도와 삶의 관계를 조명하려고 한다. 위계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에게 이성과 합리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다. 반대로 위계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위계와 욕망은 극복의 대상이며 이성과 합리가 목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을 바라보는 태도는 개인의 가치관과 깊게 연결되어 있고 나아가 삶을 결정한다.


가슴이 시키는 욕망을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


욕망을 바라보는 태도를 결정하는 요소

 무엇이 욕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지에 대해 추론되는 변인들은 다음과 같다. (1) 유전적으로 결정된 혐오 대상에 대한 바이어스. 예를 들어 무임승차 행위에 대해  격렬한 혐오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위계를 긍정하는 보수적 정치성향을 인다. 또 심리학적으론 Big5 성실성이 높은 사람들이 이러한 성향을 가진다. 반대로 Big5 개방성이 높은 성격은 위계적 질서에 혐오 반응을 보이며 때문에 진보적인 정치를 선호한다. (2) 부모의 행동양식: 높은 지능을 가진 포유류는 양육자의 행동과 말을 모방하고  속에 담긴 가치체계를 내재화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부자는 자녀에게 부자의 습관을 물려주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의 직업을 답습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3) 유전과 양육과는 독립된 현재 개인이 가진 신념체계. ‘개인 독립된 결정자로서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결정할  있다. 행동으로 체화되고 강렬한 기억으로 유지되는 신념들은 유전적,  양육 경험과는 별도로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다. 이는 뇌의 가소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생리적으로 결정된 Vias 뒤집는 것이 가능한 것은 뇌의 유연한 적응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념은 미디어에서의 노출, 주변 환경의 압력, 개인의 인상적 경험과 특정 신념 체계에 선망과 결단에 의해 변한다. 신념은 다른 변수에 비해 개인이 컨트롤 가능한 영역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때문에 개인의 신념을 분석하고 잘못된 신념을 교정하는  유망한 심리치료방법  하나다.


난 몰라


욕망의 수용 - Type 1. 타협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때문에 동물적인 욕망을 마주할 때 이성은 욕망과 충돌하며 이것이 삶을 결정한다. 물리적으로 완전한 풍요, 최고의 권력 누구나 원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이것은 도덕적이지도 않고 희소하며 리스크도 존재한다. 누군가의 고통으로 인해 성립될 수 있기에 부조리하고 영구히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두가 자연인이 되지도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최종 타협점에 종착한다. 욕망과 이성 양극단이 아니라 유연한 관점을 택하는 사람들은 큰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며 보통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주로 근대적 소설 속에서 권력 폭거 앞에서 침묵하지만 뒤에선 욕하며 양심의 아픔을 호소하는 소시민이 바로 이런 삶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없는 의미도 만들어 내는게 위계다.


욕망의 수용 - Type 2. 전적인 추구

 반면 너무나 강고하게 욕망을 추구하며 위계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엇나가는 길을 걷게 된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에 의한 세계 통일의 비전을 꿈꾼 히틀러, 제국의 꿈을 꾸던 파시스트,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에게 가해지는 회장의 갑질,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공무원, 위선 적자들이 싫고 인간 모두는 쓰레기라는 내러티브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일베 같은 서브컬처그룹 등이 그런 사례다. 우리가 듣고 읽는 이야기 속의 빌런들이 보통 이런 내러티브를 받아들인다. 들은 위계적 질서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것을 희생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에 비인간성을 긍정하고 부정적 감정을 옹호한다. 스타워즈에선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 아들을 다크포스의 계승자로 만들려고 했던 다스베이더가 바로 이들이다.


제자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고생하는 요다

욕망의 수용 - Type 3. 전적인 부인

 이와는 반대로 강고하게 위계를 부정하며 욕망도 컨트롤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고대엔 금욕적 종교인이자, 기독교인, 근대엔 공산주의자였으며 야망 있는 사람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정치적 질서를 구성하는 회사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거나 파벌싸움에 끼지 않고 자신의 일만을 추구하는 프로페셔널들이었다. 위계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박해받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다. 우리가 보는 이야기 속의 스승 또는 조력자들이 캐릭터로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도 간혹 이런 경우가 있지만 폭넓고 유연한 내러티브를 쓰는 데 있어 불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중립적인 태도로 묘사될 때가 많다. 이런 조력자들은 위계질서를 거부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성을 긍정하고 빛의 힘을 선택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 제자를 포스의 계승자로 만들려고 했던 오비완과 요다, 간달프 같은 캐릭터들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태도가 결정하는 것들

 이런 설명들이 붕 뜬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강력한 비전을 위해 자신을 고집하기보다는 현실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비전은 공감받기 힘들고 조화가 힘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게 나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고립을 감수하는 대가가 없으면 남다른 비전에는 가치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는 타협적인 사람에겐 자신의 비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위계를 바라보는 개인의 태도가 인생을 결정하는 이유이다. 누군가는 이 태도 때문에 악당이 되고 누군가는 영웅이 되고 누군가는 소시민이 된다.

