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작은 존재에게 인생의 한 순간을 의탁하게 되는 때가 있다. 손톱만한 도장이 보증하는 집 계약서나 좀비 떼를 피해 차로 피신했는데 마침 주머니에 든 차 키 등.
죽느냐 사느냐의 사안에서 벗어나 '사느냐'의 기로로 들어선 후에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방점은 작은 존재일 때가 있다. 목욕탕에서 몸을 불리고 나왔는데 때수건이 없다면, 회를 주문했는데 사장님이 깜박하고 회간장을 안 넣어주었다면. 당연시해왔던 그간의 안녕과 행복을 적재적소에 놓인 작은 것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의탁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목욕탕의 방점이 때수건이고 회간장이 비로소 우리가 아는 회의 맛을 완성시키는 무엇이라면, 낯선 여행지에서의 나는 몸을 불린 후 때수건을 원하고 회를 먹을 때 간장을 원하듯 간절히 립밤을 찾고는 한다. 여행지에서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바람과 먼지에 노출된 입술이 건조해지면서 아플 정도로 당기는 것이다. 이미 샤워까지 마쳤는데 낯설고 어둑한 밖으로 나가 립밤을 구해올 엄두는 나지 않는 밤. 개인 사정과는 별개로 입술에게는 입술만의 사정이 있는지라 침으로 몇 번 축인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입술 너머에 혀가 비치되어 있는 인체의 신비로운 구조가 이때만큼은 유용하지 못하다. 임시방편 삼아 혀끝으로 축여보려고 하면 할수록 증발하는 침과 함께 더욱 심하게 당기므로 입과 혀의 위치가 다소 함정에 가까운 배치로 여겨질 정도로 화끈거린다. 까진 무릎에 물파스를 바르면 욕이 나오니까 보드라운 연고를 발라줘야 하듯이. 이럴 때 발라줘야 하는 게 립밤이다. 립밤 하나면 인간이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신체적 한계를 외부의 물건으로 해결하는, 문명의 발전에 구원 받는 기적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립밤 그거 하나가 없다. 우리집 서랍장에 쌓인 립밤만 세 개인데 이 순간만큼은 나의 것이 아니다. 집의 것이다. 나의 소유라 믿었던 1박 이전의 집기들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는 무기력한 허탈감에 치이고 만다. 지배력을 상실했을 때의 희미한 분노도 밀려온다. 집 안의 내가 아닌 집 밖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붉게 타오르는 입술을 공중에 말려두는 것 뿐.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과거의 나를 탓하는 후회 뿐. 다음번에는 꼭 챙길거라며 분노의 에너지를 다짐의 결의로 바꾸는 결심 뿐. 모두 화끈거리는 입술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뿐이다.
최소한으로 줄인 짐이 허점을 드러내는 여행지에 오면 익숙한 물건들에 길들여진 문명인의 한계가 이런 식으로 바닥을 드러내고는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물건들에게 감정의 난류를 의지하며 살아왔는지. 인간으로서의 독립심에 상처를 입는 기분마저 든다. 여행의 목적이 신대륙의 탐험을 통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나의 여행은 '문명화된 사회에 오냐오냐 길들여진 다 큰 어른'의 응애응애 거리는 면모를 발견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보다 약해빠진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베어 그릴스가 롤모델도 아니고, 생의 대부분을 문명사회에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또 크게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그래도 손톱깎이가 없다고 신경질을 내고, 바디 크림을 바르지 못했다고 짜증을 내는 인간은 그리 달갑지 못하므로 좀 더 크고 무던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고는 한다.
지하철 교통카드와 깔창과 썬크림과 이미 집에 있는 디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티셔츠가 신상이라고 출시되는,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으로 가득한 세계로 복귀할 날을 꿈꾸듯 기다리다 보면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이 나 하나를 지탱 중인, 작은 점으로 완성한 쇠라의 그림 속 인물로 분한 듯 하다. 여행지에서 발견한 나의 초상은 멀리서 봐야 비로소 형체가 잡히는 쇠라의 점묘화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