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D+4
11월 29일 일요일까지 마라톤 대회에서 열심히 달렸다면 그 이후 사흘 동안은 회식 자리에서 열심히 달렸다.
열심히 달리는 건 두 다리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_^
덕분에 나흘이 지난 지금 주말 달리기 글을 쓴다.
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나는 드디어 가을의 전설이라는 춘천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이번 대회는 10km와 풀코스 두 종목만 있어 신청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남편이 춘천에 같이 가서 완주하는 본인 모습을 찍어달라는 말에 이왕 가는 김에 '가을의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춘천마라톤 코스 구경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풀코스를 신청했다. 하프 거리 이상으로 뛰어본 경험도 없고 풀코스 훈련도 하지 못해 이번 풀코스 출전 목표는 완주가 아닌 하프보다 조금만 더 뛰고 회차 버스를 타고 와 남편의 완주 순간을 찍는 것으로 설정했다. 대회 날이 다가올수록 컨디션 난조로 기존 기록에 못 미칠까 걱정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기록과 거리에 대한 부담 없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즐길 생각에 마냥 행복했다. 대회장에 도착해 워밍업으로 스트레칭과 10분 정도 달리기하던 중 남편이 뜬금없이 너는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며 왠지 본인의 완주 순간을 못 찍어줄 것 같다고 걱정했다. 염려하는 남편에게 23km 정도 달리면 대략 2시간 30분 정도 되니 그때 바로 회차 버스를 타면 무조건 너보다는 일찍 도착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서로 각자의 출발선으로 향했다.
코스 초반에는 누구나 기운이 넘쳐 오버 페이스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세워둔 23km 목표도뛰지 못할 수 있으므로 출발 신호와 함께 1km당 6분 30초~40초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렸다. 달리다 보니 출발선부터 10km까지는 오르막 내리막이 빈번했다. 다행히도 욕심내지 않고 내 페이스를 유지했더니 호흡도 편하고 무릎에도 무리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경사에 신경 쓰다 보니 10km까지는 왜 춘천마라톤 코스가 '가을의 전설'이라고 불리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10km를 넘어서자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잔잔한 의암호와 그 위에 비친 빨강, 노랑의 화려한 단풍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 의암호를 캔버스 삼아 단풍나무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 사진을 잘 안 찍는 나지만 이건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몇 컷 찍었지만, 그 감정이 그대로 표현되는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나마 초점도 안 흔들리고 나름 괜찮은 사진을 남겨본다.
그 뒤로 하프 지점까지 춘천의 이름다운 가을 풍경은 스마트폰 사진 폴더가 아닌 내 눈에 고이고이 빠짐없이 담았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단풍놀이였다. 그리고 전에는 내 목을 축이기 급급해 급수대 봉사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 대회에서는 '파이팅', '이것 좀 드시고 뛰세요', '멋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급수대 봉사자들 응원 목소리가 유난히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들렸다. 아마도 이전 대회는 조금 더 빠르게 완주하자는 것이 목표라면 이번 대회는 속도에 신경 쓰지 말고 가을의 전설을 즐기자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달리면서 놓쳤던 순간을 이제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달리기를 마음껏 즐기다 보니 어느새 목표 지점인 23km에 도착했다. 나의 목표 거리는 달성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중도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대회 공식 기록은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23km 도착지점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러닝 앱을 정지했다. 1km당 6분 27초 페이스. 달리는 동안 숨이 차지도 몸이 아주 힘들지도 않게 잘 뛰었다. 솔직히 더 뛸 수도 있었지만 23km를 지나자마자 회차 버스 대기 장소와 그 대기 장소 너머 바로 오르막 코스가 보였다. 나는 그 장면을 마주한 순간, 망설임 없이 회차 버스 대기 장소로 몸을 돌렸다.
대기 장소에는 나를 제외한 네 명이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들은 담배를 나눠 피며 훈련 부족이 부족했다, 오버 페이스였다, 새 운동화 적응이 안 되었다 등등 왜 중도 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지를 진지하게 얘기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참가자 중 나처럼 계획적으로 중도 포기를 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엉뚱한 계획이지만 왠지 아주 만족스럽게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이제 회차 버스만 도착하면 된다.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되었으면 좋으련만.
금방 온다던 회차 버스는 1시간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남편 완주 순간 사진은 찍지 못하겠다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이 속한 그룹이 내 그룹보다 10분 일찍 출발했고 남편 컨디션이 아무리 나빠도 4시간 30분 전에는 무조건, 확실히 꼴인 점에 도착한다고 하면 대략 13시 40분쯤 골인 지점을 통과할 것 같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벌써 13시 45분을 가리켰고 여전히 회차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남편 사진 찍기 계획은 실패했다. 목표 거리 내 시간은 달성했지만, 계획에 없던 회차 버스 대기 시간에 내 발목이 잡혔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회차 버스가 자주 온다는 남편 말만 믿고 대안을 세우지 못한 내가 바보 같았고 내가 사진을 못 찍어줄 거라는 본인 예상이 맞았다며 거들먹거리는 남편의 얼굴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2시쯤 회차 버스가 도착해 난 14시 20분, 출발 한 지 다섯 시간 만에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남편은 이미 완주하고 나를 찾고 있었다. 남편은 예상했던 결과라며 웃어넘겼지만, 그 뒤부터 집에 올 때까지 남편의 풀코스 과정을 들어야 했다
춘천 마라톤 이전 나의 달리기는 어떻게 하면 빨리 달릴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숨이 덜 찰까? 어떻게 하면 달리기가 쉬워질까?라는 생각에 어렵고 힘들었는데 이번 대회를 통해 달리기의 즐거움을 배웠다. 달리는 동안 기록과 완주에 대한 부담감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자연과 하나 되어 달리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감사했다. 내 생애 풀코스 완주 계획은 없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다. 2024년 가을 춘천에는 '주희의 전설'이라는 새로운 전설이 탄생할 것이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지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