 질서를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가 개인의 인생을 결정하고 이런 개인적 특성이 민족적, 대륙적 문화가 되고 문화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거시적 측면은 다른 글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언급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 좀 더 영양가 있는 하루를 보내며 병 속에 갇힌 벼룩 같은 신세가 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인생을 바꾸기 위하여

 제일 처음 언급한 병에 갇힌 벼룩들의 실험을 다시 한번 언급하려고 한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기엔 후속 실험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높이에  머물러 있는 벼룩들이 갇혀있는 병을 가열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병의 온도가 변하자 벼룩들은 한계를 잊고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고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병을 탈출했다. 이 두 가지 실험은 우리에게 다음의 교훈을 준다.


1) 고통으로 얻은 교훈이라도 영구하고 완벽한 진리가 아니다.

2)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기는 아주 힘들다.

3) 생명은 변화와 새로운 문제와 접함으로써 한계를 돌파해 성장한다.  


인생은 미로일까? 이미 정해진 미래라는 생각이 무기력, 우울을 부른다.

병에 갇힌 인간

 병 속에 갇힌 벼룩은 인간으로 치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게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고 본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우울증은 감기 같은 게 돼버렸다. 왜 그런지는 뻔하다. 여러 이유로 우리 스스로의 행동과 삶에 의미를 잘 부여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발밑에 불이 붙은 벼룩처럼 누군가 옆에서 붙어 우리의 삶에 고통을 가하며 변화를 요구하는가? 아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내와 부모가 그의 인간적 성장을 기원하며 힘들여 잔소리를 하는 것이지. 병 속에 갇힌 1인 가구와 회사에는 아무도 잔소리를 해줄 사람이 없다.


우울증의 탄생

 법도 없이 전제군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의 폭력과 끝없는 전쟁, 낮은 토지 생산성과 극단적 양극화와 굶주림이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인간에겐 생존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고 이것에 쫓기는 사람들에겐 우울증이 찾아올 틈이 없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종교 시스템이 제공하는 위로와 삶의 목표가 모순 없이 완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이란 마지막 목표를 향해 자신의 삶을 위로할 수 있었다.

 비교적 근대가 되어서야 사람들의 배부른 걱정은 시작되었다. 생계 걱정으로부터 벗어난 귀족 상류 여성들이 정신증을 호소하고 그걸 관찰하던 프로이트에게서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태동했으니 우울증은 그야말로 '부'라는 이름의 질병이 창궐함으로써 만들어진 인간만의 질병이라 할 수 있겠다. (아 물론 예외는 있다. 인간의 부와 함께 생겨나 동물원의 동물들도 삼시 세 끼를 잘 챙겨 먹으며 창안에 갇힌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우울증을 호소한다.)

 부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사회 전체적으로 보편적으로 늘어난 부가 우리의 삶을 견딜만한 지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평등에 대한 갈구는 위계적 질서만큼이나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하지만 더 이상 굶주리는 지경은 아니기에 이제 세상에 혁명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고 불평등은 현대사회의 영속적인 특성이 되어버렸다. 불만족스러운 병 안의 벼룩 그것이 우울증에 걸린 인간이다.


의미 찾기의 역사

 의미 없는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아주 오랜 문제였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여러 시스템들을 발명해야 했다. 그중에 종교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도구였다. 우주를 이해하는 가장 큰 그릇인 ‘신’을 상상해냄으로서 우리는 삶의 의미(유발 하라리의 언어로는 ‘거대한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이런 상상력에 의존하는 게 어색해 진면이 없지 않다. 이런 의미의 해체를 걱정한 니체는 이것을 200년 동안 다가올 '허무주의의 망령'이라 경고했고 그 경고는 틀리지 않았다. 파시스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기죽지 말라고..


