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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Dec 01. 2022

혓바닥이 긴 사람을 위한 에세이

나는 어째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렇게 많은가?

"너 혓바닥이 길구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혓바닥이 길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두렵고 피하고 싶은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거나 못하는 수 십 개의 이유가 떠오를 때 과연 이런 이유들이 정말 타당한 것인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찾은 이유들은 책에서 나온 말이나 숫자, 경험적 근거들이었다. 단순한 감정적 부정은 아니었다. 그렇게 보니 난 참으로 여러 가지 이유들을 주절주절 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블로그에 쓰는 글 마냥 쓰고 싶다면 영원히 쓸 수도 있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지적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던 모양이다. 그 이유들이 부당하거나 비합리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너무 합리적이어서 말이 안 될 뿐이다.


비합리적인 삶

 삶은 부조리하다. 열역학 2법칙이 법칙 덕에 우주는 멸망이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 법칙의 힘의 진가를 맛보기도 전에 지구는 행성의 생명주기 말에 부풀어 오른 태양에 의해 사멸할 것이다. 하지만 이 태양계의 멸망을 보기도 전에 지구문명은 핵전쟁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고, 최후의 전쟁을 목격하기도 전에 나라는 인간 개체는 늙어 죽을 것이다. 늙어 죽기도 전에 우리는 수 없이 인생을 집어삼킬 사랑과 열정을 몇 번에서 수십 번 맞이 할 것이며,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이 영원할 것만 같은 절망과 환희의 감정이 일어났다가 사그라드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제정신으로 이런 삶을 버틸 수 없다. 우리는 비합리적으로 결단했기에 존재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충동 때문에 자살 대신 살기를 기도한다. 열정이 이끄는 환희를 못 잊어 안정 대신 성장을 선택한다. 우리는 타고나기를 비합리를 추종하는 하는 운명에 처한 동물이다.


비합리적 삶을 위한 비합리적 철학

 살기로 그리고 성장하기로 결단한 삶에 필요한 건 예측 가능한 합리성이 아니라 비합리성이다. 가치가 있는 건 고통 없음이 아니라 고통 있음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운전을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스포츠를 즐기고 청산을 각오하고 투자를 한다. 즉 `고통이 있는 곳에 가치가 있다`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비합리성을 결단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추앙과 존경은 고통을 잘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반대로 고통 없는 성과는 멸시되고 외면받는다. 이 관점은 추앙과 존경을 지향하는 에너지가 넘쳐난다. 동시에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비대한 자아와 보기 흉한 욕망도 길동무로 함께한다.


비합리적 삶을 위한 합리적 철학 - ‘고통의 부재가 선이다’

고통을 쫒는 게 비합리적 철학이라면`편안함, 자기 수용, 나의 취향이 받아들여지는 공간, 안전, 예측가능성`같은 이미지를 쫓는 건 합리적 철학이다. 이 관점에서 가치가 있는 건 고통을 없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할 일을 피하고 위험한 스포츠를 피하고 청산을 각오하는 투자는 하지 않는다.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른 존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채식주의를 선택한다. 여기엔 `죽으면 소용없다`같은 이미지가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은 겸허하고 따뜻한 포용과 자아에 대한 절제가 함께한다.


고통의 철학 vs 비고통의 철학

앞서 말한 `고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비합리적 관점`은 드라마 속에서 환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를 칼로 찌르는 인물의 각오와 연결된다. 남성적이며 역동적이고 자본주의적이다. 이를 ‘고통의 철학’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고통이 없음을 이상적으로 보는 관점`은 합리적인 현실주의자,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하는 힐링 서적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여성적이고 자기완성적이고 사회주의적이다. 이것은 ‘비고통의 철학’이라고 호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철학(프레임) 이든 좋다 하나만 선택하고 나면 우리는 그 철학 안에서 우리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으니까. 갈등은 끝난다. 더 이상 스스로를 끝없는 사고의 폭풍 속에서 괴롭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니까 문제다.


