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심리 에세이
칼 라거펠트는 살아생전 우주, 바다, 슈퍼마켓 등을 배경으로 한 패션쇼를 선보였다. 샤넬의 무대는 객석에 즐비한 셀럽과 비즈니스 관계자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사로잡을 만큼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웠다. 코코샤넬의 시그니처를 시대에 맞게 재해석 해온 라거펠트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전통의 틀에 갇히지 않는 혁신적인 관점으로 어머니 세대의 올드 한 의상으로 퇴색할 뻔한 샤넬을 모든 세대가 열광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칼이 일 년에 여섯 차례씩 패션쇼를 여는 동안 나는 일 년에 두 차례씩 차례상을 차렸다. 널따란 상을 채운 과일과 생선, 깎은 알밤과 모둠전에는 유행도 없었고 트렌드도 없었다. 정형화된 품목을 완성하기 위해 배정된 일정량의 노동이 있을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구성된 2인 1조가 상을 차리고 나면 관객처럼 서 있던 이 씨 집안사람 세 명이 앉아 박수갈채 한 번 없이 밥을 먹고 물러났다. 쇼에 쓰인 소품을 모아 옮기고 씻는 일까지 차린 사람의 몫이었다.
"같이 먹은 밥 같이 좀 치워요."라고 건의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봐야 하는 눈치와 그로 인한 긴장은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와 상충하면서 모순적이고 폐쇄적인 입지에 갇혀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보통의 일이라면 일이 끝난 후에 찾아오기 마련인 후련함이나 알찬 보람이 당시의 노고를 상쇄시켜 주는데 명절의 노동은 끝이 나도 찝찝했다. 노동 기저에 깔린 은근한 하대와 대놓고 구분하는 차별, 진심을 숨긴 채 의견 한번 내보지 못했다는 무력함이 남아 땀이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안으로 쌓인 것처럼 찜찜한 불쾌감이 씻기지 않았다.
명절이 끝난 후, 보상심리로 샤넬 립스틱을 쇼핑하는 수학적인 계산법을 택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상실감을 물질로 때우려는 접근법은 생각만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돈으로 환산하려 했다는 자괴감이 들뿐이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면 씁쓸한 기억조차 가물가물 해지기 마련이었지만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명절은 지난 기억을 되살리는 반복학습이 되고는 했다. 어떤 며느리들에게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독이었다.
남편의 처방은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했다. 싫으면 안 하면 된다는 거였다.
‘전지적 아들 시점’에서 말하는 충고가 처음에는 야속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차츰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주위의 기대에 따르려면 노력이 필요하고, 기대에 어긋나려면 용기가 필요한 법인데 용기보다는 노력 발휘가 쉬웠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며느리는 아무리 애써도 며느리일 뿐이었다. 흠 잡히지 않기 위해,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애태운 노력은 당연한 처신으로 여겨질 뿐이었고 그에 따른 치하를 들어도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나를 맨 꼴찌로 놓아야 인정받을 수 있는 패밀리 안에서 인정받았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 의미를 곱씹어 보고 나니 더 이상 인정받는 일에 목매고 싶지 않았다.
라이프 스타일에 어긋나는 게 있으면 꾹 참고 버티는 게 아니라
과감히 개선해 나갔던 샤넬의 태도를 닮고 싶었다.
관행처럼 지켜왔던 행동 패턴에서 조용히 발을 빼기로 했다. 명절 일정을 축소하고 시댁 살림에는 최소한으로만 손을 댔다. 시부모님의 감정에 깊게 이입해 내 행동에 대한 반응을 시뮬레이션해보던 상상을 차단하고, 뒷말을 신경 쓰며 일일이 예방하려 했던 신경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남편은 나에 대한 응원의 표시로 제사상에 접시를 나르거나 먹은 그릇을 씻는 등 '개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머님은 그 경미한 노동에 대해서도 뭔가 못마땅하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예전처럼 아들 부려 먹는 며느리로 보일까 봐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시부모님의 마음은 그분들의 몫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내 마음을 들볶으며 괴롭히는 건 그만하고 예의를 지키고 성의를 보이는 것까지만 하기로 했다.
심플하게 지나간 명절은 별다른 후유증을 남기지 않았다. 뭘 사서 보상하고 싶은 욕구도 없었고, 까닭 없이 우울해지지도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샤넬의 립스틱이 아니라 샤넬의 당당함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차례상은 차리지 않지만 기존의 양식과 다르게 살아도 별 문제없다는 걸 알려준 샤넬을 위해서는 한 번쯤 상을 차려주고 싶다. (故) 코코샤넬과 (故) 칼 라거펠트를 위해 교차된 C자 로고를 사과에 새기고 샤넬이 좋아하던 진주를 모티브로 한 꼬막을 삶아 상에 올리고 싶다.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제아무리 값비싼 샤넬 마크를 달았다 해도 구닥다리 디자인을 그대로 주장하면 재고만 쌓이는 것처럼, 시대에 맞지 않는 전통은 누구도 지기 싫어하는 짐이 되어 버릴 뿐이니 말이다.
전통은 재창조되어야 한다. 샤넬처럼.
*이미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