 의미를 향한 사람들의 발버둥은 침략전쟁으로만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국경을 뛰어넘는 연대를 실천에 옮겼다. 교회와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진보신학자들부터 마을 공동체, 귀농, 맘 카페 같은 것을 만드는 커뮤니티 사업가, 당근 마켓까지. 물론 이런 생산적이고 조직적인 시도들도 있었지만 보편적으로 널리 퍼진 믿음도 그 자리를 대체했다. 바로 소비와 의미를 동일시 함으로써 ‘돈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방법이다’란 믿음을 가지고 돈이 없는 상태를 문제로 규정하면서 삶과 인간의 삶을 단순하게 2차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2차원적이진 않다. 이 시리즈에서만 해도 나는 가장 큰 질서의 두 개의 축으로 위계적 질서와 합리적 질서를 들었다. 그 복잡성을 이해하고 인간의 삶을 이해한다면 돈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우울증은 부의 창궐로 만들어진 병이라고. 그런 관점에서 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으로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삶의 활기를 줄 수 있는 적당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목적을 만들기 위한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중 앞서 내가 전 문단에서 언급한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들은 ‘합리적 질서’에 근거한 설루션이다. 그것은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고 지금 이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하는 설루션은 ‘위계적 질서’에 근거한 설루션이다.


위계적 질서를 옹호하는 이유

 앞서서 위계적 질서를 설명하며 히틀러니 땅콩 회장이니 다스 베이더니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제 위계적 질서를 옹호해 보려고 한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동물이고 욕망의 주머니를 떼어내 버릴 수도 없으니 그것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자신을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오만함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돼지나 짐승이 욕인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이 글은 그 오만함을 비판하려 함은 아니다. 위계적 질서를 통한 의미의 창출- 오히려 그것을 격려하는 설루션이다. 동물적인 욕망에 의해 빚어진 위계도 인간 정신의 한 요소임을 인정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더 그것을 적극적으로 포용 것에 대해 이제 설명하고 그것을 긍정하려고 한다.


위계적 질서에 근거한 삶의 의미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은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차, 더 좋은 파트너, 더 좋은 집, 더 좋은 사회, 더 좋은 나라, 더 큰 권력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는 이기적인 것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이타성? 굳이 인류를 구원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그것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한정적인 자신의 관점에만 국한되어 취해있기 때문에 멋지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게 나쁜가? 이 개인의 욕망의 추구는 상상하는 것만큼 나쁜 결과를 낳진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러한 삶에 대한 면죄부를 주지 않았는가. 그들의 이기성이 결국은 공동체의 이익을 낳았다고 말이다. 애덤 스미스가 완성한 의미의 생태계는 위계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채용하는데 의의가 있다.

 나는 개인적 이익에 대한 끝없는 추구와 팽창이야 말로 현실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도구이고 가장 쉬운 도구라는 점에 대해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남성은 더 많은 쾌락을 위해 끝없이 다른 파트너를 찾고 여성은 더 좋은 파트너와 교류할 기회를 추구한다. 지도자는 끝없이 확장하고 자신의 리더십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이기적인 결단을 강행했다. 민주주의라고 다를 게 있나? 미국의 정치가들 또한 미국 '예외주의'나 ‘명백한 운명’이란 명분까지 만들어가며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욕망과 위계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명료하고 앞뒤가 다르지 않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욕망으로 인해 국가가 존재하고 오늘의 부와 안정, 편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물질사회의 기적적인 발전을 부정하지 않고 욕망을 해소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 그게 '위계를 통한 삶의 의미 부여'다.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들은 항상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매우 단호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우울의 실체

 단순히 이렇게 말하면 '요즘엔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을 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설루션은 ‘위계를 제대로 쳐다보고 끝없이 오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앞서 우울증의 원인을 부의 창궐. 벼룩처럼 자신이 병 안에 갇혀있다고 믿는 상태를 원인으로 꼽았다. 우울의 원인을 야근이라고 해보자. 만약 당신이 야근을 할 때마다 회사에서 1억을 준다고 한다면 오늘 야근을 아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야근을 해도 추가 수당이 없으니까. 만약 추가 수당이 있다 해도 그것이 현실에서 잃은 가치를 충당할 만큼의 가치는 없으니까 즐겁지가 않는 것이다.  만약 이직 한 번으로 모든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다면 당신은 기꺼이 이직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지만 회사를 바꾼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 변하지 않을 거란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우울함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해 수동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상태 그것이 우울의 실체다. 이것은 현실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두려운 상태다.


