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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Nov 20. 2020

안 팔리는 물건

과 재고로 쌓인 눈물에 대해

 길을 가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려 보게 된 텅 빈 가게 안. 점심시간이 가까운데도 손님이 없다. 밥을 차릴 일도, 치울 일도, 계산할 일도 없어진 사장님과 종업원 한 분이 각자의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다. 마치 고요한 갤러리에 놓인, 노동의 부재를 상징하는 조각상 같다. 그러나 여기는 갤러리가 아니라 식당이었다. 젓가락 집는 소리가 신명 나게 딱딱 거려야 하고, 밥알에서 퍼지는 온기가 뜨끈하게 피어나야 마땅한 곳.


 소음과 온기, 손님이 빠진 식당은 스산하고 적막해 보였다. 이런 고요로는 만만치 않은 임대료를 감당하기 힘들 거라는 건 지나가는 손님도 알만한 사정이었다. 울고 있는 건 아니지만 웃고 있는 것도 아닌, 어쩌면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를 무표정한 사장님의 얼굴이 마음에 좋지 않게 와 닿았다. 


 나와 상관없는 불행이지만.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유리거울 앞에 서면 내 얼굴만 보이는데 
타인의 아픔 앞에 서면 내 아픔이 비춰 보이듯이. 
각기 다른 사정 간에도 고통은 저들끼리 닮아 있었다.


 마트 한편에 쌓인 잘 안 팔리는 샴푸 같은 걸 볼 때도 그랬다. 마개를 풀고 펑펑 눈물을 쏟고 싶은 걸 아무도 풀어주는 이가 없어 꾹 참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샴푸의 한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여기, 이 통에 500ml만큼 쌓여 죽을 날만(유통기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고작 샴푸 한 통에 대해 이토록 비극적인 서사를 쓴 건 마음속 어딘가에 놓인 슬픔, 절대다수의 무관심 속에 외면당했던 기억이 건드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잘 안 팔리는 샴푸를 잘 안 팔리는 나에게 대입해 위로를 얻는 마음은 뭘까. 괴로움이 투영된 대상에게 대리 눈물을 흘리게 하면 위로라는 종착지 근처에라도 가게 되는 걸까. 


 어쩌면 측은지심이란 고통 세포들끼리 유대를 맺으며 치유의 과정을 밟는 정서적 생존 양식 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는 과정이 언제나 순수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건 아니었다. 어떨 땐 고통 세포들끼리도 패를 나누고 층을 짓는 분위기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만큼 힘들지는 않잖아." "내 사정이 저 사정보다는 낫네." 하는 식의 뒤끝이 께름칙한 위로 말이다. 나보다 힘든 이를 보며 다시 힘을 내는 건 세상 사는 지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픔마저도 등급 지으며 남의 아픔을 도구화하는 것 같아 온전히 내 마음에 드는 위로법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내 아픔도 들키기 싫었다. 누군가 건넨 위로를 받을 때 동정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코끝을 스치면 자존심이 상했다. 잊고 있던 문제였는데. 갑자기 건넨 위로가 표지판이 되어 벗겨진 상처에 알코올이 '화악' 뿌려지는 것처럼 따갑게 자각되기도 하고. 묘한 패배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어감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에 담긴 동전 한 닢을 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공감은 상대의 마음과 하나 되는 건데 동정은 '너와 나는 다르다'라고 구분 짓는 거였다. 공감어린  위로를 만나면 고통이 씻겨나가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적절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건 아니며 안 하니만 못한 위로를 건네는 경우도 꽤 된다는 걸, 크고 작은 불행 뒤에 알게 되었다. 


 아픔을 가중시키기도, 기적을 낳기도.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타인의 위로는 기본적으로는 고마우면서도
고마움 이상의 감정이 복잡하게 일지도 모르는,
고맙고도 불편한 선물이었다.


 (아마 진심으로 불편한 건 위로가 가리키고 있는, 껄끄러운 내 처지겠지만 말이다.)


 때문에 나는 익히 아는 불편함을 선물하는 꼴이 될까 봐 몸을 사린 나머지, 고통받는 타인을 대하는 법에 있어 여전히 미숙하다.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어린이에게는 기부금을 보내면 되고,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일회용품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협력하면 되지만(매번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최소한 방법만은 단순 명료하게 제시된) 고통을 겪는 지인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한다. 함부로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어 갓 태어난 갓난아기 앞에서 하염없이 손만 씻는 손님처럼 한참을 머뭇거린다.


 남의 고통은 남의 아기만큼이나 다루기 어렵다는 걸, 아기처럼 약해진 상대의 마음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깨닫는다. 많이 해보지 않은 일이라 안 그래도 어려운 일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도 깨닫는다.  낮에는 사람들과 놀다가도 밤에는 잠을 자야 크는 아기처럼. 어떤 고통은 적극적으로 아는 체를 하고 도와야 하지만 어떤 부분은 모르는 척 이불만 덮어주고 가듯 지나쳐야 하기에. 모른 척 덮어 줘야 할 부분을 열어젖히고 있는 건 아닌지. 끝자락을 슬그머니 들추며 불쾌한 염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조마조마하다.


 알아줘야 할 것과 모른 척해줘야 할 것. 그 둘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얻어 오해의 소지가 없는 위로를 건네는 게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고 주위에 바라는 욕심 어린 기대다.


 인간관계에서 '예민'이라는 단어는 종종 기피되고는 하는데,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만큼은 적용해도 좋은 것 같다.
타인의 기쁨에는 대범하고 
타인의 고통에는 예민한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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