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태훈 Dec 27. 2019

에드 아스트라는 무슨 이야기일까

인생게임 속 의미 찾기 싸움

 에드 아스트라는 액션이나 공상과학적 요소에서 잘하고 싶었던 영화는 아니다. 계속되는 독백과 고증에 별 관심 없는 설정, 과장된 묘사들이 눈에 거슬리고 그래서 답답한 영화다. 그 때문인지 평론가 점수는 높고 팝콘은 낮은 게 영화의 작품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영화가 고증이나 시각적 즐거움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면 점수는 어디서 좋게 받았을까. 바로 끝없는 독백 속에서 나오는 캐릭터의 삶에 대한 프레임의 변화 그 내적인 드라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내적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프랑스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고 하니 더 할 말도 없다.


 내적인 드라마를 스토리를 통해 풀어써보자. 주인공의 직업은 우주인이고 우주인들은 작중 내내 감정을 억제하고 엄청난 규율에 시달리고 무덤덤하게 살 것을 요구받는다. 애초에 우주산업은 공군 관련 군수산업의 연속이기에 당연할 것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처럼 보인다. 그런 현실에서 주인공 로이 맥브라이드는 엘리트다. 주인공이 자기에 대해 고백하기를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그는 모범생이다.


 그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엘리트가 되기 위해 그는 일에 매달렸다. 애인으로부터는 관심이 없어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작중 내내 무덤 한 모습을 비추고 동료를 증오하는 마음도 독백으로 나온다.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다는 사실 인정하는 모습까지도 나온다. 그가 병적으로 외로운 생활을 스스로 자초했지만 그런 위태위태한 마음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은 '가장 낮은 심장박동수의 사나이!'라는 타이틀이다. 그는 마음을 꽁꽁 숨기고 살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웅의 아들로 기억해주고 심장박동이 낮은 사나이로 기억해준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삶의 방정식의 해다.


 이야기의 틀이 완성되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그는 병적인 삶과 마주하는 것을 예감한다.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아버지는 자신의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는 자신의 일을 긍정하기 위해 신을 동원하고 타인의 시선조차도 포기하고 완전한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사람이란 것이고. 반면에 로이는 자신의 일을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철저히 의식하면서 괜찮은 엘리트가 되는 길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로이도 아버지처럼 살았다면 어쩌면 일약 스타 우주인이 되었겠지만 지나가던 사람에게 그저 누군가의 아들로 평가받는 것은 그런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조금씩 위기가 다가온다. 이윽고 로이는 승승장구하던 엘리트에서 아버지를 유인해내기 위해 미끼로 전락한다. 로이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기에 그 사실을 괴로워하다가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그 때문에 쫓겨나고 그 대신 극 중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모습을 보인다. 바로 심장박동 체크에서 실패했을 때인데, 그 장면은 그가 높은 태양 가까이까지 날다 날개가 녹아 다시 인간의 장소-땅-으로 향해 떨어지는 신화 속 영웅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추구하던 이상에서 상처를 입은 영웅은 내적으로 성장하고 더 나은 삶의 형태를 탐구한다. 


 그리고 더 큰 위기가 온다. 해왕성으로의 우주여행 중에 그는 철저히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공간에서 지내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응답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집착으로 저버린 모든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그는 후회한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것을 후회한다. '조그마한 하더라도 그냥 사람과 소통하며 살걸,  조그마한 만족과 조그마한 삶을 긍정하며 살았으면 좋았을걸. 아버지처럼 지구를 혐오하고 어딘가로 도망치기보다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할걸.'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침내 만난 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그의 심정 변화에 쐐기를 박는다. 아버지는 강고하게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려고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도덕을 거부하라는 말까지도 한다. 평소의 그였다면 무덤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무시했을지도 모르지만 여행 속에서 깨달음을 반영하듯이 아버지를 다시 지구로 돌려보내려고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구출하려고 한다. (아버지가 지구로 돌아가 봤자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장명은 성공이나 위신보다 개인적 관계에 무게를 둔 것을 반영한다.) 아버지의 독단적인 행동은 점점 그를 반성하게 한다. 과연 아버지가 향하려고 했던 그 길에 그 정도의 의미는 있었던 걸까. 배우자와 자식마저도 버렸다는 아버지의 삶이 말이다.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로이는 변한다. 커리어보다는 주변 사람을 사랑하고 engage 하는 태도를 선택한 것이다. 지구에 내려와 손을 잡고 나가는 모습, 그리고 카페에서 독백에서 그가 인생에서 사랑을 선택했음이 시사된다. 침착으로 대변되는 그의 커리어적 강점도 이제는 무너졌을 것이다.  



 이 영화가 프랑스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삶에 대한 프레임워크가 그들이 사랑하는 프레임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커리어에 매진하고 영웅적 삶을 추앙하는 게 즉 시장경제의 영웅을 옹호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이라라면, 삶의 여유와 철학적 사고를 통한 의미를 추구, 나아가 engagement를 강조하면서 영웅보다는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삶의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는 게 프랑스인들이 역사와 철학을 통해 보여준 삶이니까 말이다.


스피노자는 "철학적 삶과 부유-명예를 추종하는 삶을 비교했을 때 전자에 더 큰 이득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문일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독신인들이 사회에서 받는 차별과 모욕을 생각하면 그렇다. 나는 에드 아스트라에서 스피노자의 사유가 느껴졌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근거는 찾지 않아도 흔하다. 에드 아스트라는 그런 위기에서 어떤 것이 위태한 21세기 현대인에게 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삶의 모델을 제시했다. 자신의 꿈을 설계했지만 혼자였기에 그 사회적 맥락이 붕괴되어 광인이 되어버린 아버지 맥브라이드와 자신의 꿈도 없이 그저 주변 사람들에 맞춰 살다가 우주 끝에서 광인이 될뻔한 로이 맥브라이드. 두 사람의 다른 엔딩을 통해서 말아다.

 

 영화가 제시하는 삶의 프레임은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양극단의 삶에서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삶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막중한 이 게임에서 사람은 양극단의 유혹에 맞서야 한다. 에고가 없으면 커리어 시장에서 매력적이고 정치적 손실을 피해 갈 수 있지만 허무하다. 반대로 에고가 강하면 시장에서든 정치에서든 비호받지 못하는 대신 스스로 삶을 긍정할 수 있지만 극단으로 갈수록 혼자이기 때문에 사회적 맥락을 상실하여 삶의 의미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그 균형점을 찾는 것, 매번 새로운 지평선에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게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우리가 꾸준히 해야 할 과제임을 이 영화가 말하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영화 '에드 아스트라'였다.

작가의 이전글 난 영양가 없이 매달릴 때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