위계에서의 의미 생태계

 내가 설루션으로서 제시한 ‘위계를 제대로 쳐다보라'는 인생에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많고 너는 더 많은 것을 충족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격렬한 메시지로 평온한 삶에 선전포고를 하라는 말이다. 일부일처의 관계에서 나오는 주기적인 섹스, 돈을 주고 성립하는 섹스, 포르노 같은 ‘가짜’나 '안정'에 만족하지 않고 연애 시장에서의 치열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 회사생활을 어쩔 수 없는 감옥생활로 보지 않고 다른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벌이에 따라 소비 취향을 타협해 밸런스를 찾는 게 아니라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

 ‘위계를 제대로 쳐다’ 본다는 것은 현실에 적응, 타협하지 않고 치열히 싸워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는 '만족을 위해' '노력하지 않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설득하고 적응하려들기 때문이다. 뇌는 어려운 일을 싫어한다. 불확실성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위계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인생의 의미는 어렵고 불확실한 목적 앞에서 스스로를 돌파해내야 할 때 발생한다.


삶에 대한 담론은 두가지로 나뉜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이야기'와 '거듭나서 변신해야한다는 이야기' 둘다 맞는 이야기다. 우리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사용할 뿐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도 되고 서있었도 된다.


배고픈 러닝메이트와 같이 살기                                

 이러한 삶의 태도는 거짓되지 않은 최고의 목적을 자신의 삶의 러닝 메이트로 내세우는 것과 같다. 이 잔혹한 러닝 메이트는 매일 최상의 것을 요구하며 끝없이 배고플 것을 요구한다.『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생각했으며, 매일 밤바다 너머로 보는 '데이지'와의 추억과 관계를 현실에서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을 꿈꾸며 자신을 갈고닦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지나가버린 인연을 포기하고 새로운 인연을 찾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돈을 벌고 그를 완전히 변신시키고 모든 것을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리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을 바랐는지 사실 물어본 적도 없다. 그녀의 마음은 그의 목적 아래에선 고려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위계적 질서 속에서 목적을 상정하는 것은 개츠비가 바라보던 녹색 불빛을 삶의 중앙에 두는 것이고 어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해내겠다는 각오하는 것이다. 때로 그 녹색 불빛은 권력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고 승리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탐욕스럽게 바라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위계적 질서

 누구나 한 번은 녹색 불빛을 발견한다. 만약 우리에게 녹색 불빛이 없다면 그건 오래전 그 불빛을 가질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한계를 걸었기 때문이다. 불빛 존재마저도 잊어야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너무나 아파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위계를 명백히 바라보고 따라가는 이 방법을 실천하려면 우리는 큰 모험을 해야 한다. 한번 느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선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을 억제하고 오히려 고통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본능과 반대로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우리가 그 위계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야 했던 보호막을 스스로 치우는 것이다. '그런 거 없어도 괜찮아' '나는 그런 게 적성이 아니야'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야' 같은 보호막들. 이것을 다 치워내고 나면 뜨거운 햇빛 아래 숨겨놨던 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열등감과 결핍의 고통이 피부를 찌른다. 그러나 그 고통 덕분에 그것을 메꾸기 위한 생동감 있는 삶의 목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옷장에 보관한 부드러운 옷을 입는 변화가 아니라 피부가 새까맣게 타는 변화다. 새까맣게 타고 피부가 벗겨지고 비로소 피부가 검해지고 나서야 우리는 햇빛을 정면에서 견딜 수 있게 된다.


그 자체로 위험이지만 에너지의 근원이기에 삶과 떌래야 떌 수 없는 위계는 태양과 닮아있다.

개츠비로 보는 위계적 질서를 향한 사투

 위계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개츠비를 다시 호출하고 싶다. 위대한 개츠비는 위계적 질서의 정점을 향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다 바친 한 인간을 묘사하는 소설이다. 여기에 인생을 구성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뽑히는 '시간, 장소, 사람'을 중심으로 구체적 전략을 구성해보자.

 먼저 개츠비의 삶이 바뀐 시점부터 그의 행적을 짚어보자. 코디의 배를 타며 야망을 키웠던 그 순간. 그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바꾸며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모습을 그 이름에 담았다. 그리고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생각했고 마땅히 세상의 모든 것을 쥘 자격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싶다는 목적이 생겼고 그에게 그것을 이룰 돈이 없을 때 그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 부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는 데이지 뷰캐넌의 집이 보이는 곳에 이사를 했고 최고의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으며 매일 종교적 의식 마냥 녹색 불빛에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가다듬어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운명적인 연출을 하며 다가갔다.

 사랑했던 데이지마저도 수단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볼 때 개츠비는 진정한 로맨티시스트 사랑꾼보단 자신의 운명을 무한히 개척할 수 있다는 믿음을 관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무모한 사람이었다.

