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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히다에게 배우는 중용

게임 원신에서

by 강태훈

'운명은 궁극의 지식'은 게임 원신의 지혜의 신 '나히다'의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인상 깊은 메시지다. 이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원신 세계관에 등장하는 두 극단적인 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둘을 평행선에 놓는 다면 나히다는 그 중간에 있는 신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 두 신에 대해 설명을 하겠다.


극단의 한쪽인 '벤티'는 낙관적인 세계와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며 술을 좋아한다. 여기에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혁명으로 귀족정을 엎은 행동을 더하면 그는 민주주의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하는데 겉은 번지르하고 멋지지만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알코올중독이란 습관을 달고 있는 현대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반대에 있는 '스카라무슈'는 삶에 대한 부정과 허무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500년을 살면서 인간의 불완전성에 끝없이 괴로움을 격었으며, 인간혐오를 기본적으로 달고 있는데도 놀랍게도 한때는 인간다움을 누구보다도 바랬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인간다움을 쫒던 그의 노력은 매번 실패하였고 마지막엔 그 대신 인간을 초월하는 신이 되려고 했었다. 신이 되려는 순간부터 그는 권위주의의 상징이며 겉은 완벽해 보이지만 속은 상처로 곪아있는 사람, 끝없이 나와 다른 타인을 혐오하면서도 타인의 주목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일면을 묘사하는 캐릭터다.


나히다는 이 둘의 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게임 속에서 나히다의 주변에는 계속해서 인생을 부정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에 대한 나히다의 태도가 게임 속에서 그려진다.


전설임무 2장에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시뮬레이트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냐고 질문을 던진다. 이에 맞서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려는 나히다는 이들에게 원망을 듣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성대한 지혜의 축제'에선 인간의 부도덕성에 지친 나머지 인간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할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자살한 아카데미아 학자 '사카인'이 등장한다.


나히다는 여기서 특이한 태도를 보여준다. 나히다는 인간에 대한 완벽한 경멸을 향한 사카인의 결론은 비판하지만 그의 연구에 객관적인 가치는 있다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대로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카베'나 '페이몬'은 이런 부정적인 메시지를 인정할 수 없다며 사카인의 생각을 전적으로 부정하려 한다. 일반적 미디어에서 다루는 영웅서사시가 악인의 사상을 전적으로 비판하고 부정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는 파격적인 연출이다. 관조적 입장에서 판단을 유보하는 캐릭터는 속 시원한 전개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히다가 추구했던 태도는 도대체 뭘까? 인간 사고의 양극단에 존재하는 명료한 결론을 나이브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나히다의 태도라고 본다. 역사에서 인간은 나이브한 양극단의 판단을 오고 가며 발전해 왔다. 극단적이거나 결연한 생각들은 스스로를 망가트리고 반대되는 생각의 결집력을 일으킨다. 그리고 반동적 운동을 일으켜 스스로를 무너트리는 결론에 이른다.


지나친 보수도 지나친 진보도, 지나친 낙관도 진나친 비관도 하지 않는 밸런스. 필요할 때만큼 필요한 지식을 선택하는 것이 나히다가 말하는 궁극의 지혜이자 인생이다. 많이 들어봤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용이 좋다는 건 모두가 잘 안다. 하지만 왜 우리들은 중용을 실천하지 못했을까?


1) 지식이 부족하다.

2) 극단적인 목소리의 이익

3) 한번 성공한 기억의 비용

4) 도덕의 넓은 스펙트럼과 인내의 비용


첫째, 판단에 필요한 지식을 알지 못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는데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인간의 학습능력은 정점을 찍은 뒤에 후퇴한다. 나중엔 사회가 유지되는데 필요한 학습은 전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단계에 접어든다. 학습이 따라가지를 못하니 판단은 잘못된다.


둘째, 극단적 주장의 이익. 중립적, 유보적 입장은 우리에게 더 큰 비용을 요구한다. 시간과 재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심리적 에너지도 필요하며 무엇보다 현실정치에서 극단주의자들의 당파적인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소련의 붉은 혁명의 지지자들은 혁명의 열정이 식고 난 뒤 굶주림과 독재자를 견뎌야 했지만 붉은 혁명의 반대자와 방관자들은 무덤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라.


셋째, 인간이 가지는 생각의 보수성. 한번 성공한 성공공식의 유효기간은 언제일까? 바로 그 사람이 망할 때까지다. 과거의 성공한 방정식을 인간은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불확실은 두렵지만 보수적 선택의 이익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보수적인 선택을 할수록 과거의 선택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더 힘들어진다.


넷째, 인간의 도덕의 원리는 보편적이지 않다. 유전적 bias와 후천적 경험에 의해 설정된 각자의 가치체계는 굉장히 복잡하다. 따라서 도덕의 현실적용은 조정과 상대방과의 융합이 필요하지만 인간은 그런 비용마저도 최소화하고 싶어 한다.


중용을 실천하려면 유연하게 가치체계를 바꿔야 한다. 매 순간 우리의 태도를 상황에 맞춰 바꿔야 한다는 사실은 부담감을 만들기도 만든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에너지를 아끼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쓰일 순간이 오면 불쾌감이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영원히 자신의 세계 속에서 타인을 평가하는 꼰대가 되고 만다.


우리 삶에서 중용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나히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극단적인 선택이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진정한 지혜는 그 극단을 넘어서는 데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상처받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히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의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균형을 찾는 용기를 준다. 이것이 바로 '운명은 궁극의 지식'이라는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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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중용의 메시지는 미디어의 내러티브에서 쉽게 채택되지 않는다.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고 감정적 고동을 만들어내지 않아 지루하고 현학적으로 느껴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이고 미디어는 미디어일 뿐. 극단주의가 많아진 세상에 보기 힘든 메시지로 감동을 준 수메르의 이야기를 한번 되돌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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