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심리 에세이
20년 전의 모나미는 하얀 몸통에 까만 머리가 색채 구성의 전부이던 펜이다. 교실 여기저기에 널려 있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던 ‘무난한 기본템’이었다. 숫자 153이 무늬의 전부이던 모나미는 흰색 블라우스 셔츠와 짙은 회색 스커트로 통일된 교실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외모든 성격이든 의견이든. 튀어봤자 좋을 게 없는 대한민국 고등학교와 세트처럼 닮아 있었다.
교복을 벗고 사복을 입게 된 후로도 나는 여전히 한정된 색채 안에서 주로 옷을 골랐다. 베이지와 블랙. 둘을 섞은 그레이가 주를 이루는 채도로 옷장을 채워 나갔다. 강렬한 원색은 인상이 강한만큼 몇 번 입다 보면 뭔가 그 옷을 입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자주 입기가 민망해졌다. 여러 옷을 섞어 코디하면서 오래 입기에는 무채색만 한 게 없었다. 신경 써서 매치하지 않아도 대충 톤앤톤이 되었고, 어두운 계열은 김치찌개를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데다가 때가 타도 밝은 색상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었다. 교복 치마가 회색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채색 계열의 옷은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주었다. 거무튀튀한 색으로 뒤덮인 거리를 걷다 보면 애초에 이 색감에 대해 품었던 ‘세련되다’는 인상보다는 ‘칙칙하다’는 소감이 들고는 했지만. ‘튀는 1인’보다는 ‘칙칙한 다수의 일원’이 마음은 더 편했다. 튀는 걸 부담스러워하며 먼저 주위 눈치를 살피는 자세는 학창 시절부터인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 삶의 태도로 자리 잡아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인식에 각인된 금기사항은 고가의 미술품 앞에 쳐 놓은 빨간 레이더망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훔치기 기술이 신기에 가깝게 단련된 영화 속의 도둑이 아니라면 레이더 망을 넘어설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안 하던 스타일을 시도하고 싶을 때면 한참을 망설이다 관둔 적이 열에 아홉이었고, 옷을 사기 전에는 먼저 거리의 유행과 쇼핑몰의 코디를 참고했다. 다른 사람이 입은 옷이나 쇼핑몰에서 매치한 스타일이 예뻐 보일 때. 비로소 나는 그 옷에 대해 욕구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다수의 객관적인 안목을 거치며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나에게도 최고 일리는 없지만 패션에 있어서만큼은 지금 이때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언제나 다수의 결정이 ‘옳게’ 여기 지고는 했다. 결국, 가끔 용기 내어해 보는 변화의 대부분은 ‘나에게는 처음이지만 남에게는 처음이 아닌 것’들이었고 ‘유행 따라잡기’에 머무는 시도에 그칠 뿐이었다.
교실을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튀는 게 싫었고,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눈에 띄어 책잡힐 거리를 만들기가 겁이 났다. 내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야 하는 디자이너나 패션피플도 아니고. 구태여 입에 오르내릴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스타일은 누구나 한 번에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만한 고만고만한 차림새에 머물러 있었다.
환경과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는 어느 생물체에게나 있는 본능이므로 이것은 어쩌면 ‘패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학적인 ‘생존’의 문제로 봐야 할 테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고가 단순히 ‘무슨 옷을 입을까?’에서 그치지 않고 나의 일과 말과 생활 전반을 지배한다는 데에 있었다. 튀는 사람을 ‘나댄다’는 말로 깎아내리는 공격적인 분위기가 종종 무섭고 미웠다. 나 역시 딱 대한민국 평균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문득, 답답함을 느낄 때면 “주위에 ‘나대는’ 사람들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다소 비겁한 소망이 들고는 했다.
2020년. 모나미가 달라졌다. 윤동주의 시를 디자인화하기도 하고 파스텔 톤을 입으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다른 펜이 아니라 모나미이기에. 어떤 시도를 하든 신선하게 느껴진다. 친숙한 디자인을 기본으로 약간의 변형만 가해도 '친근하고 재미있는 아이템'이 되는 모나미의 변신 가능성은 수천만 인구가 각기 다른 옷을 입게 될 경우의 변수처럼 무궁무진하다.
변한 건 모나미만이 아니다. 세상의 판도가 ‘튀면 죽는 게 아니라 튀어야 사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차세대의 흐름인 10대의 아이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남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이전 세대보다 두려움이 덜하다.
20년 전 졸업한 학교와 비슷한 분위기의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퇴근 후에는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쇼핑을 하고, 본인을 웃게 만들 수 있는 채널을 구독하며 지낸다. 이제는 전 국민이 8시 반이면 텔레비전 앞에 집결하게 만드는 프로도 없고, 모두의 옷을 교복으로 만들어버리는 브랜드도 흔치 않다. 다들 취향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며 이를 반영하는 프로와 제품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이질감을 느끼기보다는 내가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채우는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반갑다. (물론,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뇌의 색이 흑백인 것 같은 존재들도 있지만 지금 당장의 목소리는 클지언정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는 추세다.)
애초에 레이더망이 없었다면 그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로의 확률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느니 고정관념의 선을 하나씩 없애기로 했다. 전 세계에서 딱 하나뿐인 작품을 손에 넣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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