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 가면 가장 먼저 축의금 테이블부터 찾는다. 축의금을 내지 않고 들어서는 건 무임승차 같아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마음이 불편해져 버린다. 결혼 당사자와 나 사이에 걸맞은, 식장의 밥값에 알맞은 가격은 얼마일까. 테마파크나 전시회처럼 입장권 가격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축의금은 금액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듯 하나 보이지 않는 가격표에서 자유로운 하객은 없다. 받은 게 있다면 잊지 않고, 함께 온 사람 몫까지 빠트리지 말고, 짝수는 피해야 하는데 십만 원은 괜찮은 통념을 거스르지 않으면 결혼식이 발급한 보증서와도 같은 식권 한 장을 떳떳이 손에 쥘 수 있다.
사회초년생 때는 ‘사랑의 결실에 대한 축하의 의미를 돈으로 전하고 그 대가로 밥 먹을 권리를 얻는 교환 과정’이 민망하고 낯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내 일이 되자 이전 세대보다 더 나은 세대로 거듭나고 싶던 자아는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에 스쳐간 한때의 치기로 사그라들고 말았다. 평소 우리나라의 허례허식 결혼문화를 비판하며 스몰웨딩을 주장하던 엄마도 상견례에서는 그런 건 염두에도 안 두는 사돈댁 분위기에 눌려 말도 못 꺼냈으니 뭐. 번잡하지 않은 장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감당하려면 스몰로는 안 되고 라지는 되어야 하는데 라지가 되면 번잡함은 피할 길이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게 내가 치러야 하는 결혼의 현실이었다.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낸 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보통의 예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건 감각이 없고 시대의 흐름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아한 식에 드는 예산이 버겁고 그동안 뿌리고 다닌 부조금을 자연스럽게 거둘 방법이 마땅하지 않아서였다.
부조금 테이블은 자연스러운 부조를 위한 최선의 방책인 셈인데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해진 것일 뿐, 외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기이하고 이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보는 코앞에서 봉투에 돈을 넣는 일은 아무리 여러 번 해봐도 적응이 안 되었다. 인간 대 인간의 교류가 멋쩍은 지점에 인공지능을 넣어야 한다면 이 부조금 테이블만 한 자리가 없을 테고, 축의금 앱이 개발되어 핸드폰으로 송금하고 모바일로 식권을 받을 수 있으면 결혼식도 조금은 덜 어색해질 텐데. 당분간은 이 아날로그적인 어색함을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잃어버릴세라 소중히 간직해둔 식권으로 찾아간 식당은 한 시간 단위로 이어지는 식 전후로 밀려드는 하객 수백 명이 뒤엉켜 상당수가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었다. 잔칫날에는 사람이 많아야 흥이 나고 체면이 서는 법이라는 어른들의 믿음을 따라 결혼식장의 북적거림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여기는 잔칫날보다는 전쟁터에 가깝다. 세팅된 음식 앞으로 줄이 길게 이어져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정장으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밥 한술 먹겠다고 줄 지어 기다리는 모양새에는 아이러니하고 애꿎은 황금주말의 비극이 어려 있었다.
바짝 마른 돼지고기에 두꺼운 튀김옷이 덧 입혀진 탕수육과 전자레인지에 삼분 돌리면 완성되는 풍미의 스파게티, 해동이 덜 되어 모서리가 딱딱하게 언 참치회로 배를 채웠다. 내가 낸 축의금으로 먹을 수 있는 예식장 밖의 신선하고 정갈한 음식들이 떠올랐지만 메뉴에 대한 감상은 속으로만 삭혔다. 오늘 나는 미슐랭 가이드 탐방을 온 게 아니라 한 남녀가 꾸린 가정을 축하해주러 온 하객일 뿐이다. 남의 경사에 맛이 있니 없니 따지면서 불평불만 재 뿌리지 말고 조용히 먹다 얼굴 비추고 가면 그만이다.
어느 결혼식에 가도 낸 만큼 잘 먹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어서 어느새 결혼식은 약간 손해 보고 먹는 밥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진 지 오래이나 이게 과연 하객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이자 인간의 도리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아마도 나의 결혼식도 그랬을 테니 죄송할 따름). 물론 결혼식은 밥이 주 목적인 자리는 아니다. 하객 입장에서는 뻔한 예식 순서에 별다른 감동이 없고 그나마 와 닿는 게 밥이라 ‘하객들에게 중요한 건 식이 아니라 밥’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뿐, 밥을 먹기 위해 주말에 공들여 차려 입고 먼 길을 오는 건 아니다. 인사하러 온 김에 끼니 때우고 가는 거니 퀄리티가 떨어지든, 서비스가 엉망이든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고 만다. 직장동료와 친지들이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그들이 대접한 결과를 나무랄 수 있을까?
부당함을 느끼는 지점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업체의 경영방식에 있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알바를 일일 고용해 최저시급을 지불하고, 질 떨어지는 재료를 감추기 위해 조미료를 과다하게 사용하며 적정인원을 초과하는 하객을 무턱대고 받아 버린다. 안하무인격의 방침이지만 다들 결혼식은 으레 그러려니 하니까.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최저가를 따지며 꼼꼼히 살피고 소비자의 권리를 중요시하는 요새 사람들이 결혼식장에서는 모두 눈 감고 호구 노릇을 해준다.
그래서 어느덧, 결혼식은 웬만해서는 가고 싶지 않은 행사가 되어버렸다. 청첩장은 금전적, 정신적, 시간적으로 예고된 손실을 기별하는 통보이자 다가오는 주말이 익숙한 틀로 스케쥴링되는 식상한 이벤트로의 초대장이 되어버렸다. 뻔하고 맛없고 정신없는 북새통에 시달리기 위해 평일을 버텨온 게 아니라는 억울함은 과거의 빚이나 미래의 빚에 대한 탕감으로 교환되어야 하니까. 모처럼 어린애가 되보려고 했던 주말에 정장을 꺼내 입고 어른인 척, 결혼식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