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돈걱정

네일 받는 여자

by 에브리데이미

월급에서 이것저것 빼고 나면 꾸미는데 지출할 수 있는 돈은 과격한 충동을 용납하지 않는 액수만 남았다. 만 원, 삼만 원짜리는 괜찮은데 십만 원짜리는 안 되는 충동. 월말에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니려면 적당히 충동적이게끔, 정신 차리고 전략을 세워야 했다. 투입비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인상의 전체를 좌우하는 지분이 큰 옷이나 헤어, 아니면 오래 쓰는 가방이나 신발을 바꾸는 게 효과적이었다. 공들여 발라도 금세 까지고. 젤 네일이라고 해봤자 한 달이 못 가 잘라내야 하는 손톱에 돈을 쓴다는 건 눈 깜짝할 새에 흐르는 시간 사이로 돈이 새는 거나 마찬가지로 아깝게 느껴졌다.


요새는 셀프로 붙이는 네일이 워낙 잘 나와서 종종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큐티클을 제거해야 했다. 지친 하루의 끝자락에 이르면 간신히 마스크 팩 하나 붙일 의지가 남아 있었고 실은 그마저도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해도 해도 남아있는 일처리를 하다 보면 손은 정작 자기를 돌볼 틈이 없었다. 밀어야지 밀어야지 하면서도 자꾸 잊게 되는 큐티클은 밀어주면 자라고 밀어주면 또 자랐다. 시시포스의 미용 노동과 같은 품이 드는데 외모가 눈에 띄게 개과천선하는 부위도 아니라 포기가 쉬웠다. 손톱은 결국, 피부 관리와 모발 관리에 밀려 맨 나중의 부위로 남겨졌다가 결국 그대로 남겨지고는 했다. 세수는 하고 머리는 감고 살아야 하지만 손톱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기에 그냥 안 하고 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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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네일은 생존을 위한 필요가 아닌 자기만족과 과시를 위한 소비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현대사회의 고도로 축적된 잉여생산물의 상징과도 같았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빈부의 차가 잉여생산물의 양으로 측정되었듯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창고에 ‘남는’ 곡식이 있어야 재력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듯이. 손톱까지 멋 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의 여유가 있다는 걸 암시했다. 샵에서 관리받은 손톱을 가진 여자는‘생계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반짝거리는 손톱이 대신 외쳐주는 듯 했다.


길거리에서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네일샵을 곁눈질해보면 전문가에게 손을 맡긴 채 손톱이 다듬어지는 시간을 권태로운 표정으로 흘려보내는 여자들이 있었다. 타자를 치거나, 전화를 받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접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천 위에 누워 조목조목 다듬어지는 손의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젤 네일 기본: 회원가 30000원/ 비회원가 35000원’을 지불해도 마땅한 가치가 있는 서비스일까? 거기에 파츠를 올리거나 무늬가 들어가면 십만 원까지 하던데. 손가락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재력보다도, 자기만족을 향한 거침없는 배짱이 더 대단해 보였다. 손톱 위에 장식을 얹는 것으로 잠시나마 기분을 ‘전환’하고 그 잠깐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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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기분을 그렇게까지 눈치 보면서 살 형편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남 기분 맞춰 준 대가로 번 돈을 내 기분 맞추는데 쓰는 건 제로섬 게임인 거 같아 허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씀씀이를 지적하고 있다는 건 이미 그에 대해 꽤 관심이 많다는 소리였다. 아예 관심도 없었다면 하든 말든,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내 기분의 비위를 맞춰주고 싶은 날은 기어코 도래하고 말았다. 가라앉은 기분을 뭘로 일으키면 좋을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마치 이 순간의 나를 위해 그 자리를 임대했다는 듯이 거기 그 자리에 있는 네일샵. 아세톤 향과 캔들 향이 뒤섞여 알싸하게 달콤한 가게 안으로 들어섰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네일을 하는 언니들(나이에 상관없이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는 분위기)은 대게 두 종류로 나뉘는 듯했다. 손님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면서 단골을 삼으려는 언니랑 기계적으로 작업만 하는 언니들. 나는 후자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안 친한 언니랑 친한 척 대화를 나눠야 하는 시간은 낯가림을 극복해야 하는 사회생활의 연장처럼 느껴져서다. 오늘 처음 보는,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보지 않게 될 이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앉아 어떤 대답을 해야 어색하지 않을까 궁리하다 보면 내가 관리받으며 쉬러 온 건지 감정노동을 하러 온 건지 헷갈려서 억울해졌고, 그런 불편함을 계산하며 따지고 있는 스스로에게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돈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일말의 불편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다.


