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신상 호텔이 오픈했다는 뉴스를 클릭한 나의 마음은 애써 술렁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음.. 그래서? 뭐? 뭐 어쩌라고?!' 어쩌다 노는 애랑 시비가 붙게 됐을 때. 속으로는 겁나는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게 옆에서는 다 보이는 것처럼. 애써 관심 없는 척했지만 쫄리지 않기에는 딱 봐도 상대가 셌다. 가보고 싶은 척하지 않기에는 홍보용 사진이 꽤 그럴싸했다. 가볼까 말까. 결정 장애가 올 때 갈피를 잡아주는 기준은 역시나 돈이다. 1박에 필요한 투숙비를 정확하게 알아 버린 후, 호텔 예약 사이트의 인터넷 창이 닫히는 동시에 마음이 접혔다. '접었다'가 아니라 '접혔다'. 수동태다. 일장춘몽도 못된 일초 춘몽에서 딸깍, 하고 깨어났다.
현실과 환상의 균형 잡기에서 현실 쪽에 비중을 둔 만족감이 '가성비'라면 환상 쪽에 비중을 든 충족감이 '가심비'일 텐데 여기는 나의 현실과도 안 맞고 환상과도 달랐다. 환상 중에서도 나랑 친한 환상이 있고 어색한 환상이 있는데 애는 어색한 나머지 즐기는 기분보다는 괴로운 심정이 되어버릴 사이즈였다. '인생 한번 살지 두 번 사냐'하는 식의 심정으로 체크인을 해버리면 호텔에서의 하룻밤은 딱 한 번짜리 인생에 어울리게 멋질지 몰라도 체크아웃 후의 두 번째 밤과 그 이후의 무수한 날들은 하나로 쿨하게 퉁치기 힘들 거 같았다.
그렇게 빠른 손절을 내리고 나서 얼마 뒤의 일이었다. 동네 갈빗집에 앉아 밥을 먹는데 집게를 든 친구가 대뜸 문제의 그 호텔을 언급하며 "우리 밥 먹고 00 호텔 로비 가보지 않을래? 트리 되게 예뻐."하고 돼지갈비 양념만큼이나 달짝지근한 제안을 건넸다. 체크인 아웃도 아니고 로비에 가서 트리 구경을 하는 것쯤이야. 뭐.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도착해 도어맨이 열어주는 문을 통과하자 나와 여기는 연이 없다고 딱 잘라 손절했던 지난날의 짐작이 경험 부족으로 인한 판단 미스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로비를 가득 메운 이 향기를 콧속에 넣어보지 않고 인생을 마칠 생각이었다니. 지난날의 나. 철이 없었다. 몇 달이나마 지금보다 어렸던 날의 미숙한 헤아림이었다. 반짝 거리는 대리석 바닥과 품격 있는 엘리베이터와 볼일을 오래 보고 싶어지는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다 보니 공간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 비데에 데워진 엉덩이만큼 뜨끈하게 순환되어 열리는 느낌이었다. 바닥은 행인들을 지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을 위층으로 올려주기 위해서만 발명되지 않았고, 화장실은 단지 볼 일을 보기 위해서만 마련된 공간이 아니라는 깨달음.
이전에 알고 있던 미적 감각이 눈앞의 대상을 통해 기분 좋게 조정될 때 열리는 감각의 신세계가 나를 꾸짖었다. '이제까지 겪은 좋은 게 좋음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세상에는 이보다 좋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안주하지 말고 찾아 나서거라.'
마음을 울리는 가르침을 새기며 꼭대기 층에 자리한 카페에 들어서는데... 아뿔싸. 신발이 크록스다. 그냥 크록스가 아니라 번쩍거리는 큐빅 지비츠가 발등을 덮은 '반짝 거리는 크록스'다. 작년 이맘때의 기준으로는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는데 한 해 동안 성장한 미적 감각으로 보니 대체 왜 가지려나 했나 싶은 모양새의 크록스다. 하고 많은 신발 중에 왜 이걸 신고 왔을까. 그거야 동네에서 만나는 동네 친구였으니까. 갈비 먹으러 갈 때만 해도 여기까지 흘러오게 될 줄은 짐작도 못 했으니까.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교훈을 막 신고 나온 크록스 두 짝을 통해 또 한 번 체험한 순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기 저 밑에 선 두 가지 것들을 모른 척하고 싶었으나 누구 봐도 버젓이 내 몸 아래에 달려 있는 나의 두 발이었다. 이것들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입구에 도착할 수 있는 게 작금의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환한 조명 아래 발등 위의 지비츠들이 영롱한 빛을 발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죄다 호텔과 세트로 맞춘 듯한 신발을 신고서는 오뛰 꾸뛰르의 모델처럼 워킹하는 밤. 심지어 곁에 선 친구마저 나와는 다른 차림으로 준비되어 있는 외로운 밤. '걸어 다니는 일'이 무거운 벌처럼 짐 지워진 밤이었다.
여기가 호텔이 아니라 거리였다면 크록스라 해서 민망하거나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깥은 그런 세계였다. 유행 지난 옷과 싸구려 옷감을 막 걸치고 다녀도 나의 '없음'이 적당히 묻히는 곳. 착시 효과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군중의 세계였다. 여기는 아니다. 나의 '없음'이 다른 이들의 '있음'을 통해 확연히 구분된다. 이거야말로 원치 않던 개성이자 두드러짐이다.
