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답 하나 (2)

쓰기 잡설

by 땡자

작년 겨울부터 ‘오신나’ 글쓰기 모음에서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항상 과다 의욕으로 하루 만에 모든 글을 써 내릴 기세였다. 허나 그 기세는 노트북을 켜고 한글 문서를 열기 전까지라는 기간 한정이다. 그리고 ‘제출 날짜는 못 지킨다.’라는 조건이 내 글쓰기의 디폴트 값이 되어버린다.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라며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OO일까지 제출하세요.’라는 반장님의 재촉에도 ‘시간아. 넌 흘러라.’라며 느긋했다. 그런데 이미 써야 할 글을 모두 제출한 동기, 80% 이상 제출한 동기, 제출 기한을 지키는 동기들이 보였다. 나보다 바쁜 그들도 계획대로 해 내는데, 나로 인해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곧바로 내가 쓴 에필로그를 다시 읽었다. 읽는 동안 총 몇 꼭지를 쓸지, 그 꼭지당 어떤 내용을 쓸지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 기간을 정하고 내 능력으로 가능한 분량으로 소분하고 일정을 짰다. 그 덕분인지 계획한 대로 초고를 완성했다. 완성이라기보다는 ‘기간 내 써냈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이게 뭐라고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다.


나의 부푼 마음과 달리, 브런치스토리에 발행된 글은 잠깐의 하트 자국을 남긴 채 휘발되었다. 하긴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플랫폼에서 내 글은 우주의 먼지보다 더 미세하니, 관심이 없는 게 당연하다. 머리는 이해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쓰레기 같은 초고라도 잘 쓰였는지, 흥미로운지, 내 의도대로 읽히는지 궁금했다. 좁고 가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나는 내 글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프로그램이 대신해줄 수 있겠다 싶어 ChatGPT에 글을 업로드했다. 평소 내가 ChatGPT 교육을 잘했는지, 가스라이팅을 잘 한 건지, 듣기 좋은 말만 내뱉는다. 당장 계약서를 써도 될 기세였다. 기분은 좋았지만 믿기 어려웠다. 나는 결국, 인간의 평가가 더 궁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 말고는 솔직하게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 가족 중 책을 읽거나, 달리거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 폭을 좁혔다. 남편, 큰아들, 작은 언니. 나는 이 셋 중 혹평을 해도 내가 상처 덜 받는 사람이 누굴까 고민했다. 작은 언니, 나의 대나무 숲인 그녀라면 어떤 피드백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언니, 초안은 모두 쓰레기라고 불리니까 내용이 어떤지 읽어봐 줘

-아우 이런 영광을!!! 나에게!!!


타국에서 부모님을 부양하며 종일 일하고 퇴근한 언니에게 미안했는데, 언니는 내 글을 바로 읽고 그곳 기준,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장문의 피드백을 보내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언니의 답글을 읽었다. ‘내 인생에 벌써 끝이야??? 하며 읽은 책은 이것이 처음이다!’라는 첫 문장에서 내가 글을 쓰느라 보낸 시간과 언니가 내 글을 읽느라 내준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 이후 언니의 피드백을 다 읽고선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몽글거림에 어색해 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장난스럽게 했다.



네가 표현한 묘사는 저절로 내 눈앞의 풍경으로 펼쳐졌고 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
(중략)
나는 너에게 자극받고 너에게서 배운다. 그것에 매우 대단히 감사하다.
이 글을 읽고 눈물 흘린 독자는 나 하나일 테니.

-나의 대나무 숲, 작은 언니의 피드백 중에서-



언니에게 피드백을 받은 다음 날. 그날은 진상 고객의 항의 응대로 오전 시간을 날리고 결론 없이 시간만 축내는 네버엔딩 회의로 오후 시간을 날려 정작 내가 해야 할 업무가 쌓여 칼퇴를 포기하게 된 날이었다. 뒤늦게 엄마가 보낸 텍스트를 확인했다. 갑자기 참았던 감정이 북받쳤다. 사무실이라 참으려고 애썼지만, 눈에서 땀이 났다. 이 표현은 큰아이가 여덟 살쯤, 울고 있으면서도 ‘눈에서 땀이 나서.’라고 말하던 기억에서 가져왔다. 그 이후 나도 자주 쓴다.



막내가 사는 동네 처음부터 왠지 좋았다.
빠짐없이 돌아본 것 같은 마음이다.
글로도 구석구석 잘 보았다. OO구 OO동 정말 좋은 동네구나.
2026년부터 주님 은총 가득한 집에서 가족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아빠 엄마 마음 깊이 주님께 감사 기도드리며 살리라.
우리가 제일 감사하고 사랑하는 손주들 잘 키우기 위해
건강하고 행복해라.

-엄마의 텍스트 중에서-



다시 그날로 돌아가, 퇴근길 차 안에서 언니의 피드백과 엄마의 텍스트를 다시 읽었다. 멀리서 말로만 효도하는 나와 달리 언니는 묵묵히 아빠, 엄마를 부양하며 모든 부분에서 가장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런 언니가 일주일 중 하루 쉬는 날에 내 글부터 읽고 긴 피드백을 건네준 언니의 모습을 상상했다. 성경책도 겨우 한 장 읽는 엄마가 돋보기를 써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로 된 내 글을 밤새워 읽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했다. 읽는 동안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직접 다녀온 기분이 드는데, OO구청장은 상도 안 주고 뭐 하냐며 칭찬을 해주셨다. 조건 없는 엄마의 칭찬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그녀들이 나에게 남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이게 뭐라고. 어디 내놓을 수 없는 하찮은 글인데 내 딸이, 내 동생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시간을 내주는 건지. 가족이니 아끼고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말로 그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의 이 허접한 글 하나로 서로의 새로운 얼굴을 보았다. 비로소 제대로 된 소통법을 찾은 것 같았다. 그 소통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정해놓은 글감은 없었지만, 무엇이라도 계속 써서 그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생각에 마음이 꽁닥꽁닥 설렌다. 아마 정의되지 않았던 몽글거림이 바로 이 설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쓰기’ 정말 좋아하지 않는데 자꾸 쓰고 싶다. 이 설렘을 계속 느끼고 싶다.


좋아하지 않는데 계속하고 싶은 것.

어쩌면 그 모순 때문에 나는 계속 쓰게 될 것 같다.



#쓰기잡설

#소통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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