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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Nov 10. 2020

사치는 그렇게 일상이 된다

소비심리에세이

 마트에 가면 고기 코너에 이르기 몇 발짝 전부터 마음의 기류가 팽팽하게 당기는 걸 느낀다. 한우를 보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가 작동하면서 생긴 긴장감이다. 혹시나 튀어 오를지 모를 충동의 한 귀퉁이를 브레이크 밟듯 지그시 눌러 주는 정도의 신경을 쓰면서 카트를 몰아간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사치의 기준이 있는데 거기에 한우는 포함되지 않는다. 사치를 부릴 돈을 소고기에 쓰지 않는 것. 그게 내 소확행의 기준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치는 ‘필요 이상의 돈을 쓰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한 삼십 년 전의 사회에 어울리는 해석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다. 2020년도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다수는 필요 이상의 물건을 가지고 있고, 필요 이상의 음식을 먹지만 자신이 특별히 부자라거나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에 비해 많지 않아 보이고 나 역시 그런 편이다. 집에 쌓인 물건과 한 달 간의 씀씀이를 돌이켜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누리는 풍요를 '인정'하게 될 뿐.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누군가의 사치를 부러워하며 보내지 않았나 싶다.


 지구의 해수면이 높아지는 현상을
뉴스에서 전해 듣기 전까지는 체감하지 못하듯이.
마음먹고 살펴보지 않으면 과거의 불편은 잊기 마련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풍요의 해수면에 둔감하기 쉽다. 

 한때 허영끼 어린 사치의 대명사였던 스타벅스가 이제는 딱히 사치랄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문화가 된 것처럼. 예전과 비교하면 한결 여유로워진 삶조차 어느새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도저히 '사치'라는 걸 부리기 힘든 형국에 이르고 마는 것 같다. 진화된 사치가 보편화되어가는 느낌이랄까. 업그레이드된 신제품 출시나 새로 개장한 리조트 소식 같은 걸 들을 때마다 사치의 미덕인 '돈으로 사는 만족감'이 점점 비싸지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는 한다.


 

 고급이라 생각했던 브랜드가 흔해지면 더 고급인 브랜드가 소개되고, 이전에 누리던 사치는 아우라를 잃은 채 새로워진 만큼 가격도 올라간 후발주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는 한다. 스타벅스가 아닌 스타벅스 리저브, 올리브 오일이 아니라 유기농 트러플 오일, 그냥 스마트폰이 아니라 접히는 스마트폰 등. 이미 좋은 것들이 점점 더 좋아지는 와중에 높아진 눈은 가진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하기 쉽다. 


 돈이 많았으면 하는 이유는 그런 내적 갈등이 덜하지 않을까 싶어서고, 내 안에 이는 비판에 대해 수긍하고 싶을 때는 수긍하면 되는 자유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자유는 곧 몇몇 아이템만 소확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좋아하는 것들'까지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 이어질 테니까.




 현실의 나는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는 포기하는 삶을 꾸려가면서 '적당히 좋아하는' 소고기를 인생의 후순위로 밀어 놓는 전략을 쓰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한우는 제값을 하는 고기겠지만 육질에 예민하지 않은 내게는 호주산까지가 마지노선이고 여기서 아낀 돈은 원할 때마다 자유롭게 카페에 갈 수 있는 값으로 비축해 놓는 것이다. 포기해야 하는 게 '고작' 한우라는 사실에 안도할 만큼 고기의 레벨에는 큰 미련이 없는 반면, 커피 한 잔이 당길 때 카페에 들어갈 엄두가 안 난다면 ‘궁핍’이라는 단어를 찬물처럼 뒤집어쓴 기분이 들 것만 같다.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커피를 포기하고 한우를 사는 게 맞을지 모르지만 단백질보다는 내 기호와 감정을 먼저 고려해 선택할 수 있는 상황. 그 자체가 사치스럽고 그로 인한 만족감이 호사스럽다. 


 있으면 좋은 것들을 다 가지지는 못했지만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건 다 있는 삶이라  
살만하다. 다행히도.


 꿈꿔왔던 행운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의 하루를 지탱했던 수많은 다행들을 번번이 싼값으로 치부해버렸던 지난날. 그 무수한 날들을 헤아려보니 갑자기 어마어마한 행운의 연속으로 읽힌다. 스스로 다행인 줄 모를 만큼 '다행'이 익숙해진 삶을 사는 중이라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임을. 너무나 자주 잊고 사는 나는 '다행기억상실증 환자'인지도 모른다. 치료를 위해, 거리낌 없이 쓰는 생활소비와 특별히 공을 들이는 사치의 영역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반복적인 결제의 와중에 둔감해진 황홀함을 복기하며 한 번 더 사치스러워지는 지금 이 시간. 같은 값으로 '1+1' 사치를 득템 한 것처럼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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