(사실 이건 성격 문제이기도 한데 미용실이나 마사지샵, 네일숍 같은 데를 들어갈 때 ‘대화를 좋아합니다’와 ‘조용히 있고 싶습니다’라는 표를 나누어 선택해 들어가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관리하는 분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말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 손님도 자기에게 맞는 분위기에서 편안할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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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큐티클 하나만큼은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제거되었다. 집에서 혼자 다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양의 각질이 뭉쳐 나와 창문 새시의 쌓인 먼지를 일쾌에 닦아내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해졌다. 깔끔해진 손톱에 색을 바를 차례가 되면 언니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예정된 지루함에 대한 짜증을 애써 숨기며 묻고는 했다.


“어떤 색 할 거예요?”

“보라색이요.”


물론 보라는 다 같은 보라가 아니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중 한 가지 계열의 색을 정하면 다시 거기서 세분화된 색으로 골라야 했다.


“쨍한 거?”

“아니요. 옅은 거.”


눈앞에 1번부터 백번대까지 좌르르 나열된 인조손톱 중, 바이올렛 파트가 펼쳐졌다. 핑크에 가까운 보라부터 블랙에 가까운 보라까지, 그러데이션으로 줄지어 있었다. 매번 이 까다롭고 하찮은 고민을 기다려야 하는 언니들에게는 지겨운 반복이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한다는 건 그게 아무리 사소한 선택일지라도 고민되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심각해지고 말았다.


옅은 보라를 바르든, 짙은 보라를 바르든. 머리를 단발로 하든 긴 머리로 하든. 파마를 하든 생머리를 하든.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로 사든 발목까지 오는 스커트로 사든. 인생의 향방에 미치는 갈림길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선택을 하려고 ‘이달의 미용비’를 쓰는 게 아니었기에 이 순간의 나는 우스울 정도로 진지해지고는 한다. 선택의 순간에 쿨해질 수 없다는 것,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건 돈을 쓸 기회가 몇 번 없는 사람들의 숙명과도 같은 태도다.





우주의 컬러를 정해야 되는 결정권자처럼 채도의 차이가 미칠 외모의 파장을 고려해 본 결과, 라벤더로 결정했다. 오늘따라 유독 그 색이 예뻐 보였던 이유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봤던 어느 연예인의 네일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우주는 이토록 줏대가 없고 남 따라 하기를 잘했다.


붓으로 한 콧 바르고 굽고, 한 콧 바르고 굽고. 총 세 콧을 바르자 손톱이 연한 보랏빛으로 경화되었다. 감정을 착각하게 하는 일종의 착시효과라는 걸 알면서도 화색이 도는 손을 보니 기분까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젤 네일이라 찍히지는 않겠지만 조심스럽게 지갑을 열어 결제를 마쳤다.


가게 밖, 거리는 그대로인데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자꾸 눈앞에 스치는 손이 좋아서 그걸로 뭘 하든 대단히 괜찮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냥 손이 아니라 라벤더로 물든 손이 잡는 물컵, 라벤더 손이 찍는 교통카드. 흑백의 일상에 열 개의 손톱이 열 개의 하트를 날리는 것 같았다. 이 주 뒤면 벗겨질 콩깍지이지만. 지금은 이주 전이니까. 잠시 착각에 빠져 있어도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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