입구에서 복장 체크 같은 걸 한 기억은 없는데(그랬다면 여기까지 못 왔겠지만) 채에 거른 거름망처럼 걸러져 구성된 듯한 이 공간의 위화감은 뭘까. 백화점 명품관에 걸려 있을 법한 옷들이 마네킹이 아니라 실제 사람에게 입혀져 있는 풍경은 화려하고도 낯설었다. 설국열차 맨 앞칸에 당도한 뒷칸 사람의 심정이 되어버린 나는 나름 큰맘 먹고 산 20만 원 대의 패딩이 후줄근해 보이는 묘하게 기분 더러운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안 보는 거 같으면서도 서로의 차림새를 한눈에 봐버리고, 안 보고 싶어도 보일 수밖에 없도록 같은 공간을 점유한 낯선 사람들. 부부끼리, 연인끼리 특별한 시간을 보내러 온 이들도 많은 것 같은데 이들의 특별한 저녁이 TPO에 맞지 않는 나의 차림으로 인해 살짝 산통이 깨진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며 자리를 잡자마자 테이블 아래 발을 감췄다. (마주 오던 어떤 여자가 내 크록스를 째려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피해의식인지 진짜 일어난 일인지 몰라 잠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실 크록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집에서 가장 좋은 옷에 신발을 골라 왔다 한들 이 동네의 수준을 맞추지는 못했을 거다. 역시 안 어울리는 건가. 이 호텔과 나는. 럭셔리와 나랑 존재는 다리 찢어지는 조합인가. 세상 어딘가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코앞에서 봐버리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던 내 삶이 초라해 보이는 불필요한 비교의식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안 보면 몰랐을 걸 괜히 봐버려서 심란해지다니. 다소 억울하게 우울하다.
몇 번의 호캉스를 경험한 후, 호텔의 좋은 점과 시간대별로 어떤 편의를 누릴 수 있는지 상상만으로도 뇌가 폭신해질 만큼 알게 되었으면서도 예전만큼 '호텔'하면 무조건 '기쁨을 주는 곳'이라고만 결론짓지 않게 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다. 호텔에서의 기분전환이란 내게는 제로섬 게임과도 같다. 제공되는 서비스와 좋은 공간에 힐링되었다가도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비교되어 간만의 희열이 빈부격차의 박탈감으로 깎이는 곳. 전환되었던 기분이 언제 원점으로 돌아갈지 몰라서 '기분전환'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을 보장할 수만은 없는 곳.
이 불편한 심리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안 오면 그만일 것이다.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분수에 맞게, 부담 없는 곳만 찾아다니면 될 것이다. 재미는 좀 덜해도 속은 더 편할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처음부터 모르면 몰랐지 모른 체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모른 체하는 태도를 내 삶의 태도로 가져가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 언니 결혼식에 입을 한복을 맞추러 엄마와 함께 청담동에 들른 일이 있었다. 난생처음 엄마랑 강남의 부촌을 걷게 되었는데 평소 대화에 공백이 생기는 걸 싫어하는 엄마가 그날따라 유독 말이 없었다. 차라리 '여기 참 잘 사는 동네구나' '집 좀 봐라. 정원까지 있고 멋지다.'라고 느낀 바를 솔직히 말했으면 나았을 텐데. 엄마는 마치 주위에 그런 집이 한 채도 없는 것처럼 모른 체했다. 이런 동네가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엄마가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또 알았다. 우리 엄마가 지금 기가 죽었다는 걸. 평생 당당한 엄마의 모습만 보고 살았던 나는 그날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의 풀 죽은 모습을 목도하고 말았다. 속상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엄마, 강남 사람들 잘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 뭐 죄지었어!'하고 외쳐버리고 싶었으나 못 본 척하며 걸어가는 엄마의 속내를 못 본 척하는 게 딸의 도리인 거 같아 그냥 걷기만 했다.
그때 속으로 나도 모르게 약간의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 곁에 서더라도 기죽지 않음'을 인생의 노선으로 삼기로.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부의 갭이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갭은 사람과 상황의 형편마다 다를 것이다. 재테크 실력, 개인의 노력과 끈기, 집안의 자산, 다양한 흐름이 맞물린 운,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는 베짱이나 그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능력 등등.
돈 많은 이들의 능력과 배경은 백 프로 존중하지만 그에 대한 반사로 나를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는 나만의 능력과 서사라는 게 있고 남들은 몰라줘도 그걸 아는 나만큼은 스스로를 함부로 여기고 싶지 않다.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까지야 그들의 선택이므로 어찌해볼 수 없는 영역이지만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내 선택이니까 최상위의 대접을 해주고 싶다. '함부로 기죽지 말 것'을 다짐한다는 자체가 이미 약간의 기죽음을 내포하고 있고, 주위를 의식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꼴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 마음에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을 계속해나가고 싶다.
멋지고 비싼 공간에 보이지 않게 부여된 '격'이 어느덧 '급'이 되어버리고, 그 급을 나누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옷차림이나 끌고 다니는 차 같은 게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안 하는데 괜히 혼자서 비교하고 위축되기 쉬운 분위기이지만. 상처받지 않고 마음 편해질 자리만 찾아다닌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지만.
특정 구역을 어려워하며 짐짓 금을 긋고 내 삶과 분리해놓고 싶지는 않다. 상처받을 땐 받더라도, 위축될 땐 위축되더라도. 끝까지 가보고 싶다. 노는 애 앞에서 무섭지 않은 척하려고 애썼던 어린 날의 마음이 일종의 자존심이었던 것처럼. 주위가 어떻든 내 삶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는 어떤 지점에까지 가보고 싶다. 나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장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자리를 애써 모른 척하며 살기에는 그 기쁨이 너무 특별하다. ‘그게 될까?' 싶은걸 되게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격'이다. 어떤 '급'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격'에는 이르고 싶다.