철학 자체가 문제가 될 때

 일반적으로 볼 때 하나의 삶엔 한 가지 운영체제만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다. 여기에 여러 가지 운영체제를 도입하면 각 운영체제는 자기들이 먼저 자원을 점유하기 위해 다투게 된다. 운영체제가 늘어날수록 이 경쟁은 치열해진다. 한 가지 이슈가 생길 때마다 대해 우리 안의 모든 관점들(운영체제)들을 만족시키는 옵션을 고민하느라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더 나쁜 건 교착상태(데드락) 같은 상황이다. 교착상태는 대립하는 의사결정이 서로를 참조하면서 한쪽 이슈가 풀릴 때까지 무조건 대기만 하는 상황을 말한다. 남녀관계에서 상대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를 기다리다가 영원히 관계가 파멸해버리는 것도 이런 교착의 결과. 서로 기다리고 있으니 교착상태가 해체될리는 없고 겉으로 보기엔 인생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실제로 행해지는 일은 없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관념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 사람을 붙잡아두고 있는 건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교착상태이기 때문이다.


혓바닥 확장술의 범인 색출

 운영체제 또는 철학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는지까지 설명했으니 이제 처음에 이야기했던 `내 혓바닥이 길어지는 이유`를 이제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 인생에 운영체제(OS, operation system)가 잘못 깔린 것이다. 예를 들어 비합리적 삶에 합리적 철학을 설치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둘째, 사람의 몸뚱이는 하나인데 OS를 너무 많이 설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다음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A. 원하지 않은 잘못된 출력 B. 교착상태(Deadlock) C. 성능 저하. 이건 컴퓨터의 언어니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면 어떨까? 우선 사람들과 또는 자기 자신과 대화할 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모순을, 두 가지 이상의 관점을 모두 설명해야 하니 혓바닥이 길어진다. (한 사람 내부의 모순과 다양한 관점의 혼재는 말더듬이의 원인이기도 하다) 각 운영체제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온갖 경우의 수를 따지다가 시간을 흘려보내고 기회를 놓친다. 그러다 모든 니즈를 충족시킬 수 없을 땐 멈춰버린다. 의사결정의 질이 떨어지니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면 왜 하는지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최악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혓바닥 짧게 만들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인생의 운영체제(철학, 프레임) 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첫째, 운영체제의 숫자를 줄인다. 하나여도 좋으니까 말이다. 이것에 대해 참고할만한 책으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추천한다. 이 소설은 단순 명료함이 선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책이다. 운영체제가 단순한 게 만능은 아니지만 복수의 운영체제를 운영할 때 생기는 비용에 비하면 충분히 감수할만한 하다. 

 둘째,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체제 간의 우열을 결정해야 한다. 모든 가치가 평등하다는 말은 이상 속 허구다. 현실의 모든 물질과 원리엔 위계가 있음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데, 위계를 결정짓고 나면 의사결정은 극도로 단순해진다. 예를 들어 나는 아까 위에서 나는 고통의 철학과 비 고통의 철학을 대조시켰다. 나는 고통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반대 선상에 있는 비고통의 철학을 저열한 것으로 우열을 결정했다. 저열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해가 상충 할때는 우선순위 높은것을 택하면 된다.

 셋째, 완벽주의자(Maximalist) 대신 최적화주의자(Optimalist)를 지향한다. 이는 한 번에 모든 것을 충족할 수 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최우선적 조건만 충족된다면 일단 실행으로 옮긴다. 완벽주의는 생각보다 무서운 적이다. 완벽하지 않은 의사결정 때문에 결정을 번복하거나 추가적인 비용이 드는 건 고통스럽지만 대개는 빠른 의사결정과 행동이 선이다. 완벽주의 앞에는 만성적인 의사결정의 지연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최악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게 낫다는 걸 받아들이면 사고 과정을 단순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세 가지가 당장에 떠오르는 해법들이다. 나를 포함해 인생에 변명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이 됐기를 바란다. 사실 내가 쓰는 에세이는 다 나를 위해 나와 하는 대화, 나아가 내가 잘 되야지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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