 '시간적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돈이 없다는 문제 앞에서 문제와 타협 또는 정면돌파를 선택하지 않는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얼마든지 말로 삶아구워 사랑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문제를 우회하기보다는 시간을 들여 그녀가 원했던 조건을 갖추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개츠비에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 그 첫 번째는 '문제와 타협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정면으로 돌파하기'다.

 '장소적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자신의 야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위치했음을 엿볼 수 있다. 데이지를 찾기 전 보트 위는 그의 야망과 그의 행동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자신의 야망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는 육군 장교로서 전쟁터에 가는 것이었다. 제대한 뒤에 데이지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 루이지애나를 가장 먼저 방문해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그는 확인했고 돈을 번 다음에는 목표가 있는 장소 옆에 이사하여 항상 곁에 두면서 자기 삶의 지표로 사용했다. 개츠비가 주는 메시지 두 번째는 바로 '야망을 이뤄줄 수 있는 자리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는가 '말은 제주도에 사람은 서울로' 위계적 질서를 존중하면서 살기 위해선 위계의 정점이 무엇인지 항상 주시해야 한다.

 '사람의 측면'에서는 그는 사람과의 인연을 삶의 주요한 분기점으로 만들었다. 미디어의 홍수에 살고 있는 우리와는 아주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는 책이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만난 코디란 인물과 함께 지내며 야망을 키웠고 데이지란 여인을 그다음은 삶의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 위대한 사람들을 파티로 초대해 그들이 데이지를 향하는 자연스러운 다리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허영심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으로 닉 캐러웨이를 골라 그의 진심을 드러냈고 결국 캐러웨이는 그의 진정한 이해자로서 개츠비의 죽음을 지켰다. 개츠비가 주는 메시지 세 번째는 '인생의 지향점이 될 인연을 적극적으로 찾고 찾은 인연으로 우주를 바라보기'다. 21세기 노동자의 흔한 비전이 '자아 찾기, 커리어 성장'이었다면 개츠비의 비전은 댄디처럼 세상을 탐험하는 것이었고 데이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변신하는 것이었다.

 

전념

 위계적 질서를 전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겐 나아가야 할 목표가 명료하다. 개츠비는 목표를 세운 뒤 ‘전념’하는 보여주는 삶을 잘 묘사한다. 소설에서 이런 그의 모습을 잘 나타낸 문장을 소개하 고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며 당신에게 온 정신을 쏟겠다고 맹세하는 듯한 미소였다' 캐러웨이와의 첫 만남에서 개츠비가 보여준 전념이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주변의 사람을 매료시켰다. 소설이라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개츠비같이 삶을 바꿔낸 사람들은 존재한다. 시대가 변해도 성공의 법칙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

 처음에 언급한 벼룩 실험 이야기는 사실 인간의 자화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벼룩의 변화는 개츠비의 변화이기도 하고 이 글을 읽는 21세기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이 길을 걷기 위해 우리는 편리함과 안정 대신 자신의 강렬한 비전을 택해야 한다. 피부가 타는듯한 변화의 고통을 감당해내야 한다.

 당신의 비전과 일치하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습관적으로 우리의 목표를 일깨워주는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이 야망을 이루는데 도움이 안 된다면 이직을 준비해야 한다. 인간관계도 더 진보적이고 실험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허물없고 익숙한 관계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사람, 자신을 일깨워주는 불편함 관계마저도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삶의 중심으로 두는 것이다. 단순히 스스로 만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을 위해서 성취하고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목표에 전념하는 시간을 보냈는지 체크하는 것까지. 위계를 똑바로 쳐다보고 그것을 올라서기를 바란다면 우리를 변화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모든 안정을 위해 만든 장벽들을 치우고 능동적으로 변화에 뛰어들어야 한다.

나폴레옹의 삶 자체가 교과서다

 이런 삶의 방법에 대해 연구할 때 나는 전근대의 전제군주와 현대의 칭송받는 독재자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정복전쟁을 벌였던 진취적인 전제군주들은 위계적 질서에 근간한 삶의 구성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삶에서 최상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바랬으며 타협보다 싸우고 쟁취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 속에 있는 질서를 현실로 옮겨 쓰는데 거침이 없는 삶을 살았다.

 물론 모두가 이런 욕망을 향한 레이스를 펼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욕망을 긍정하는 삶이 생리적으로 불편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그런 욕망을 멀리하는 파수꾼에 의해 공동체의 건전성을 보장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한 삶의 지침은 다음 포스트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어떻게 삶을 조직할 것인가 Feat. 합리적 질서'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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