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으로 장바구니가 배송되는 세상이라 무거운 물건은 엄지와 검지의 몫이 되었다. 쌀 한 가마니와 고구마 한 박스를 옮기는데 필요한 근력은 허리나 팔 힘이 아닌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힘이다. 클릭 몇 번이면 쌀 한 가마니와 고구마 한 박스가 0kg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보다 신기한 일은 기적적인 편리를 누릴 수 있는데도 굳이 혜택밖에 서서 자발적으로 수혜를 벗어나기도 한다는 점이다.
택배기사님의 수고를 마다하고, 외주를 주던 일을 내 손으로 하기 위해 코스트코에 손수 장을 보러 갈 때가 있다. 주차 공간이 없어서 꼭대기층까지 올라가고도 빙글빙글 돌 때면 나는 지금의 이 상황에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밀어 넣었다고 믿기 힘들어진다. 계산대 앞, 기나긴 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는 나에게 앞으로는 이러지 말자고 설득하고 싶은데 못한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니까 어디서부터 설득하고 어떻게 말려아 할지 알지 못한다.
여러모로 생각해서 내린 추측은 아무래도 나는 여기에서 어떤 연애 비슷한 감정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 거 같다는 것이다.
빈 카트를 끌고 매장에 들어설 때의 가벼운 설렘은 연애를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과 닮은 모양새다. ‘네 거인 듯 네 거 아닌 내 거 같은’ 마트의 것과 눈을 맞추며 썸을 타는 시간이다. 눈빛을 통한 상대라고 해서 모두 연애를 할 수는 없듯이 눈길을 끈다고 모두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서로의 조건이 얼추 맞아떨어져야 한다. 형편과 끌림이 조율하는 대로 하나, 둘 카트가 채워지고 본격적인 연애가 무르익으면 ‘과연 우리 집에 데려가도 좋을 상대’인지 가늠해 보는 최종 평가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잠시 카트를 내려다보며 재검토를 하다가 함께 해도 좋겠다는 확신 혹은 충동이 들면 마지막 관문인 계산대, 결혼식장에 이르는 것이다.
계산대의 공기는 쇼핑몰 전체에 흐르는 들뜬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다소 무거운 공기가 한 톤 다운되어 가라앉아 있다.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 만져보기만 하고 내려놓아도 되었던 선택의 여지는 사라졌다. 삐삐 삐삐. 정확한 기계음이 스타카토로 떨어지고, 카트 안의 선택지는 바코드로 확정되어 내게 돌아왔다. 지불을 요구하는 청구서와 함께.
카트 안의 최종 결산은 머릿속으로 어림짐작 했던 대강의 숫자를 99%의 확률로 뛰어넘어 버리는 걸까. 특히 코스트코 같은 데서는 최종가가 성큼성큼 늘어나 버린다. 작은 단위로 쪼개 보면 싼 대신 많은 양을 묶음으로 파는 특성상 물건 하나를 더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만 원 단위가 더해져서다. 빵 한 봉지나 파 한 단을 추가하면 몇 천 원 단위로 늘어나는 일반 마트의 감각으로 쇼핑을 했다가는 계산대에 이르러 황망한 심정이 되기 십상이다. 캐셔 분의 손은 또 얼마나 민첩하고 재빠른지. 바코드에 찍혀 밀려드는 물건을 받아 챙기려면 덩달아 민첩해져야 한다. 결제는 칼 같고 거래는 끝났으니 남은 할 일은 다음 손님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 이백 원짜리 생수에 적잖이 시원한 위로를 받으며 돌아가는 것이다.
계산대에 이르러서야 체감되는 현실감각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반납하고, 삶의 질이 갑작스레 십 단계쯤 상승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낯선 집의 문을 열면 결혼을 선택한 사람에게 주어진 현실을 체감하게 된다. 혼자 살수도, 다섯이 살 수도 있었던 자유는 사라졌고 들뜬 마음이 없지 않았던 선택의 결과를 감당해야 할 여생이 도래한 것이다.
남은 여생은 끼니의 분량으로 소분되어 식탁에 오른다. 일정 자원이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쌓이는 복리가 마법이라면 매일의 식사를 꾸준히, 반복적으로 챙기는 일에도 일정 부분 마법과 같은 힘이 필요하다. 빠짐없이 돌아오는 삼시 세 끼의 성실함을 끼니때마다 마주하다 보면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너는 나를 왜 사랑하는가’에 대한 신비로운 궁금증이 ‘저녁은 뭘 먹을까, 아침은 뭘 먹어야 하나’의 먹고사는 대책 마련으로 바뀌기 쉽다. 먹거리는 차츰 가족 간의 사랑을 상징하는 마크가 되어간다. 퇴근하는 길에 산 딸기 한 팩이나 특별히 고아낸 삼계탕에 마음이 담기면 입과 장기를 어루만지는 스킨십이 되어 서로를 달래준다. 예전처럼 달달하지 않으면 어떤가. 디저트 천지인데. 설향 딸기도 있고 샤인 머스캣도 나왔는데. 다소 뜨뜻미지근해졌으면 어떠랴. 뚝배기의 열기로 보충하면 되는 것을.
코스트코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달달하고 뜨거웠던 연인에서 끼니의 정을 쌓아가는 가족이 된 사람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고민거리가 있다. 먹거리의 공급과 수요 조절 문제다. 잔뜩 사다 놓은 식재료가 며칠 만에 동이 나면 빈 냉장고를 채워야 하는 위기감에 쫓기듯 장을 보고, 그새 또 오른 물가에 겁이 나고, 머리를 써서 장을 봐 놓으면 또 머리 쓸 일이 생기고. 그래도 잘 먹는 식구들 보면 모든 게 다 보상받는 기분이고. 냉장고의 풍요도에 따라 요동치는 마음을 코스트코의 대용량 사이즈는 물량공세로 지원해준다. 만들어져 있는 음식이 주부에게 주는 안도감이란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조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델리 코너에 들러 하나 집으면 오늘 저녁은 해결이라는 생각에, 갑작스레 확보된 자유 시간에 독립만세적인 해방감을 만끽한다.
코스트코에는 흔히 ‘가고 싶은 장소’를 만들 때 꾸미는 전략이 없다. 감성적인 배경음악이 없고 ‘팔기 위한 장식’은 있어도 인테리어를 위한 장식은 없다. 은은한 조명도 없다. 물건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려면 정직한 형광등 조명이 최고다. ‘창고형 매장’의 압도적인 실용성은 좋은 향을 뿌리고, 듣기 좋은 음악을 깔면서 고객의 발달한 오감과 섬세한 취향에 어필하려는 의도 따위는 없어 보인다. 전략이 없는 게 전략이랄까. 상냥한 서비스로 어루만진 후 고양된 기분으로 덩달아 물건까지 사게 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여 오히려 안심이고 그 무심함이 상술에 휘말리고 있다는 의심을 지워낸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쓸 만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쌓아 놓았으니 알아서 가져가시라는 투다. 그 거친 태도가 믿음직스럽다. 내게 코스트코는 일주일치 끼니를 들뜨게 만드는 핫플레이스다. 즐거운 장단에 놀아나고 싶은 충동은 종종 편리함에 안주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고생을 자처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